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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gbong Mar 23. 2020

소설 헛간을 태우다, 영화 버닝.

영화와 원작 소설 비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봤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보고 이 영화의 원작이 된다고 하니 한번 봐야지 하고 미뤘다가 오늘 보게 되었다. 전체적인 맥락은 영화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 배경이 다르고 그로 인해서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심리적 맥락이 전혀 달랐다. 주인공 ‘나’의 경우 영화와는 다르게 여자 친구 해미와 10살의 나이 차이가 났다. 영화에서는 ‘나’ 종수와 해미는 동갑내기 친구이고 벤은 나이가 많다. 소설에서의 벤은 나이가 오히려 ‘나’ 보다 어리다. 20대 후반의 고급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인물. 


‘버닝’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이해가 간다. 애매모호함을 극적으로 살렸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에게도 영화는 모호함만이 가득하다. 그것을 어떤 상상력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실망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재미없음에 더 가깝게 본 거 같다. 다만 영화를 본 후에 나의 생각 깊숙이 파고드는 어떤 느낌이 지속적으로 날 자극했고 그것은 재미없음을 상쇄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소설에서 ‘나’는 결혼을 한 상태이다. 그러니 그녀와의 관계는 불륜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부가적인 ‘소재’ 일뿐이다. 그녀는 배가 고플 때 그를 불러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는다. 보통은 그가 그녀를 부른다. 그녀는 그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만난다. 어느 날 그녀는 북아프리카에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북아프리카는 알제리를 말한다. 이 부분도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 중에 하나이다. 영화에서 ‘그레이트 헝거’는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해미는 본인이 번 돈으로 여행을 가지만 소설에서의 그녀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다녀온다. 개인적으로 알제리에 좀 머물렀던 필자로서는 그 지점이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알제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아프리카와는 매우 딴판이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유럽에 가깝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도 이슬람어와 불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해미는 케냐를 다녀온다. 케냐는 동아프리카로 알제리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한국-중국 정도가 아니라 한국-인도 정도의 거리감이다(물론 인도가 더 멀다). 문화도 언어도 종교도 다르다.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아프리카에 피부가 까만 사람들과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는 동물들이 있다면 케냐와 훨씬 가깝고 피부가 하얀 사람들과 사하라 사막이 생각난다면 알제리에 더 가깝다. 


소설 속 ‘나’는 그녀가 출국할 때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그녀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도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공항까지 마중을 나간다. 그녀가 데리러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갈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올 때는 '그'와 돌아온다. 그는 영화에서 벤이라는 인물로 나타난다. 영화와 소설의 공통점은 뭘 하는지 잘 모르겠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위대한 개츠비]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츠비에 그 인물을 비유한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돈이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남성’. 영화에서도 그렇게 비유된다. 영화에서는 특히 장소가 대비적으로 나오는데 ‘나’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의 북한 경계지역, 해미는 서울타워가 보이고 해가 들지 않는 옥탑방, 벤은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동네로 묘사되는 강남의 서래마을. 영화에서 세 청년을 다뤘다면 소설에서는 세 인물을 다룬다고 보는 편이 맞는 거 같다. 소설에서 그녀는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 느낌. ‘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 그는 20대 후반의 속을 알 수 없고 돈이 많은 남성. 


영화에서 셋은 모두 무언가를 명확하게 하지는 않지만 뭔가를 하기는 한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배달일을 하고 해미는 마임을 배우지만 내레이터 모델 일을 한다. 벤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청년’을 다뤘고 이 시대의 청년에 반영한다면 뭔가 비슷한 맥락이 비친다. 꿈이 있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그 꿈에 가 닿기에는 너무 먼 이상과도 같게 느껴진다. 현실을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그 행위는 심리적으로 생각하는 이상과는 거리감이 있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이 본 청년들은 이상과 실제 사이를 방황하는 청년들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는 이 부분이 대두되지는 않는다. ‘청년’이 아닌 인간으로서 다루기 때문인 거 같다.  


영화에서는 캐릭터들의 행위들이 좀 더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책에서는 ‘나’의 행위들에 좀 더 집중한다. ‘나’는 그가 태울 헛간들을 살피기 위해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 원래도 조깅을 했었지만 헛간들을 돌아보기 위해 더 긴 거리를, 기존에 가지 않던 곳들을 뛴다. 영화에서도 종수는 매일 뛰면서 비밀하우스들을 살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을 멈춘다. 왜냐하면 벤을 미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수는 어떤 의심을 끊임없이 키워가면서 벤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헛간을 매일 같이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뒤로도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은 여기서 짧은 단편으로 마무리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당연하게도 여기부터는 이창동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종수는 벤을 의심하고 벤을 미행하고 벤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범죄의 행위나 범죄의 사실 그리고 범죄 자체가 명확하게 영화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해미가 사라졌을 뿐이다. 종수는 벤의 발언들과 속속 나오는 증거들로 스스로 어떤 결론을 짓는다. 그리고 어떤 행위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청년’이라면 이 부분은 청년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길이 어떤 식으로든 구체화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헛간을 뛰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고 불에 타는 헛간을 상상만 할 뿐이다. 해석을 붙이자면 이렇다. 헛간이란 삶의 어떤 무기력이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공허’ 같은 것 말이다. 삶을 살면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구체적인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그’가 나타나 헛간이라는 소재를 줬고 ‘나’는 그것이 실제로 태워지는 상상을 하며 ‘나’ 주위에 태워질 헛간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공허를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을 살아가기에도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아니면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무엇’ 이던가. 우리는 어느 순간 어른이 된다. ‘나’도 그 어른의 순간을 맞이한 것 일 수도 있다. 재밌게도 영화에서 해미는 종수의 어릴 적 친구이자 종수가 기억 못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 종수는 그것이 사실인지 궁금해하면서 찾아보지만 사람들의 말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어른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만 종수는 사실일 수도 있는 이유를 찾아낸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고 궁금했던 소설은 사실 조금 더 모호한 청년들에 대한 묘사였다. 그러나 내가 본 소설은 모호하지도, 또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았다. ‘버닝’은 그저 이창동 감독의 작품일 뿐이었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내게는 두 작품 모두 흥미롭고 앞으로도 생각해 봐야 할 ‘헛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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