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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gmong Jul 08. 2019

독박육아로 힘든 당신

마흔이 서른에게 



“너는 집에서 놀면서 애 하나 제대로 못 보니?”


16개월 된 둘째가 손톱깎이에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좀처럼 지혈이 안된다. 반창고를 붙여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직감하자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이를 안고 정신없이 응급실로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소독을 하고 찢어진 손가락을 꿰매기 시작한다. 

울며 자지러지는 아이를 꽉 안았다. 봉합 수술은 5분 만에 끝났다.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린다. 집안 어른들에게 말씀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일단 비밀에 붙이기로 한다. ‘도대체 너는 집에 있으면서 애를 어떻게 보길래’라는 말이 비수처럼 날라 올 게 뻔하다. 


집안이 왜 이래?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가 생각난다. 마흔 줄에 낳은 늦둥이라 임신부터 출산까지 체력과의 싸움이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에는 체력 소모가 두세 배 더 가중됐다. 모유수유를 해야 하니 아무리 길게 자야 3시간이 전부다. 잠이 좀 들만 하면 깨야 하니 수면의 질도 낮다. 비몽사몽으로 밤중 수유를 하다 아이를 떨어뜨릴 뻔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잠을 못자니 딱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 젖몸살로 몸을 덜덜 떨면서도 수유를 할 때면 ‘내가 사람인가 젖소인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백일도 안 된 아기 돌보랴, 초등학생 딸 뒤치다꺼리 하랴, 집안일 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날짜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하는데 체력은 이미 바닥을 친지 오래다. 

나만 유독 이렇게 힘든가 싶다. ‘나는 세 아이를 발로 키웠어’라고 말하는 동네 아줌마도 있던데 나는 고작 두 명을 키우는데도 이렇게 힘들다. 점점 육아에 자신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웬걸. 아이가 걸어 다니기 시작하니 이제는 체력뿐 아니라 정신력도 요구된다. 

의자, 테이블, 소파, 책장, 침대, 싱크대 등은 대근육이 한창 발달하는 아기에게 정복해야 할 도전 대상일 뿐이다. “안돼, 위험해!” “그만 내려와!” “그러다 다친다”란 소리가 메들리처럼 입에 착착 붙는다. 기어오르려는 아기와 내려놓으려는 엄마와의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치워도 돌아서면 어지럽혀 있으니 어느 순간 청소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다.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 매 순간 눈을 뗄 수가 없다. 온몸에 촉수를 바짝 세워놓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아이가 보이는 엄마만의 초능력이 생기는 것도 그 즈음이다. 소리만 듣고서도 아이가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간담이 서늘한 순간은 비일비재 하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아기는 엉금엉금 기어 어느 순간 내 다리 밑으로 와 있다. 그리고는 싱크대 문을 죄다 열고 살림살이 참견에 들어간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바닥에 식용유를 흥건히 쏟아 놓는다. 그러면 식사 준비는 뒷전이 되고 엉망진창이 된 주방을 닦느라 정신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시작한다. 아이는 먹는 것보다 흘리는 게 반이다. 애들이 식사를 마치면 그제야 나도 한 술 뜬다. 애들이 먹다 남은 밥을 겨우 구겨 넣는다. 배고픔을 잊은 지 오래다. 다크서클은 이미 배꼽까지 내려왔다. 빨리 설거지를 끝내놓고 쉬고 싶을 뿐이다.

딸아이의 숙제를 봐 줄 여유도 없다. 전쟁 같은 하루는 아이들이 취침에 들어가야 끝난다. 

겨우 아이를 재우고 맥이 탁 풀려 소파에 누워 있으면 그제서야 남편이 퇴근 한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집안이 왜 이래?”


분통 터지고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터져 나온다. 



집에서 애나 봐! vs 밖에서 일이나 해!

솔직히 고백한다. 남편이 말한 “집안이 왜 이래?”라는 말을 친정엄마에게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첫째 딸을 낳고 3개월 만에 복직했다. 육아는 고스란히 친정엄마의 몫이었다. 가끔 피곤하다는 이유로 주말까지 엄마에게 신세를 진적도 있다. 용돈을 넉넉히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싸가지 없는 딸이었다.

친정집과 10분 거리였기에 딸아이는 거의 친정에서 길러졌다. 퇴근 후 친정집으로 가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좁은 집에 아이 용품과 오래된 살림살이가 뒤섞여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아기도 기어 다니고 하는데 좀 정리 좀 하시지’하는 생각에 무심코 말을 던진다. 


“엄마, 집이 왜 이래?”


그때 나는 아이는 저절로 크는 줄 알았다. 아이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감도 없었다. 둘째를 낳고 독박육아를 하며 비로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체험 삶의 현장’에 버금가는 중노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집에서 애나 봐’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참 나쁜 말이다.


예전 강원도 내 모 대학 어떤 교수가 수업 중 '여자는 취업 생각 말고 애나 보라'고 말해 공분을 산 적이 있다. 그 교수는 한 여학생이 취업 얘기를 꺼내자 '취업은 무슨, 일하느라 아이 망치지 말고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집에서 애나 봐'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뉴스를 접하고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집구석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은 주로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의 역할을 낮추어 보는 의식을 깔고 있다. 무능력하고 처신이 한심한 사람을 조롱하는, 일종의 욕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옛날에는 집에서 아이를 보는 일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 애덤 스미스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판매 가능한 상품을 창조하는 것만이 생산적인 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집에서 애를 보는 일은 비생산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애를 돌보는 일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집구석에서 애나 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나 또한 한 때는 ‘집에서 애나 보는 일’이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닐 때 동료들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사표를 낼 때 이해를 못했다. 왜 집에서 애나 보는 아줌마로 ‘전락’하려고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가 ‘집에서 애나 보는 여자’라고 말하면 전투력이 불끈 솟아오른다. 애 보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아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차라리 ‘밖에서 일이나 해’가 더 맞는 표현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내 몸에서 아마 사리 열 개는 더 나올거야

집에서 애를 조금이라도 본 당신이라면 ‘밖에서 일 할래? 집에서 애 볼래?’라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망설임 없이 ‘밖에서 일하는 것’에 손을 들지도 모른다. 엄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이 보는 게 쉽지, 돈 버는 게 쉽냐고 말이다.

하지만 돈도 벌어보고 아이도 돌봐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말한다. 돈 버는 게 훨씬 쉽다!


언어라고는 울음밖에 없는 아기와 하루 종일 옹알이를 주고받으며 그 뜻을 온 몸으로 파악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 못하는 아기와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주장이다. 

인내심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때 ‘쌈닭’이라 불렸던 당신이라도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새 성인(成仁)의 경지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욱’ 해봐야 상대는 말 못하는 아기일 뿐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다. 아기가 자라 말대꾸 하는 아이가 되면 인내심의 극한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신은 “내 몸에서 아마 사리 열 개는 더 나올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집에서 애를 본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여성이 바깥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그러나 ‘집에서 애를 보는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당신도 분명 대단한 결정을 한 것이다. 사실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것이 적성에 딱 맞는 여자는 많지 않다. 자신의 꿈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과감히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구절벽의 시대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것만큼 생산성이 높은 일이 또 있을까.


아이는 절대로 저절로 크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수행해 주고 있기에 무탈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박육아를 묵묵히 견디며 오늘 하루도 좀비처럼 살아낸 당신은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줘야 한다. 비생산적인 일을 한다고 기죽지도, 의기소침해지지도 말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생산적이면서 고차원적인 일을 수행하는 특수요원이나 다름없으니까.


남편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오늘도 육아 전쟁을 치른 당신, 거친 전투사로 변모하더라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남편들이여, 아무리 힘들어도 아기의 미소 하나면 모든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연약하지만 강한 여자가 집에 있다. 지혜로운 남편이라면 오늘 퇴근 할 때 장미 한 송이를 준비하시라. 그리고 아내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해 보자. 


“오늘 애 보느라 힘들었지? 정말 수고 많았어. 청소랑 설거지랑 아이 재우는 건 내가 할 테니 당신은 얼른 안방으로 퇴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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