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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y 04. 2020

만두 이야기

영혼의 음식

아침부터 왠지 등과 목이 뻐근하더니 스트레칭을 해도, 요가를 해도, 라크로스 공으로 꾹꾹 눌러주어도, 아내가 안마를 해 주어도 뭉친 것이 풀리지 않았다. 잠시 장을 보러 나와 운전하는 길, 미러를 보려 고개를 돌리기에도 너무 아파져 어서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이런 일이 있을 때 매번 나를 구제해주는 몇 년 전 집 앞에서 주운 전기 마사지기를 가장 강하게 틀어 놓아도 잠깐 동안만 시원할 뿐 등과 목이 점점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누울 때도, 엎드릴 때도, 다시 일어날 때도 너무나 아파서 손발이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났다. 아픔에 대한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고통 없이 누울 방법이 없어, 한 번 이를 악물고 간신히 침대에 나 자신을 뉘이고 잠을 청했다.


일어나니 조금 나아졌다. 적어도 손발이 따뜻해졌고, 아까 침대에 누울 때에 비해 일어나는 것은 훨씬 덜 고통스러웠다. 마루로 나와 마사지기를 목에 두르고 여전히 멍하게 앉아있으려니 아내는 장 봐온 것들을 손질하고 정리하느라 몇 시간째 앉지도 못한 모양새였다. 뭐라도 돕고 싶은데 '뭐라도 도울까?'라고 물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더니 놀라면서 '아이고 벌써 일곱 시네! 등은 괜찮아? 밥도 아직 못했다, 배고프지.' 라고 말하며 부리나케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새 흰 밥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 누룽지 넣고 끓일게, 미안해.' 라고 말한다. 뭐가 미안한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배가 고픈 것 같지도 않았는데, 뭉근한 육수 냄새에 갑자기 허기가 진다. 별개로 가지와 고기가 볶아지는 달달한 냄새도 난다. 아내가 '아, 좋은 게 있다!' 라며 냉장고를 들여다보더니 '마라!' 하며 얼마 전 만들어 둔 마라장을 꺼내 같이 볶아낸다. 크, 퍼지는 중국스런 냄새에 침이 고인다. 아픔에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이 저녁상이 너무 맛있어 보이고 소중해서 뷰파인더도 보지 못하고 셔터를 눌렀다.

만두국과 마라 가지 고기 볶음.

아내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려내 모아뒀던 여러 육수들이 블렌딩 된 국물은 담백하면서 깊었다. 만두는 빚어진 뒤 냉동실에서 한동안 보관되었음에도 여전히 피가 얇고 쫄깃하며 재료의 조합과 간이 매끄럽게 어우러졌다. 한동안 계속 냄비밥을 하며 알뜰하게 모아둔 누룽지는 국물에 구수함을 한껏 퍼뜨려 아주 특별한 맛을 냈다. 마라 가지 고기 볶음은 입에 확 감기는 고기의 감칠맛, 가지의 달콤함, 그리고 마라의 화끈함으로 만두국의 편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갓 지은 흰쌀밥 위에 이것만 올려 먹어도 아주 맛있을 것 같았다.


따뜻하고 화끈한 한 입, 한 입이 계속되면서 몸이 많이 따뜻해지다 못해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게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등의 근육들이 조금씩 움직임을 받아들여 주었다. 마라향 때문에 재채기를 하면 여전히 어마어마한 고통이 찾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알아차리도 못하다가도, 고개를 가누게 해 주는 목과 등의 수많은 크고 작은 근육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이럴 때 새삼 뼈저리게 느낀다. 일상의 행복에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그러나 중요한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을 테다.


만두국은 언제나 나에게 치유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심 만두국을 먹고 나면 몸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그런데 어김없이 만두국을 먹고 난 나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뜨겁게 반신욕을 하고 아가 고양이들을 밤 동안 돌보기로 한 아내의 배려로 푹 잘 수 있었다. 아침, 눈을 떠 베개에서 머리를 들려고 해 보니 드디어 어금니를 꽉 물게 하던 고통이 따르지 않았다. 마루로 나와 아가 고양이들에게 분유를 먹였다. 꼬질꼬질하면서 보송보송한 냄새가 나는 녀석들이 따스하게 그릉그릉 거리며 젖병을 빠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바로 앞 규모가 꽤 되었던 두 문방구가 벽 하나 사이로 나란히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리를 잡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스럽지만, 요즘 세상 한 블록 안 GS25도 있고, CU도 있고, 세븐일레븐도 있는 것처럼 비슷한 물건들을 판매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확실한 공통점으로는 두 문방구 모두 만두 찜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치 만두, 고기만두 두 종류, 하나에 100원, 왠지 어떤 때는 한 문방구가, 다른 때에는 옆집이 더 맛있어서 두 곳을 돌아가며 사 먹곤 했다. 특히나 일요일 아침, 동네 형들과 아침 운동으로 축구나 야구를 하고 나면 만두를 두, 세 개 집어 먹고 같이 피씨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나는 아주 초보여서, 느지막이 터렛만 짓다가 저글링에 모든 것이 털리기 십상이었다. 하여튼, 찜기의 위생이 어떤지도 모르고 안에 뭐가 든지도 모르는 100원짜리 한 입 거리였던 만두는 너무나 뜨겁고 맛있었다.


만두에 대한 '역사'는 만화 삼국지에서 배웠다. 제갈량이 사람 머리 대신 밀가루에 고기를 채워서 신에게 바쳤다는 일화였는데, 내가 신이라면 두개골이나 눈알이나 뇌가 든 사람 머리 대신 당연히 밀가루 껍질에 고기를 채운 만두를 먹고 싶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되돌아보면 신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은, 굉장히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나대로 사람의 머리보다는 얇은 밀가루 피에 부추, 고기, 두부, 김치 등을 넣은 형태를 선호하는 것에 변함이 없다.


친척들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오래전, 친가에 모여 추석이나 설날 때 만두를 직접 빚었다, 엄마가. 친가 할머니는 시키고, 고모는 시누이 역할을 하고, 작은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나는 옆에서 돕고자 했으나, 할아버지는 내 고추가 떨어진다고 했었다. 그게 대수인가 싶어 내 고추만한 작은 만두들을 하나씩은 만들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손재주가 없어서 모양도 이상하고 만두 소에 비해 밀가루 피가 두꺼웠으나 나는 꼭 내 것을 찾아서 먹었다. 어찌 되었건 소가 맛있었기에 늘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정말, 너무나 너무나 많지만 정말로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만두다. 투박한 손만두건, 미원 맛 가득한 냉동 만두건, 물만두건, 찐만두건, 군만두건 그 밀가루 껍데기에 싸인 고기, 야채 덩어리는 사실 맛이 없기도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만두라는 개념은 굉장히 보편적이다. 뭔가 맛있는 것을 얇은 탄수화물 피에 싼다는 그 개념. 탄수화물 위에 이것저것 올려 먹는 피자의 개념만큼이나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만 해도 많은 만두가 존재하고, 중국에는 말할 것도 없이 딤섬이나 고기 찐빵 등등 수많은 종류가 있고, 일본에는 교자나 닭날개 만두가 있고, 이탈리아에는 라비올리가 있고, 몽골에는 양고기 향 가득, 투박한 보즈가 있고, 남미로 건너가면 타말리가 있다. 분명 더 있을 텐데 내 식견이 모자라다.


서북 면옥의 슴슴한 찐만두도, 짜장면 짬뽕을 고민하다 딸려온 서비스 군만두도, 이마트에서 산 냉동 부추 물만두도, 껍데기밖에 없던 김밥천국 만두도, 한 때 잘 나가던 차이나팩토리의 딤섬 같은 고급 만두도 좋아했다. 아내와 데이트를 하던 시절, 동대문운동장 역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역이 되도록 잘 살아남은, 건너편엔 '시발점'이라는 노래방이 보이던, 몽골 식당 '잘로스'의 투박하고 두꺼운 밀가루 옷 안에 양고기 냄새 짙게 밴 국물이 찰랑거리던 보즈는 추억의 만두다. 미국에 오고 나서도 냉동 만두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르겠다. 고급스러우려면 얼마던 고급스러울 수 있으면서도 편리하려면 얼마던 편리할 수 있으면서, 어떤 스펙트럼에 놓여있던 맛있음이 보장된 것이 바로 만두였다.


아직 아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만들기 이전, 한국 마트에 갔을 때 만두는 늘 사 와야 하는 품목 중 하나였다. 입맛이 예민하면서도 아무거나 잘 먹는 나는, 그때 그때 할인하는 만두를 신나게 먹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판매되는 만두의 과한 단 맛 혹은 짠 맛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한 팩에 $20씩 하는 '명인'의 만두를 사 먹기엔 돈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크리스마스 무렵, 연말 음식으로 아내가 만두를 만들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래라, 그럼 나는 막걸리를 빚을 것이다, 선언했다. 둘 다 안 해본 맛있는 것을 하고 싶은 구실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만두피가 별거냐며 반죽부터 시작했던 아내.

나에게 아주 큰 인상으로 남아 있는 아내의 손의 모습. 두근두근, 어버버 하며 땀 찬 손으로 잡았던 그 손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에게 수많은 내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주고, 고양이들을 키워내고, 초록을 길러내고, 같이 클라이밍을 하고, 많은 것들을 만들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 오늘도 많이 고맙다.

나도 몇 빚었다. 여전히 손재주는 젬병이나, 이 과정이 재미있었다. 

마침 잘 빚어진 막걸리, 그리고 막 쪄낸 김치만두. 주모!

이튿날, 해장을 위한 만두국, 전 그리고 막걸리. 특이점이 왔다.

만두국은 늘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음식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시원한 국물, 그 위에 동동 떠있는 만두. 그 외에는 심플한 재료들.


지방에서 서울까지 격주로 할머니 집을 찾았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하고 비합리적인 일인가 깨닫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다. 다만, 휴게소에서 늘 만두국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 딤섬은 문자 그대로 '점심'을 뜻한다고 한다. 작년, 처음으로 중국을 갔을 때 만두 그 개념만으로 얼마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지 느꼈다. 샤오롱바오, 혹은 소룡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수의 존재감, 혹은 생강, 마늘, 부추, 돼지고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만두. 주 메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반면 한국에서 만두는 조금 사이드 메뉴 같은 느낌이 든다. 순대나 떡볶이와 같이, 짜장면 짬뽕의 사이드로, 혹은 어쩌다 야식, 혹은 간식으로 먹게 되었지, 내 기억 속에서 만두를 먹기 위해 만두를 먹었던 기억은 아주 드물다.


특별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우리도 만두를 종종 사이드처럼 사용한다. 주로 샤브샤브와 같은 다양한 재료를 끓이며 먹는 국물 요리에 만두를 넣곤 하는데, 국물에 들어간 만두는 언제나 별미이다. 너무나 뜨거워서 입천장이 까짐에도 국물이 한껏 배인 감칠맛 덩어리를 베어 물 수밖에 없다.

샤브샤브에 들어가는 만두.

오리탕에 들어간 만두.

도시락으로 먹은 만두.


양고기를 사 와서 아내가 몽골의 보즈와 초이왕을 만들었던 날. 우리는 각각 다른 시점에 몽골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비슷한 경험만으로 큰 유대감이 생겼고, 우리는 동대문운동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의 몽골 음식점 '잘로스'를 자주 찾았다. 거친 재료의 맛에 왠지 정감이 깃든 잘로스. 부디 이 사태를 잘 이겨내기를 바란다.

바삭하게 구워낸 오코노미야키와 교자.


아내가 만두피를 빚고, 김치, 고기, 버섯으로 소를 채운다. 그것을 쪄내기도 하고, 굽기도 하고, 육수 안에 끓여내기도 한다. 만두는 아주 넓은 보편성을 품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내가 지금 먹는 만두에는 아내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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