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본 뒤 먹는 떡튀순과 얼그레이 바닐라 티라떼
사주를 보고 왔습니다.
집에서 전철 타고 무려 2시간이나 걸려서!
그 정도 용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하여간 질러버리고 말았죠.
왕복 네 시간. 사주 하나 보자고 이래야 되나 싶긴 했지만 예약일이 코앞이라 무를 수도 없으니
지하철에서의 무료함을 달래줄 이어폰과 책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2시간 걸려 찾아간 그곳은 잘 보더냐!라고 물으신다면...
분명히 소득이 있긴 했습니다.
"아, 그냥 지금 할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주를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최근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지금 해야 할 일들은 내팽개치고 유튜브 타로며
사주 앱을 들락 거렸던 이유는 제가 '예언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요.
"몇 월 며칠에 어떤 좋은 일이 생기고, 너의 목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서 얼마큼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해줄 누군가 말입니다.
두루뭉술하지만 이번달, 다음 달엔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말을 듣긴 했는데
이번엔 그래서 그 '좋은 소식'이란 게 내가 원하는 그 '좋은 소식'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며 개운치 않더군요.
나는 예언자를 원하는 동시에 누구의 예언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말에 약간의 희망만 걸뿐 여전히 불안해하며 더 확신을 줄 예언자를 찾아다니고 있었죠.
사주풀이가 끝나고도 확신이 없어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니, 이미 했던 풀이에 입각한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명리학자 선생님의 얼굴에서 '이제 더 할 말도 없다'는 감정을 읽으며 느꼈습니다.
발을 동동 거리며 예언자를 찾아다니던 시간은 지금 끝났다는 것을요.
*
사주를 보러 간 동네는 북적북적하고 유동인구도 많지만 지하철역 주변엔 낡은 상점가가 늘어섰고
복잡하고 좁은 도로 뒤편엔 비슷비슷한 모텔들이 쭉 늘어선,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처음 가 본 동네였습니다.
사주만 보고 돌아가기엔 왕복 4시간이 아까워 근처의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그럴듯한 맛집은 없었고, 결국 체인점인 떡볶이 가게에 들어가 떡튀순 세트를 시켰습니다.
시트지가 거의 다 벗겨진, 닿으면 파상풍에 걸릴 것 같은 가게 뒷문을 마주 보고 먹은 떡튀순 세트는 밀떡은 퍼졌고, 순대 역시 과하게 찐 듯했고, 튀김은 차갑지도 않지만 따뜻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상한 것보다 조금 떨어지는, 하지만 그냥저냥 먹을만한 맛.
딱 오늘 본 사주의 맛이었습니다.
차마 곧바로 2시간짜리 전철에 다시 몸을 실을 기운이 없어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참, 제가 본 스타벅스 중에 가장 낡은 분위기더군요.
스타벅스인데 대학가의 오래된 카페 느낌이라면 감이 오실까요?
얼핏 맛있다고 들었던 스타벅스의 얼그레이 바닐라 티 라떼를 이참에 먹어보자고 시켰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밀크티에 바닐라 향 첨가한 느낌이었어요.
묘하게 모든 게 기대에 못 미치는,
그렇다고 '에이 운수 나쁘네!' 할 것까진 아닌
참으로 애매한 하루였습니다.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낯선 동네의 촌스러운 간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창문에 낀 먼지 때문에 동네가 더욱 낡아 보였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도 낡기로는 못지않고, 그 낡음을 꽤나 사랑하는 저이지만
남의 동네여서일지, 이 낯선 동네의 낡음이 눈에 띄더군요.
그리고 그 낡음을 인지하자 그와 닮은 나의 낡은 마음도 보였습니다.
이쯤이면 할 만큼 하지 않았냐며, 이젠 나도 편하게 지금까지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다며
가만히 앉아 구원의 손길만 바라고 있던, 새로워지지 못한 낡은 마음.
그 낡은 마음을 나는 이 낯선 동네에 버리고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의 동네에 뻔뻔하게도 무단투기하고 돌아온 집.
오늘 아침보다 새로워진 내가 되어 침대에 누워 미래를 생각합니다.
당장 가장 중요한 미래를 말이죠.
내일은 뭐 먹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