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작업실

그래서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

by 담담글방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김영하 작가 ‘여행의 이유’ 中


지난 4월의 일이다.


소형 SUV 한가득 짐을 챙겼다. 차 문이 닫히지 않아서 보조석 아래와 아이 카시트 옆까지 짐을 채워야 했다. 한 달 단기로 얻은 작업실과 집은 차로 삼사십 분 거리였지만 임대가 끝나는 날까지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무슨 비장한 각오는 아니라 ‘한 달 작업실’을 목표로 얻은 원룸인 만큼 최대한 투자 대비 효과를 얻어내고 싶었다.


결혼 후, 그리고 출산 후 한 번도 온전히 내 일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나름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19평가량의 원룸은 혼자 쓰기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전에 없이 큰 비용과 시간을 오롯이 내게 투자하는 것이었다.


저녁 6시에 짐을 대충 옮기고 이사(?) 온 첫날답게 짜장면을 시켜 먹은 후 아이와 남편이 집으로 간 게 저녁 7시경이다. 혼자 남은 후련함에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던졌다. 첫날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게으른 마음이 들었다. 온전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 얻은 공간은 아니지만 바로 노트북 앞에 앉는 대신 지금의 이 ‘혼자됨’을 즐기고 싶었다.


한동안 누워있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20층의 높이의 창가에 서자 맞은편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검게 흐르는 탄천이 보였다. 가슴이 탁 트였다.


작업실에서 보는 밤의 풍경



그 어떤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충만했다. 며칠 묵고 떠날 숙소도, 여행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장소도 아니라 좋았고, 이곳에서의 한 달을 꿈꾸는 일이 즐거웠다. 묵직한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말이나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남편이 전담해서 아홉 살 딸을 돌보기로 했고, 영업직인 남편이 아이를 케어하느라 일을 줄이면 고스란히 수익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달을 알차게 보내자고, 완전한 휴식은 아니지만 온전한 집중은 해보자고 밤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무척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다음날, 마치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6시 반에 일어났다. 알람을 꺼두었는데도 그랬다. 평소 아이는 스스로 매일 6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알람이 필요 없지만 혹시라도 늦잠을 잘까 싶어 맞춰놓곤 하던 알람 시간이 6시 반이었다. 3~4년 전부터 6시경 일어나는 아이의 기상 시간 탓에 몇 년간 늦잠을 잔 날은 손에 꼽았다.

아이가 6시에 일어나기 시작한 건 내가 출근을 위해 7시에 일어나면서부터다. 신기한 건 내가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는 7시가 아닌 6시에 일어나는 점이었다. 눈을 떴을 때 침대에 엄마가 없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늘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를 찾는다.


“엄마아.”


우는 소리가 나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 눕는다. 그렇게 누워있는 동안 보통 하는 일은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는 것이었다.


방송 구성작가로 일하면서 그때그때의 이슈를 찾아야 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했기 때문에 뉴스를 검색하는 행동은 ‘일’이라는 범위로 포장되어 스마트폰 중독자 수준의 인터넷 서핑을 정당함으로 포장했다.

작업실에서의 첫날 밤에도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은 조금 달랐다. 깨어난 시간은 비슷했지만 일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이른 기상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해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뭘 할까.


침대에 누우면 하늘만 보였다. 혼자 낯선 도시로 여행 갔을 때보다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 나는 그걸 정말 원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겠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결혼 전에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혼자 여행을 가곤 했다. 누군가 같이 가자고 해도 좋은 말로 거절했다. 내게 여행은 혼자 하는 휴식이었고 일상적인 관계로부터 벗어 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 뇌는 끊임없이 동행하는 상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상대의 여행 스타일, 식습관, 체력,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고르는 취향까지. 하지만 나는 여행까지 가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평범한 일상에서 충분히 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 전에는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후 어느 순간 여행에 대한 욕구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게 너무 좋았지만 그렇게 떠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있었다. 그냥 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가고 싶냐는 남편의 물음에는 늘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쉬고 싶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고 싶어.”


드디어 몇 년 만에 그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비록 작업실이라는 타이틀로 얻은 공간이지만 아침부터 글을 써야 하는 건 아니라서 그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에 심취했다.


누워있어도 깊은 잠이 들지 않아 다시 침대에서 빈둥거리다가 배가 조금 고파서 누룽지를 먼저 먹었다. 아침은 어제 싸 온 그릭요거트와 그래놀라, 크렌베리, 토스트와 커피였다. 이 정도 식단에 달걀프라이나 삶은 달걀을 먹으면 영향적으로 더 균형이 잡히겠지만 정말 간단한 음식인 달걀프라이 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나름 배부르게 아침을 먹은 후에도 일은 시작하지 않았다. 다시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했다. 누가 내게 원고를 쓰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슬슬 부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에 더해 게으를 자유 역시 내게는 너무 필요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은 작업실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식탁 겸용 책상에 앉은 게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문득 에세이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을 앞둔 장르 소설의 교정 원고도 와 있고 외전도 써서 보내야 했지만 정말 뜬금없이 떠오른 제목이 바로 ‘엄마의 작업실’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에세이를 쓰겠다는 선언을 하며 나 유명해져서 나중에 TV 프로그램 ‘유퀴즈’에서 섭외 요청 오면 어떡하냐고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켰다. 초고를 몇 장 쓰다가 곧 다른 원고 스케줄에 밀리긴 했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엄마의 작업실’이라는 제목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이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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