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하고 평범한, 그래서 특별한
내 입으로 말하기엔 민망하고 재수 없지만, 나는 '특별'했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특별'했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 하는 쪽으로 말이다. 나는 이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웃음만 난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하여튼 늘 상위권이었던 나는 '재능이 넘치고', '성실하고', '인품이 좋고', '교우 관계가 원만하며', '책임감이 출중한', '큰 일을 할'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으로 지내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런 삶 속에서 지치고 외로웠던 나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어쩌다 고등학교 동기들과 처음 당구를 치러 갔을 때, 나는 모든 각도를 계산해서 완벽하게 게임을 끝내버릴 것이란 얘기를 듣는 게 아닌, 그냥 다른 애들처럼 서로 낄낄거리며 놀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역시 나는 다르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피곤했다. 같은 입시 체제에 있던 여자 친구는 내가 똑똑하게 태어난 것이 너무 짜증 난다고 했다. 그러고 헤어졌다. 나는 제법 특별했나 보다. 참나, 별 배부른 얘기다.
나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이상한 무한 차원의 함수의 미적분을 다룰 줄 알았지만, 혼자 세탁기도 돌릴 줄 몰랐고, 먹을 것 하나 만들 줄 몰랐다. 계속 성취를 얻어도 그 성취감은 아주 잠깐 뿐, 나는 비어 있었다. 물론 그 성취는 실질적으로 나를 지금의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한 순간의 특별함을 위해 아주 많은 평범함을 포기하는 것, 다른 흔한 비유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 성공을 위해 일상을 포기하는 것, 나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내가 진정 원하는 것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 성취를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일상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고, 일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취를 이룰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 뿐이다.
대학을 시작하기 바로 전 내 삶의 모든 운을 다 써 사귀기 시작한 여자 친구는 내가 내 일상을 일구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취 너머의 나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봐준 첫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름 유명한 대학에 재학한다는 사실보다도 그 옆 산 작은 계곡에서 발을 참방참방 거리며 그가 손수 싸온 도시락을 같이 먹으며 계곡 바닥에 예쁜 색깔의 돌멩이들로 우리의 이름을 새기던 일에 훨씬 즐거워하고 뿌듯해했다. 나는 그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는 여자 친구를 그만두고 이제 나의 아내가 되어 늘 맛있는 음식을 해 준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고양이들을 돌보고, 마트 할인 품목을 유심히 보면서 장을 보고, 풀과 나무, 꽃을 보면서 신나 하고, 클라이밍을 하고, 캠핑을 하고, 신나게 또 뭔가를 먹고, 수다를 떨고, 케이크를 굽고, 맥주를 마신다. 내가 그렇게나 갈구하던, 평범한 일상을 나는 살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특별한 일은 특별하다. 늘 존재하는, 평범한, 잊히기 십상인 일상을 벗어나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분명 그런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일들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들은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은 생각과 함께 생각보다 쉽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일상은 아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그러한 일상에 소중함을 부여하면, 그것은,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은, 특별함이라는 색깔로 물이 든다. 가끔 일어나는 커다란 이벤트, 여행, 일, 손꼽히는 비싼 식사 등등은 아주 인상 깊다. 반복되는 일상에 자극을 주는 멋진 경험이다.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소소한 일상이다. 그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마음이다.
우리가 외식을 하는 경우는 일 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식사는 집밥이다. 그리고 우리는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일주일의 몇 번씩은 큰 기대를 가지고, 그리고 아내의 솜씨 덕에 그 기대에 걸맞은, 혹은 예상치도 못하게 더욱 커다란 만족감을 가지고 식사를 한다. 짬뽕, 마라탕, 족발, 닭 한 마리, 샤브샤브, 감바스 알 아히요, 마늘 크림 파스타 등등, 끝도 없는 그 특별한 메뉴들의 향연 속에 일상적인 식사도 존재한다. 오늘은 '그냥 [...] 먹자!' 하고 그가 이야기한다. 그것이 우리에겐 '집밥' 같은 느낌이다. 비교적 편하게 먹고, 먹고 나서도 편안하고, 그러나 따뜻하고 포근하며 맛있는, 우리의 집밥. 그 중심에는 주로 압력 냄비에 쌀에 이런저런 것을 같이 올려 지은 밥, 그리고 곁들여지는 소소하지만 충만한 요리와 반찬들이 존재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급식 시절 콩나물 밥은 제법 특별했다. 뭐가 대단한가 싶은데 현미나 보리밥에 콩나물, 간장과 파 양념을 올려 먹으면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아내도 콩나물 밥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한 번 집에서 해 먹고 난 이후론 아주 일상적으로 먹고 있다. 그 일상은 늘 특별하다.
간 고기와 무까지 더해져 아주 깊고, 감칠맛이 넘치고, 시원한 맛의 콩나물 밥. 간장 식초 양념을 얹은 배추찜. 그 달달함, 고소함, 상큼함이 훌륭한 맛의 조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집에서 담근 무생채, 열무김치.
무, 콩나물밥, 배추전, 고등어 한 마리, 부추 오이소박이, 배추김치, 깻잎지.
무밥, 집에서 담근 청국장으로 끓인 찌개. 계란 후라이, 떡갈비.
무, 버섯, 콩나물 밥. 맥적.
양념장에 달래가 더해져서 더욱 풍부한 맛.
고등어, 그 등 푸른 생선의 지방 맛은 각별하다.
반찬, 그 무서운 것. '일품' 요리들이 보여주는 힘은 대단하지만, 이 반찬의 조합들 또한 무시무시하다. 오븐에서 구워낸 닭갈비, 감자볶음, 호박볶음, 열무김치, 배추김치, 무 버섯 나물, 가지나물. 이들의 조합마다 얻게 되는 맛과 만족감이 다 달라서, 계속 계속 밥을 마시게 되는 무섭고 행복한 것이 바로 반찬이자 한식의 힘이다.
압력 냄비에 쪄낸 밥은 압력 밥솥보다 훨씬 맛있다. 순수한 흰밥, 청경채와 볶은 고기, 지삼선, 중국에서 사 왔던 짜사이.
고기볶음에 딱 브로콜리 한 조각을 넣었다. 어쩌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기 시작하여 꽃을 피우기 시작한 예쁜 우리의 작은 브로콜리 한 송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맛있었던 브로콜리.
콩나물밥, 마늘을 듬뿍듬뿍 올려 조리한 가지 볶음. 나는 가지가 싫었다. 가지를 먹고 구역질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지를 좋아하게 되다니, 정말 세상 알 수 없다.
가지, 녹두 영양밥, 그리고 녹두 빈대떡.
콩나물, 무, 연근 밥. 닭가슴살 샐러드.
직접 손질한 양지로 만든 소 수육, 직접 만든 청국장으로 끓인 찌개, 무 버섯밥.
한국인의 반찬. 한국인의 김치. 배추, 열무.
압력 냄비에서 김을 빼내는 순간, 그 열기, 냄새, 소리는 너무나 멋지다.
직접 손질해서 간 소고기, 부추, 파, 무, 버섯.
구수한 소기름과 부추, 파의 향, 무의 시원함, 표고버섯의 향이 어우러져 어마어마한 영양밥이 되었다.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그것이 특별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가끔은 색다른 경험을 찾아 떠나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엔 집만 한 것이 없다. 나는 나의 소소한, 따뜻한 일상이 좋다. 이 일상을 포기하고 더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좇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이 일상이 너무나 특별하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