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엄마와 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증조할머니는 멀미가 심해서 아무리 먼 거리도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또 나왔다. 증조할맴에서 나까지 이어지도록 걸음한 고향집이 다니는 절은 지금도 대중교통이나 자차로도 족히 40분은 걸리는 왕복 55km에 달하는 길인데 증조할머니는 매번 도시락 싸서 걸어 다닌 썰은 예전에도 한번 썼다. 불심이 깊은 분이었다. 심지어는 아예 타 지역인 양산 영축총림 통도사까지도 걸어서 갔다고 한다. 여기는 하루 만에 도장 깨기는 불가하니 가는 길에 대충 남의 집 창고나 남는 방 혹은 길에서 유숙하며 주먹밥 싸서 오갔다고 하는데 기세가 진짜 좋은 분이었는지 확신의 E였는지 체력 벌크업이었는지, 까짓 거 절집 탐방쯤이야 기세가 반이라고 부처님이 지켜준다 생각하여 떠나고 싶으면 며느리한테 살림 맡기고 걍 떠났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시주를 막 크게 하는 대시주도 아니었다. 그랬으면 고향 절 입구에 석등 하나 불탑 하나쯤은 족히 세웠을 것인데 절 오가는 여정만은 그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복잡했던 집안사에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증조할맴의 여러 시름을 달래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아프고 지난한 대소사를 걸으면서 잊고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털어버렸는가 싶다. 그 피인지 나도 걷는 게 별거 아니다. 여간 걸어도 힘든 줄도 모른다. 이젠 살이 쪄서 힘들 뿐이지.
증조할머니는 대처의 큰아들네 집에도 도보로 오갔다고 한다. 그때도 대중교통은 있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문물에 1800년대생의 구 여성은 아무래도 적응이 어려웠나 보다. 아들네서 고향 동네까지 또한 왕복 50km가 넘는 여정을 다니러 오는 길엔 대처의 아들네가 키우다 포기한 염소도 한 마리 함께 몰고 피곤하면 못둑에서 쉬면서 발도 씻고 염소꼴도 먹여가며 걸어왔다고 했다. 92세에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치매와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증조할머니는 정신이 돌아오면 그런저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자근자근히 잘도 우리 엄마 손자며느리에게 심심썰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도 증조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짜증을 거의 내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을 엄마에게 제일 쉽게 제일 많이 하는 것도 증조할머니였다. 예쁜 말을 많이 해준 사람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흔이 넘은 엄마는 여전히 본인의 시할머니를 곱게 기억한다. 증조할머니는 며느리인 할머니에겐 예쁜 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고금 막론하고 고부간의 미스터리니까. 고부간의 미스터리를 푸는 사람은 노벨 피스프라이즈 노벨평화상을 받아도 마땅하다.
10월 보름에 부모님은 멀리 흩어져 있던 선조들 모두 함께 새로 모신 뒷산 납골당에 매우 조촐한 떡과 과일 술 한 잔을 쳤다고 했다. 고향집 다니는 절이 있는 지역이 선조의 원래 터전이었는데 큰집이랑 상의해서 다 거둬들여 모셨다. 옛날 같으면 크게 묘사라도 지냈을 테지만 이젠 그럴 사람도 없고 그냥 보내지는 못하고 매년 큰 정종 한 병을 마련해 한 잔 한 잔 올린다고 한다. 조상음덕이 있는가? 하면 우리 집안의 진짜 장손은 명문대 출신에 이역만리타국에서 잘 살고 조상 덕 본 사람은 다 해외여행 다니는 세상이라 내가 알게 뭐겠냐만 시골에서 소박하게 남은 늙은 자손들의 따뜻한 온기와 맑은술 한잔이나마 정성이 나쁠 것이 무엇한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