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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pr 09. 2020

사워도우 이야기

시간이 구워내는 빵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음식들이 그렇듯, 어쩌다가 러스틱하고 단단한, 원시적인 빵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정작 자라면서 내 빵의 세계의 대부분이었던 파리 바게트에서는 '바게트'로 불리는 긴 빵이 그나마 가장 단단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사실 실제 바게트보다는 베트남식 반미 (Bánh mì)처럼 버터가 들어가 살짝 폭신폭신한 느낌의 빵이었다. 물론,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500원어치 생크림을 곁들이면 너무나 맛있었으나, 이제는 아주 대중화된 유럽 스타일의 딱딱하고 러스틱한 '아티산 (artisan)' 브레드와는 거리가 있었다.


정말 어떤 동기로 빵을 굽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마도 빵을 좋아하니까 구워보고 싶은데, 내가 익숙한 빵은 버터, 우유, 설탕 등등 별의별 재료가 들어가는 것이 복잡하고 비싸고 어려우니, 아주 간단하게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로만 이루어진 아주 원초적인 빵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말 그대로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 (Flour, Water, Salt, Yeast -- Ken Forkish)' 라는 책을 빌려 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베이킹 경험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나는 작은 원룸 스튜디오에서 살고 있었다. 스튜디오도 아니고, 베칠러 (Bachelor). 부엌도 없어서 아파트 측에서 아주 작은 2구짜리 전기스토브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오븐 따위는 없었다. 돈은 없었으나 꾸역꾸역 짜내서 작은 토스터 오븐과 무쇠 더치 오븐, 반죽할 플라스틱 통, 발효시킬 라탄 반네통을 구매했었다. 다른 도구야 그렇다 치고, 오븐은 고작 섭씨 200도 정도까지밖에 올라가지 않고, 토스터 오븐의 구조상 열을 가둘 수가 없었다. 빵을 구우려면 아주 단단한 적어도 250도가 필요했는데 말이다.


어쨌건 빵을 구워보기로 했다. 나에게 이러한 러스틱한 빵의 상징은 '시골 빵'으로 번역되는 깜빠뉴였는데, 이는 장발장이 훔쳤다고 알려진 커다랗고, 거칠고, 딱딱한 원형의 빵과 비슷한 개념이었던 것 같다. 영문화권 정보를 찾아보면 이것이 실제로 깜빠뉴였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으나, 거친 '시골 빵'이었다는 것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딱딱한 결과물의 질감에 비해 반죽 자체는 굉장히 질어서, 빵을 구워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굉장히 큰 쇼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버터가 들어가고 수분이 상대적으로 적어 다루기 쉬운 식빵이나 스콘 같은 반죽에 비하면 너무나, 너무나 진 반죽이었다. 정말 많이 어버버 하며 말아먹었고, 무엇보다 결국 오븐이 충분히 뜨거워지지 않아서 빵이 충분히 부풀지 않고, 속이 언제나 살짝 축축한 빵을 먹었다. 그런데도 그 빵이 그렇게 맛있었다.

나의 첫 빵
그 당시 여자 친구에 보내는 메시지. 이젠 아내다.

그 책의 레시피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르방, 천연 효모, 사워도우 스타터에 관심이 갔다. 그래서 더 비싼 호밀 가루를 샀다. 위생이라던지 잡균에 대한 개념도, 유리 컨테이너도 없던 나는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가져온 비닐봉지에 호밀 사워도우 스타터를 시작했었다. 한 사흘 되었을까, 그 속에서 시큼하면서 미묘하게 이상한 냄새가 났다. 사워도우 스타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던 나는 그게 사워도우 냄새인가 보다 했다. 그 다음날 다시 냄새를 맡아보니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 누가 맡아보아도 상한, 부패한 냄새가 났다. 아마 내가 살면서 맡아본 가장 역한 냄새였던 것 같다.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그 이후로 사워도우를 시도해 본 적이 없다. 그 무시무시한 기억도 기억이지만, 너무 바빠서 사워도우를 다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하루에 5~10분 정도의 투자로 85점 이상의 빵을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레시피를 이용해 빵을 구워내곤 했다.

10분 반죽

그럼에도 사워도우에 대한 동경은 늘 존재했는데, 집에 틀어박혀있는 이 시기는 그런 동경을 실현하는데 완벽했다. 지금 사워도우에 찾아보면 이 시국을 맞아 사워도우에 도전하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사워도우를 시작하는 데엔 일주일쯤 걸린다. 내가 시작한 스타터는 살짝 느리게 성장하기도 했고, 하루 밥을 너무 늦게 줘서 총 9일 정도 걸렸다. 아, 이젠 이 플라스틱 통도 제대로 갖추었고, 제대로 씻고, 소독했다. 이스트는 늘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러나 볼 수 없어서 실제로 있는지 잘 모르겠는 이 녀석들이 실제로 이 밀가루 반죽에 자리를 잡아 뽀글뽀끌 발효를 시작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홉 밤쯤 지나니 스타터가 준비가 되었다. 밥을 주고 몇 시간쯤 지나니 부피가 두 배, 거의 세 배 가까이 부풀었다. 냄새를 맡아보면 살짝 시큼하면서 달큼했다. 뚜껑을 닫아두었다 열면 기분 좋게 가벼운 알코올의 향도 났다. 그렇게나 염원하던 첫 사워도우를 굽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한동안 유지할 사워도우 스타터는 '방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르방의 방자를 땄다.

뽀글뽀글, 방방이가 아주 생기가 넘친다.

여전히 반죽은 어마어마하게 질다. 그러나 그 예전의 경험들 덕에 어떻게 이러한 반죽을 다루면 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제법 뿌듯했다.

정말 진 반죽, 조금만 잘못 만지거나 덧밀가루를 쓰지 않으면 찐득하게 달라붙어 형성과 발효 과정에서 멋지게 반죽 사이사이 자리 잡은 공기층들이 꺼져버린다. 

포실포실 잘 부풀어 올랐다.

타기 직전까지 깊게 구워진 사워도우.

마트에서 파는 이스트는 정말 편리하고 보장된 결과물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자연의 효모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더 본질적인 것이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전자책이 제법 보편화된 세상에서 종이책의 냄새를 맡는 것 같은 기분이다. 놀랍게도 천연 효모는 더욱더 자연스러운 부풀어 오름과 깊은 풍미를 가져다준다.

처음으로 구워낸 사워도우 빵으로 한 상을 차린다. 집에서 만든 딜 버터, 샐러드, 계란 프라이.

공기구멍이 영롱하다.

아내가 만든 딜 버터. 딜의 독특하고 산뜻한 향이 버터의 고소함과 잘 어우러진다.

예쁜 빛의 한 접시. 나는 아주 협소한 것 밖에 할 수 없다. 빵과 함께 먹을 요리를 준비하는 것은 여전히 아내의 몫이다.

로스트 벨 페퍼 페이스트, 딜 버터. 사워도우의 시큼함, 깊은 고소함과 잘 어울린다.


사워도우 빵, 정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반죽은 더럽게 질고, 변수는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80% 만족도를 90% 만족도로 이끌려면 선형적이 아닌 기하급수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베이킹을 시작했다. 우유가 필요해 아직 어둑어둑할 때 집을 나서니 온 세상이 조용했다. 어제 내린 비가 땅과 풀, 나무를 적신 냄새가 산뜻했다. 제법 서늘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차분했다.


너무나 건강하게 자라난 우리의 사워도우 스타터 ‘방방이’로 베이킹을 할 생각에 신이 나는 요즈음이다. 오늘은 사워도우 빵도 빵이지만, 사워도우 크로와상과 그 안에 초콜렛을 채운 팽 오 쇼콜라 (Pain au chocolat)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인 데다 두 종류의 빵을 구우려니 생각할 일도 많고, 무엇보다 아주 바빴다. 

일단 크로와상 밑반죽을 만들고 휴지 시키는 동안 사워도우 불 (boule)을 구워내었다. 그 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겨서 훨씬 더 맘에 드는, 아니, 나의 상에 가까운 사워도우 빵을 구웠다. 90%가 95%가 되었다.

내가 이런 빵을 굽기를 얼마나, 얼마나 바랐던가. 뿌듯했다.

그 사이 휴지 된 크로와상 반죽, 펼치기 시작한다. 라미네이트 도우를 쓰는 것은 처음, 두근두근했다.

식고 있는 나의 빵.

아내는 크로와상을 좋아한다. 특히 초콜렛이 들어간 팽 오 쇼콜라를. 이 시국 속, 아내는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 지지 않고 수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빵의 영역 일부 만큼은 아직 내가 담당하고 있기에 모처럼 사워도우 스타터가 생긴 만큼 그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정말 시간이 많고 늦잠 자기 딱 좋은 시기이지만 굳이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난 이유이다.

크로와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시간이 많이 필요한 빵이었다. 밤에 잠을 굉장히 설치다 간신히 잠에 든 아내가 느지막히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준비를 했음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과정상 많이 서둘렀는데, 여기서 발효 온도가 높아 버터와 밀가루 라미네이트 층이 무뎌진 것이 아쉬웠다. 최종 발효 시간도 조금 짧았다.

멋지게 구워진 사워도우 불을 궁금해하는 우리 보리.

반은 크로와상, 나머지 반은 팽 오 쇼콜라. 계란 물을 입히고 오븐에 들여보냈다. 


아내가 잠에서 깨었다. 굽는 시간은 오 분 정도 남았다.

처음 구운 것 치고는 나름 맘에 들게 구워졌다.

'마드모아젤, 크로와상, 팽 오 쇼콜라', 늘 나를 아껴주는 아내에게 건네는 작은 서프라이즈.

개선할 점이 아주 많았지만, 그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바삭한 껍질, 촉촉한 속살, 입안 가득 퍼지는 버터의, 그리고 초콜렛의 풍미, 갓 구운 빵이 가져다주는 특별함, 나도 만족했다.

그럼 이제 빵 2차.

내가 바라던 대로 구워진 사워도우. 아몬드 버터와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곁들였다.

잘 형성되고, 잘 부풀고, 잘 구워져서 내가 바라던 공기구멍들이 많이 생겼다. 빵의 질감이 아주 폭신폭신하고 얇았다. 오래 구운 시간만큼 껍질은 바삭하고 풍미가 깊어져, 달콤 쌉싸름한 카라멜의 향이 아주 인상 깊었다. 사워도우 특유의 새콤한 향이 더욱더 이 빵이란 경험을 신나게 하였다. 물론 입 천장은 다 까졌다.

러스틱하고 깊게 구워진 불. 버터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왠지 느껴지는 버터리한 질감과 맛, 바삭하기 그지없는, 캐러멜향 가득한 껍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크로와상. 고소한 버터와 향긋한 초콜렛, 그리고 폭신, 바삭한 질감. 


시간이 구워주는 사워도우, 그 긴 시간 동안 할 일이 너무 많아 순식간에 정오가 되었다. 오븐을 빵빵하게 계속 틀어놓았더니 온 집안이 따스하고, 빵, 버터, 초콜렛의 향으로 가득했다. 행복한 집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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