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축제
초등학교 사회 시간, 대한민국의 대척점은 아르헨티나 주변이란 사실을 배웠을 때엔 그저 남아메리카가 정말 멀다는 생각 정도만 했던 것 같다. 그 외에 남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당했듯 서구 열강들의 지배를 많이 받았고, 땅따먹기를 한 나라에 따라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를 많이 쓴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엔 아는 것이 없어, 대척점에 있는 그 나라들은 그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가끔씩 남미 어디서 눈 찢는 행동을 하며 동양인들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행위를 한다는 자극적인 기사를 볼 때가 있다. 그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동양인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행위의 의미와 파장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안타깝게도 나 또한, '멕시칸들은 게으르다'는 미국 정치가들이 입힌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걔넨 그런가보다, 그래서 그렇게 못 사나보다, 하던 때도 있었다. 한동안은 누군가 나에게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물으면 화가 나고, 속상하고, 기가 죽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가 멕시코 사람인지, 페루 사람인지, 우루과이 사람인지, 나는 절대로 맞출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 계열의 사람을 보았을 때 그가 캄보디아 사람인지, 라오스 사람인지, 인도네시아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 백인들을 대할 때에도 이 사람이 덴마크 출신인지 노르웨이 출신인지 혹은 이탈리아 출신인지 나는 맞춰본 적이 없다. 아프리카 계통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무지는 이렇게나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건 본디 두렵기에, 그에 대한 두루뭉술한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아주 훌륭한 방어 기제가 된다. 모르는 것이 죄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도치 않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상대에게 실례를 끼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만약 의도를 가지고 선입견과 편견이란 흉기를 휘두른다면, 아내가 오늘 손질하고 잠깐 손가락 끝을 입에 대기만 했는데 한나절을 매워서 안절부절하던 할라뻬뇨 페퍼 다섯 개쯤을 그의 입과 항문에 박아줄 것이다. 아, 한국인의 영혼을 담아 김치 양념도 좀 발라줘야겠다.
내가 처음 접한 타코는 어릴 적, 미국 촌구석에서도 존재했던 타코벨의 타코였다. 하드쉘 타코와 부리또. 적당히 기름진 간 고기, 싸구려 노란 체다 치즈, 야채 조금, 간 콩 정도가 밀가루나 옥수수 반죽에 싸여 있었던 형태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미국인이 익숙한 햄버거라는 형태에 타코를 접목한 형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시대에 타코벨의 타코를 타코라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누가 주면 나는 아마 맛있게 먹을 것이다. 타코인가 아닌가, 그것은 고민해 볼 일이다.
이렇게 잘난 척 이야기 하지만 나도 아직 타코를 잘은 모른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기 전까지도 타코와 부리또의 차이를 잘 몰라서 주변 사람들이 한참 놀리곤 했다. 동부에 살 적 멕시칸을 지향한다는 프랜차이즈 가게 '치폴레'에 처음 갔을 때엔 너무나 커다란 쇼크였다. 너무 맛있고 배가 불러서 엄청나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이후로도 아주 많이 찾아갔다. 아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에도 먹여 보았고, 그 또한 맛있어 했을 때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 후 잠시 한국에 머물 무렵 타코를 먹고 싶어서 그 당시엔 정말 드물었던 타코 가게를 찾아 이태원의 '타코 아미고'로 향했더랬다. 이제는 그 주변에 수많은 멕시칸 음식점들이 있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지내면서 내가 느낀 타코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고, 분위기적으로 가볍고 (영양적으로는 가볍지 않다), 왠지 신나고, 비교적 저렴한 평범한 사람들의 소울 푸드로 식사가 되기도, 간식이 되기도, 그 어느 중간 분식이 되기도 하는 흥겨운 음식이다. 어쩌다 길에 와 있는 푸드 트럭에서 타코 하나 $1에 두, 세 조각 먹기도 하고, 그렇게 많이들 술 먹고선 타코를 먹기도 한다. 나름 유명한 타코 집에서 수요일 스페셜, 생선 튀김 타코 한 개 99센트 할 때면 친구와 점심에 만나 그간 밀린 얘기를 하면서 여섯개씩 먹기도 했다. 또, 어떤 커다란 이벤트 끝에 출장 타코 스탠드가 찾아오면 아내와 난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음식이 그렇듯 그 뒤에는 어둡거나 힘든 역사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나에게 있어 타코라는 것은 아주 신이 나는, 축제의 음식이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여느 음식처럼 타코도 언제부턴가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되었다. 맘에 드는대로 준비할 수 있는 고기, 맘껏 볶을 수 있는 양파, 취향에 맞는 살사, 과카몰리 등등 맛있는 것들을 더욱 더 우리 입맛에 맞춰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또띠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시판 또띠아가 비싼 건 아니지만, 보존료나 첨가물이 제법 많이 들어가 있어서 또띠아 본연의 맛이 죽고, 미묘한 시큼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게다가 할 것은 없고 시간은 많고, 집에 이미 옥수수 가루는 있고,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는 물론 아내가 했다.
옥수수 반죽이 구워지는 향이 달콤하고 노릇노릇했다.
축제라고 했던가, 타코는 사실 전쟁이다. 옆에서 지켜만 보아도 뭐가 이렇게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지. 자잘한 재료들과 사이드 음식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 아마 대가족이 많은 멕시코 문화에서는 이 방식이 용이했을 것이다. 한 번 대량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살사나 몰리 (Mole, 간 콩), 밥 등을 만들어 두면 제각기 퍼 가면 될 일이었을테다. 하지만 두 사람이 먹을 땐 양은 적어도 모든 종류의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굉장히 피곤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몇 달에 한 번씩은 꼭 나를 위해 타코를 만들어주는 그에게 정말 감사하다. 요즘은 그도 타코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본격적으로 그릴링을 시작한다. 어제 밤부터 마리네이드를 입힌 닭고기, 양고기, 그리고 새우. 양파 한가득, 그리고 할라뼤뇨. 정말, 어마어마하게 매운 할라뼤뇨. 아내가 너무 매워서 안절부절 하던 그 할라뻬뇨. 그러나 왜인지 홀린듯 자꾸 먹게 되는 녀석.
아내가 조리를 마무리 짓기 시작하면 나는 나대로 바쁘다.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커틀러리를 놓고, 사이드들을 배치하고, 메인 요리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깔개를 준비하고,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한다. 늘 거의 같은 구도와 느낌으로 찍는데도 말이다.
축제에는 전쟁같은 준비가 따른다. 이제는 축제다.
로메인 썰기
적양파 다지기
토마토 다지기
치즈 썰기
또띠아 만들어 굽기
할라뻬뇨 굽기
닭고기, 양고기, 새우 마리네이드 하기, 굽기
백양파 굽기
고수 다지기
양파와 파를 곁들인 밥 하기
라임 썰기
토마토, 페퍼, 옥수수 등등을 섞어 살사 만들기
여러 종류의 콩을 섞어 몰레 만들기
아보카도, 라임즙, 양파, 토마토를 섞어 과카몰리 만들기
사워크림 준비하기
끝이 없다. 진짜 할 일이 많다.
그 끝에는 언제나 너무나 흥이 넘치는 한 끼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한식의 반찬 문화가 대단한 이유 중 하나가 조합에 따라 얻어낼 수 있는 맛이 다 다름이듯, 타코를 먹을 때에도 무엇을 어떻게 올려 먹는지에 따라 계속 맛이 바뀐다. 그것이 너무 신선하고 기대가 되어 계속, 계속 먹을 수 있다.
아내가 구운 또띠아는 아주 맛있었다. 보존료의 이상한 맛 없이 옥수수의 달콤한만이 은은하게 찾아왔다. 바삭한듯 폭신한 식감도 너무나 좋았다. 집에서 만들어진 모든 다른 것들과 비로소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한편, 타코는 사실상 한식의 쌈 문화와 굉장히 비슷하다. 아마 이는 그 어떤 식문화에도 존재할 것이다. 타코 -- 또띠아에 고기, 살사, 토마토, 할라뻬뇨, 치즈, 과카몰리를 올리는 것, 쌈 -- 상추에 삼겹살, 쌈장, 마늘, 고추, 기름장, 깻잎, 부추 김치를 올리는 것, 월남쌈 -- 라이스 페이퍼에 양파, 적양상추, 파프리카, 새우, 타이바질, 땅콩소스, 칠리소스를 올리는 것, 이들에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비슷한 패러다임, 그러나 다른 재료와 맛의 프로파일. 그 평행선을 비교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쌀 수 있는 타코 한 입. 또띠아는 또띠아대로, 로메인은 로메인대로, 그 위에 올라간 모든 재료들 그 나름대로 너무나 맛있다. 이를 위해 거의 24시간을 준비하고, 많이 먹기 위해 하루를 쫄쫄 굶고, 그 끝에는 언제나 그렇듯 커다란 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자유가 제한된 요즘, 이러한 사소한 자유는 집 안에 갇혀 있어도 너무나 신나는 축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