단편소설 습작!!
https://youtu.be/lIavfZz58fM?si=CL3-zpCoNLqFLdwL
고속도로를 달리며 부산으로 향하던 중, 나는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40세. 추석 연휴. 고향으로 가는 고속도로. 이 세 가지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창밖으로 낙동강이 보였다. 물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강을 바라보는 사람뿐이다.
나는 차에 다시 올라 시동을 걸었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었다.
잠시 후면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20년 전 떠났던 그곳으로,
아니 정확히는 그곳의 환영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버지가 어디서 만날지 물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혼자 가고 싶었다. 아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 FM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 클래식 팝 방송에 멈췄다.
DJ가 빌리 조엘의 음악을 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The Great Suburban Showdown',
위대한 교외의 결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비행기를 타고, 공짜 샴페인을 마시며,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무겁기만 한 사람의 이야기.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부산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도착할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닮았다. 아니,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삼남매 중 가장 많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를 빼다 박았네."
동생들은 어머니를 덜 닮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어머니와 잘 지냈다.
명절마다 모이고, 생일을 챙기고,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둘째는 의사가 되었고, 막내는 공무원이 되었다.
둘 다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았다. 가족사진을 보면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만 그 안에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사진의 구석에,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억지로 짓는 미소와 함께.
중학교 때였던가. 아니, 고등학교 때였을 수도 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가.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이 집을 떠나겠다고.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겠다고. 서울로, 아니
어디든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겠다고.
라디오에서는 계속 빌리 조엘의 노래가 흘렀다.
지루한 일요일 오후, 똑같은 농담을 하는 가족들,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는 마당.
나는 핸들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알아. 그 기분. 집에 가면 모든 것이 그대로일 거라는 걸.
변한 건 나뿐이라는 걸.
"한 번 떠난 고향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들 하지."
DJ가 말했다. 나는 볼륨을 조금 높였다.
나는 목표를 달성했다. 대학에 갔고,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졌다. 가족들은 내게 기대를 걸었다.
첫째로서, 장남으로서.
나는 은행에 취직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직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혹은 내가 이해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부터 우리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다.
수험 기간은 예상보다 길었다.
동생들은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갔다.
둘째는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가 되었다.
막내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들은 부모님께 효도했다.
명절마다 모였고, 용돈을 드렸고, 가끔 여행도 함께 갔다.
나는 그 모임에 거의 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아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나는 항상 실패한 장남이 되었다.
늦게 합격한 사람,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 가족에게 짐이 되는 사람.
동생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나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며.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동생들은 이미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둘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막내도 약혼했다.
명절이 되면 모두 모여 웃고 떠들었다.
조카들이 뛰어다니고, 동생들의 배우자들이 부엌에서 일을 도왔다.
나는 그 풍경을 멀리서 바라봤다.
늦게 도착하고, 일찍 떠났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있다 가지 그래."
하지만 나는 머물 수 없었다.
변호사가 된 후 나도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렸다.
하지만 수험 기간의 빚이 남아 있었고,
어머니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그 일로 또 갈등이 생겼다.
다행히 둘째가 병원을 개업하면서 넉넉한 생활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나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었다.
나는 안도했다. 이제 내게 기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쓸쓸했다.
나는 장남이었지만, 장남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둘 중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새로운 요구가 있었다.
결혼하라는 것. 그리고 결혼할 때까지 월급을 본인이 관리하겠다는 것.
나는 30대 중반이었지만, 그녀에게 나는 여전히 미성년자였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결혼을 결정했다.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만난 사람과.
그녀는 고등학교만 졸업한,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변변한 재산도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변호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부모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택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처음에는 급했다. 어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녀를 선택한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몇 시간이고.
어머니와의 관계, 가족과의 갈등, 수험 기간의 고통.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나는 당신 어머니와 달라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당신 편이 되어줄게요. 헌신적으로."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도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부모는 분노했다. 가족들은 나를 경멸하고 포기했다.
명문대를 나와 변호사가 된 장남이 아무 것도 없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와 결혼한다니.
그것도 그들이 소개한 전문직의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을 모두 거절하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사실이 수치 그 자체였다.
나는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선택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결혼식을 마친 다음 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게 청구서를 내미는 것이었다.
"당신 만나면서 내가 쓴 돈이에요.
데이트 비용, 선물, 당신 생일 파티. 다 합치면 몇 천만 원이에요.
내 마이너스 대출로 댔어요. 이제 당신이 갚아야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투자했고, 이제 회수할 시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이 결혼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도망쳐 온 곳에 낙원은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더 냉혹한 무언가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결혼생활은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모든 것을 하나씩 구속하기 시작했다.
월급, 시간, 인간관계. 어머니와 다르다고 했던 그녀는, 결국 어머니보다 더 철저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세부 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도 숨 쉴 수 없었다는 것.
매일 술을 마셨고, 매일 사라지고 싶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이혼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재산, 명예, 자존심.
나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지만, 내 사건에서는 패배했다.
역설적이었다.
차는 이제 본가 근처에 다가왔다.
익숙한 거리들이 보였다.
편의점, 약국, 빌딩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30년 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 낡았을 뿐이다.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고향에 온 건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라고,
그 후엔 바람처럼 사라지겠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노래하는 빌리조엘의 목소리.
나는 라디오를 껐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로워졌으니까.
원룸에서 혼자 살지만, 그것이 더 편했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 공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공간.
가족들은 여전히 화목했다.
동생들은 부모님과 자주 만났다.
명절은 물론이고, 어머니 생신, 아버지 생신에도 모였다. 조카들의 생일에도 모였다.
사진을 보면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는 가끔 초대를 받았다.
"형도 와." 동생들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 거절했다. 일이 있다고, 피곤하다고 핑계를 댔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저 갈 수 없었다.
그곳에 가면 나는 항상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이혼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만난 사람.
그녀도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암을 앓았고, 아직도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이해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달랐다. 동생들이 가족 여행을 제안했다.
"형도 꼭 와야 해. 다 같이 가는 거야." 막내가 전화로 말했다.
목소리가 진심으로 들렸다.
나는 많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조금씩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가족들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40세가 되도록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은 아니니까.
그래서 수락했다. "알았어.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과연 잘한 결정일까. 하지만 이미 약속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여행 첫날은 예상보다 괜찮았다.
우리는 부산에서 제주도로 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둘째 동생의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막내 동생의 아내가 농담을 했다. 모두 웃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봤다. 테이블 한쪽 끝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며.
가끔 웃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머니가 조카들에게 음식을 떠다 주었다.
"많이 먹어라." 그녀는 자상했다.
둘째 동생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용히 식사를 했다. 가끔 손주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평생 일만 하다가, 이제는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형, 괜찮아?" 막내가 물었다.
"응, 괜찮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괜찮지 않은지 설명할 수 없었다.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둘째 날 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저녁 식사 후, 가족들은 호텔 로비에 모였다.
조카들은 키즈 프로그램에 갔다.
동생들의 배우자들은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남은 건 우리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둘, 그리고 나.
"다들 잘 사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둘째를 보며 말했다. "둘째는 의사도 됐고, 아이들도 있고."
그리고 막내를 보며 말했다. "막내도 안정적이고, 결혼도 잘했고."
그리고 나를 보았다.
"너는..."
그녀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멈춘 그 공백이 모든 것을 말했다.
"어머니." 내가 말했다. 조심스럽게.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건 알아.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혼도 하고, 재산도 많이 잃고.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는 거 아니겠니."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걱정의 방식이 나에게는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저도 힘듭니다." 내가 말했다.
"아직 회복 중이에요. 조금만... 너무 그러지 말아주세요."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생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바다를 바라봤다.
"네가 힘든 건 알아. 하지만 지켜보는 부모는 더 힘들어.
우리는 너 때문에 밤잠을 못 자.
너는 우리에게, 가족들에게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하는거 아니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했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한다. 자식은 그 걱정을 달래줘야 한다.
자식이 힘들어도, 부모는 더 힘들다. 그러니 자식이 참아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밀려왔다.
2차시험을 앞두고 매일같이 걸려오던 전화.
"합격할 수 있느냐." "합격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불안한지 아느냐."
"나도 불안합니다, 어머니." 내가 그때 말했다. "일주일만 기다려주세요."
"네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 그러면 부모가 불안한데, 네가 우리를 안심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
나도 불안했다. 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며칠 후면 시험날이다. 그 며칠만 나를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했다.
하지만 그 며칠조차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혹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나에게 쏟아냈을 뿐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다치게 했을 뿐이다.
호텔 로비에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말했다.
걱정한다는 말. 왜 형제들처럼 제대로 살지 못하느냐는 말. 남들보기 부끄럽다는 말.
동생들은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도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이것은 어머니와 나 사이의 일이었다.
나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목이 아프고, 머리가 무거웠다. 감기 몸살 증상이 갑자기 올라왔다.
"형, 괜찮아?" 둘째동생이 물었다.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한 것 같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정신이 무너지면 몸이 아프다는 말의 의미를 그때 알았다.
"내일 일정은 취소하겠습니다.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어머니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래, 쉬어라. 내일 보자."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에어컨이 윙윙거렸다. 창밖에는 바다가 있었지만, 나는 커튼을 닫았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동생들도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더더욱.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서로를 챙기고, 명절마다 모여 웃는다.
나만 그 안에 어울리지 못한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어머니와의 기억들 때문에.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들 때문에.
누가 옳을까.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모두가 옳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방식대로 자식을 걱정하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살려고 애쓴다.
다만 그 두 방식이 맞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최소한의 도리는 다하되,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이 냉정하고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집에 돌아와서도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열이 났고, 기운이 없었다.
몇 달 동안 마시지 않았던 술을 다시 입에 댔다.
과거에 느꼈던 자포자기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제 새로운 삶이 있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고.
그것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오늘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 병원으로 간다. 그녀의 정기 검진이 있다.
암 환자였던 그녀의 검진.
솔직히 말하면 지금 몸도 마음도 무겁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모든 것이 힘들고 우울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선택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나는 이 새로운 삶을 제대로 살고 싶다.
그래서 간다. 힘들어도, 지쳐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차에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졌다. 어제 들었던 그 채널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노래가 흘렀다. 빌리 조엘의 목소리.
'작별을 고하러 집에 왔을 뿐이야. 그리고 나서는 바람처럼 사라질 거야.
다시는 보지 못할 거야. 저 하늘에서 마지막 결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차를 몰았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부산을 벗어나며, 나는 백미러로 도시를 바라봤다.
멀어지는 풍경. 작아지는 건물들.
고향이란 무엇일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
기억 속에만 남겨두어야 하는 곳.
그리고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저 하늘에서나 다시 만나야 하는 곳.
고속도로는 비어 있었다.
아직 추석 연휴가 끝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에 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웃으며. 혹은 참으며.
동생들은 지금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을 것이다.
조카들이 뛰어다니고, 동생들의 배우자들이 설거지를 하고. 평범하고 따뜻한 추석 풍경.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부러운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저 그들은 그들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
나는 액셀을 밟았다. 속도계의 바늘이 올라갔다.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끝나고 DJ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떠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
위대한 교외의 결전은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각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여자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디쯤이야?"
"대전 쯤."
"자기. 괜찮아?"
"응, 괜찮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질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또다시 일어설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전화를 끊고, 나는 계속 운전했다.
터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넜다.
멀어지는 고향. 가까워지는 서울. 그리고 새로운 삶.
라디오에서는 또 다른 노래가 흘렀다. 빌리 조엘의 다른 곡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채널을 돌렸다.
더 이상 고향에 대한 노래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 했다.
40세의,
자유로운,
그리고 여전히 싸우고 있는
한 남자의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