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연습, 멈추는 연습

손해를 인정하는 법에 대하여

올해 초, PT를 등록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헬스장이었고,

그곳 트레이너가 권유했다.

할 일 없을 때 운동이나 할까 싶어

헬스장을 등록했고,

'기구 사용법 알려주겠다'는 제의에

얼떨결에 승낙했다.


웨이트 초보인 내 수준에 맞게

차근차근 수업을 진행해주고

내 모습을 모두 촬영해서 수업 후 올려주면서

다시한번 자세를 교정해주는 태도에 감동했었고

그게 100만 원 정도의 수업 등록까지 이어졌다.


뭐, 억지로 하거나 기망당한 건 아니기에

남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긴 한데

그 다음부터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등록 후 첫 수업 시간, 느닷없이

트레이너는 '앞으로 더 수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 집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단다.

나이가 서른 살이 넘었다면서 아버지 사업 때문에 부산을 떠난다고?

거짓말이란 게 눈에 보여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알겠다며 웃어넘겼다.

(실제 검색을 해보니 다른 헬스장에 그 트레이너의 광고가 보였다)


그래서 물었다.

이틀 전에 당신과 한 계약은 어쩔 거냐고.

그랬더니 원래 이런 경우는 잘 없는데,

'특별히' 팀장께서 맡아주시기로 했단다.

'특별히'를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많이 거슬렸고

뭔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어린 친구가 저렇게 하는 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고

나야 운동만 하면 되니까 싶어서

일단은 그냥 넘어갔다.


다음 수업 시간, '팀장'이라는 새로운 트레이너를 소개받았다.

사실 팀장인지 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나를 잘 가르쳐주면 그게 전부다.

그래서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첫 수업은 힘들었다.

두 번째 수업도 힘들었다.

세 번째 수업도 더 힘들었다.

내가 힘들어서 헉헉거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회원님 많이 지치신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그냥 수업을 일찍 끝내곤 했다.

뭐 수업시간 다 채워달라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반복되다보니 내 입장에선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때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게 아닐까?? 뭐. 하여튼.


수업이 저런 식이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즐거울 리가 없다.

업무가 바빠지면 수업을 연기시켰고,

그 연기가 너무 갑작스러울 때는 자발적으로 수업 일수를 차감시켰다.

그러다 보니 수업 횟수는 지급한 돈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 것 같다.



이에 더하여 새로운 트레이너는 뭔가 급했다.

원래 20회 수업은 3개월 안에 끝내야 하는데

회원님께서는 왜 이리 자꾸 미루냐며,

이렇게 하면 여러모로 본인이 난처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그런 걸 고려해서

절반이상의 수업을 하지도 않고 그냥 차감하는 걸로 처리했는데.

근데 뭐 일단 그 '바닥'의 룰 같은 것도 있을테니

내 태도에 대해, 내 게으름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

너무 미안해서 수업을 20회 정도 연장하기도 했다.

앞선 수업을 절반도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달 전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다)



100만 원 정도를 지급하고 수업을 연장한 지 얼마 후,

그 트레이너 왈, 이번에는

갑자기 자기가 다른 지점으로 옮긴다고 했다.

이 분들은 뭔가 계약만 하면 이렇게 변동 사항이 생기는지,

원래 이런 것인지 궁금증이 너무나 많았지만

뭐 물어봐야 제대로 대답해 줄 리가 만무해서 그냥 참았다.


여하튼 그럼 남은 수업은 어쩌냐고 물었더니,

남은 수업을 받고 싶으면 자기가 근무하는 곳으로 와야 한단다.

그 와중에도

이런 상황이 생긴 건 본인의 잘못은 없으며,

'회원님께서 빨리 수업을 소진하지 않으셔서'라는 식의 변명을 멈추지 않는다.

듣다보니 그냥 한숨만 나왔다.


나는 수업료를 지불했다.

남은 수업은 열여섯 번 정도. 돈으로 따지면 몇십만 원.

솔직히 날려도 괜찮은 금액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수업이고,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딱히 수업 내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전철 몇 구간을 가서 굳이 수업을?

이런 것으로 고민이 많이 되었지만


일단 매주 정해진 시간에 전철을 타고 가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은 무조건 수업을 받기로 했다.

시작부터 뭔가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역시도 내 과실이고

현재 상황에서 판단해봐도

일단 사적인 일이기도 하고,

수업료 자체가 아주아주 큰 돈도 아니고,

저런 짓거리를 하는 친구들 나이도 어리고

그러다보니 뭔가 화를 낸다거나

법적으로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져서.



그렇게 억지로 몇 번 수업을 들으러 가긴 했는데

뭔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미 쓴 돈을 아끼려고 앞으로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한 가지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수업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운동은 본래 즐거워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의무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오늘 나는 결심했다.

그냥 그만두기로. 남은 금액은 포기하기로.


환불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또 시간이 들고, 에너지가 든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고, 때로는 다퉈야 한다. 아니

저 친구들 연배에는 그 돈이 크게 느껴질테니 아마 100퍼센트 다툼이 생길거다.

일단 내 입장에서는 시간낭비다. 100퍼센트.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몇십만 원은 교육비다. 앞으로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교육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

이미 쓴 돈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을 배우는 데 든 비용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트레이너에게 연락할 것이다. 간단할 것이다.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수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환불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감사 인사로 끝낼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직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마음이 가벼워졌다.

결심만으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전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자유로워졌다.


포기는 때로 용기다.

손해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이미 쓴 돈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내 것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내가 정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만두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포기하면 패배라고.


하지만 때로는 그만두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잘못된 길에서 내려오는 것.

맞지 않는 옷을 벗는 것.

그것도 하나의 결정이다.


몇십만 원의 교육비는 아깝지 않다.

나는 중요한 것을 배웠으니까.

포기할 줄 아는 것.

손해를 인정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만두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그만두려면 말이다.



P.S. 이 글을 쓰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지금도 인연이 이어지는 분들은 모두 그랬다.


아니다 싶은 걸 과감하게 버릴 줄 아셨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버는게 나은 것 같다고.

공통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 분들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잘 사신다.

이건 내가 10년이상 직접 보고 있는 거니까 확실하다.


그런 걸 보면 저런 사고방식이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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