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6~0123
실업자가 된 챈들러는 아내와 함께 크루즈를 타고 태평양을 돌다가 불현듯 소설을 쓰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때 나이가 44세였다... 1939년 51세의 나이에 마침내 첫 장편 소설인 <빅 슬립>을 출간했다. 1945년 무렵에는 '챈들러리즘'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소설가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추출해야 하지요. 아무리 말을 아껴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스타일에 대한 투자는, 성과는 느리고, 에이전트의 비웃음과 출판사의 오해를 살 겁니다. 그러다 서서히 당신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겠죠. 글을 쓰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작가는 항상 성공할 거라는. 노력한다고 되지는 않아요.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개성을 반영한 것이고, 개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개성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시릴 코널리 씨가 그나마 남들보다는 무딘 칼을 던지며, 헤밍웨이는 육 개월 정도 휴가를 떠나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더군요. 이 말에 숨은 의미는 헤밍웨이가 그동안 사춘기적인 자세를 활용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얻었으니 이제는 지적으로 더욱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왜요? (중략) 헤밍웨이가 쓰는 작품들은 감정이 메마른 송장들은 쓸 수 없는 것들입니다. 코널리 씨가 쓰는 것들은 송장도 쓸 수 있고, 쓰고 있죠. 그런 것도 나름 장점이 있고, 어떤 건 아주 훌륭하기도 하죠. 다만, 그런 글을 쓰기 위해 굳이 살아 있을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근력운동을 줄였다. 어느 날 저녁에 플랭크로 4분을 버티다가 눈물이 나서, 내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튿날부터 하지 않았다. 3월과 4월 내내 플랭크를 하지 않았다. 백 스쿼트와 밀리터리 프레스, 데드 리프트는 횟수와 무게를 줄였고 푸시업은 생각날 때만 열 번씩 한다.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서. 그 대신 일주일에 나흘은 산보를 다니자고 마음먹었다. 산보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앉아서 읽고 쓸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내 삶에 있었고 나는 삶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조금씩 학습하면서 본의든 아니든 조금씩 변해왔다.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
(중략)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결코 심상할 수 없고 평범할 수 없으며 지나가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그 말을 읽은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중략)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성실함이 가장 큰 미덕인 시절도 있었다. 해가 뜰 때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성실히 일하면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21세기에는 '스마트한 성실함'이 필요하다. 단순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앞서 소개한 유튜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유튜브 채널 운영이 잘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함이 미덕이라는 이유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잘 안되고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뒤집어서 하나씩 바꿔봐야 한다.
하지만 제가 더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 처음에 운이 좀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밀고 나가라는 거예요.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인디언 기우제 지내듯 끝까지 도전하거든요.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공할 때까지 하기 때문에!' 이런 정신으로 하니까 성공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추사는 1840년에 55세의 나이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때 추사 곁에는 노비 두 명이 있었다. 다음은 유배 3년째인 1842년에 추사가 예산 집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이다.
- 갑쇠(노비)가 시절병(전염병)으로 앓아 지내더니 무사히 출장을 시켜 지금은 염려를 놓사오나 그 사이 그런 심려를 어찌 다 적겠사옵니까? 한의(노비)도 감병을 시키느라 즉시 못 보내고 이제야 보내오며, 이 동네에도 차차 조금씩 시절병이 진정되어가니 다행이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부 사이에도 서로손님을 대하듯 예의를 지키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것을 이상적인 부부관계로 보았다. 그것이 바로 유교, 성리학적인 부부관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는 어떤 작가인가'의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초기에는 직접 써보며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