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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pr 07. 2020

순대 이야기

집에서 만든 순대라니

내 기억으로는 어렸을 적 읽었던 <맹꽁이 서당> 이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아주 먼 무의식 속, <맹꽁이 서당> 이었는지, <탐험대장 떡철이> 이었는지 기억이 간지럽지만 윤승운 화백의 어떤 작품에서였던 것 같다. 역시나 전혀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은 전혀 실재 하지 않았던 나의 허황일 수도 있고, 실재한다면 그 출처를 잘 모르겠는 기억 속 에피소드에서 순대에 대해 다루었는데, 이에 따르면 북한 어디 추운 곳에서 곰을 사냥하곤 곰의 창자에 곰의 고기를 넣어서 먹은 것이 순대의 이른 형태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저 학교 갔다 오다가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같이 먹던 순대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이 곰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확실한 것을 보면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하다. 이제 오래 된 기억들이 내 뉴런들간의 시냅스에서 조금씩 사라져 간다. 나이가 들어 간다. 기억들이 떠나간다.


어린이 대공원 역 옆, '서북면옥'이라는 냉면 집에 종종 찾아가곤 했다. 사 먹는 음식 중에선 놀라울 정도로 슴슴한 냉면과 만두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엔 메뉴에 있던 수육을 시켜보기로 했다. 나온 고기가 둥글둥글했는데, 뭔지도 모르고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그러다가 늘 일하시던 할머니께 이게 어떤 부위냐고 여쭈었더니 '우설'이라고 말씀하셨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나는 이게 소의 혀냐고 물었다. 할머니께선 굉장히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며 그게 아니면 뭐겠냐고 대답해주셨다. 왠지 갑자기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것을 나는 더 먹을 수 없었다. 한 접시에 만 얼마 하던 그 고기 수육을 남기고 나왔다. 참 원효대사 해골물이다. 


나는 정말 순대를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많이 먹었다. 외할아버지와 등산을 갔다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종종 막국수, 혹은 순대를 사 먹고 돌아 왔다. 그 시커만 색깔에, 투명한 당면이 이상한 막에 싸여 있는 음식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독특하고, '소세지'와 같은 형태와 개념인 것을 이제는 알지만 사실 그 당시 생각하는 소세지는 고작 해야 냉장/냉동칸에 존재했던 '주부 9단 줄줄이 비엔나'같은 이름의 빨간, 작은 짭짤하고 고소한 고깃덩이들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던 것이었기에 순대는 그냥 순대였다.


청소년 시절 어떤 날, 외할아버지가 언젠가 천안 지역에 가셨다가 그 유명한 병천 순대를 사다 주셨다. 평소의 분식집 당면 순대도 굉장히 좋아했지만, 병천 순대를 먹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맛있다, 그 생각 뿐이었다. 나는 우리 직계 가족 중엔 나름 독특한 입맛을 가지고 있었는데, 순대, 북엇국, 조금 더 나이를 들어선 곱창, 대창, 막창과 같은 특수부위에 환장을 했다. 커서 술 주정뱅이가 될 거라고 부모도, 친척도 많이들 얘기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젠장.


정말 어이가 없으나, 이런 순대가 '피'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법정 성인이 될 때까지 몰랐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를 알고 나니 왜인지 순대를 먹기가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순대가. 미국에 오고 나서는 정말 사 먹을 일이 없었고, 아마 이는 좋은 핑계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인 마트에서 사온 즉석 순대들은 여전히 맛있었고, 신나게 먹었다. 그럼에도 이게 피로 만든 것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순대를 만들기로 했다. 돼지 창자 케이싱을 사서. 돼지 선지를 사서. 그렇게 그가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과연 괜찮을까, 싶었다. 아무리 순대를 좋아한다고 해도, 직접 그 피의 모습과 냄새를 경험하면서.


아마존에서 구입한 돼지 창자 케이싱. 정말로 신기한 물질이다. 언뜻 보면 인조 재질 같으나, 물에 불려 보면 정말 어떤 동물의 창자라는 느낌이 든다.

채울 고기를 갈아낸다.

찹쌀과 당면을 쪄낸다.

손질의 끝이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양의 야채. 특히나 파, 부추, 그리고 마늘.

문제의 선지. 돈만 냈지, 나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처리하였다. 대단한 그.

많은 것들의 전처리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순대를 만들 준비를 한다. 기본 피순대, 백순대, 그리고 김치 순대, 무려 세 종류를.

본격적 선지를 으깨고 섞는다. '생각보다 괜찮아!' 아내가 말한다. 얼마 전까지도 처음엔 오징어를 손질하거나, 고등어 머리를 잘라내는 일은 내가 하게 했던 그가. 온 세상 생명을 아끼는 그가.

뭐 아직 특별히 장비가 없으니 있는 것으로 순대를 채워나간다.

세상에, 순대가 되어간다.

이게 뭔가 구경하는 우리 보리.

순대 한 줄이 완성되었다.

완벽한 세 종류의 순대. 피순대, 백순대, 김치순대.

삶아내고 잘 썰어내니 순대의 향이 확 밀려온다. '피'가 들어갔던 어쨌던, 너무나 맛있는 냄새가 난다.

아내가 곁들인 많은 사이드. 배추전, 야채전, 부추무침, 양파장아찌, 고추장아찌, 쌈채소로 깻잎. 찍어먹을 초장.

그 자태가 영롱하다.

세상에, 이 한 쌈은 할 말이 없었다. 선지? 피? 아무 생각도 없었다. 너무 맛있었다.

백순대는 초장과 정말 잘 어울린다. 신림동에 많은 백순대 말이다.

피순대는 가볍게 기본 양념, 소금과 고춧가루가 혼합된 그 가루가 절묘하다.

김치순대는 양파 장아찌와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내가 살면서 순대를 이토록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산더미처럼 남아서 저장할 준비를 한다.

똥... 같다고 그는 얘기하였다. 이토록 맛있는 똥이 있겠는가.

순대. 나에게 굉장히 특별하며,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그것.

아내가 그것을 만들었다. 그것은 또 새로운,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순대는 참 독특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만두와 비슷하다. 이는 그렇다면 타코와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는 연장선상에서 피자와, 칼조네와 비슷하다. 세상의 음식들은 돌고 돈다. 그 공통성과, 독특하게 두드러지는 문화의 차이가 그저 아름답다. 이 모든 것을 해 내는 아내가 나는 그저 멋지기만 하다. 그리고 맛있다. 아내가 모처럼 소주를 먹는다. 나도 몇 잔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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