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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pr 26. 2020

콩국수 이야기

여름이 왔다. 드디어.

한 해가 지나 다시 콩국수의 계절이 왔다. 작년 날이 더워질 즈음 무렵 한국 마트에서 갈린 콩가루를 사다 만들어 먹은 것으로 시작하여, 이것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콩을 갈아 콩국물을 낼 수 있게 된 이후 콩국수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콩국수에는 아주 상큼한 세종 (Saison)이나 사워 (Sour) 맥주들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새로운 발견을 하면서, '역시 여름엔 콩국수에 사워지!' 라는 우리 집만의 고상스럽게 얘기하면 마리아주, 요즘 말로는 꿀조합, 혹은 국룰이 생겼다.

춥고 어두운 2, 3월이 지나고 4월 중순까지도 일주일 내내 비가 오더니 이제서야 'LA의 여름 날씨가 이렇게 아름다웠지', 하는 기억을 되살려주는 날씨가 찾아왔다. 아주 오래간만에 구름 하나 없는 푸르디푸른 하늘, 뜨거운 햇빛에 바삭하게 데워진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반팔, 반바지 차림을 할 수 있음이 너무나 반가웠다. COVID-19로 여전히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긴장감과 그 이상으로 아주 명확한 갑갑함을 잠시나마 뒤에 두고, 이 뜨거운 날씨는 역설적이게도 시원한 자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아내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역시 콩국수에는 사워지!' 하고 외쳤다.


아내가 모처럼 콩을 불려 비타믹스에 갈아내었다. '위이잉' 하는 모터의 센 소리가 반가웠다. 나는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사워 맥주들을 사러 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맥주집 사장님에게 안부를 물으니, '여전히 불안하고 이상한 기분이지만 내가 건강하고 네가 건강해서 다행이다'라고 마스크 너머 답해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돌아오니 아내가 깜짝 서프라이즈를 공개했다. 왠 몽글몽글 흔들리는 갈색 젤, 도토리묵이 눈 앞에 있었다. 얼마 전 도토리 가루를 사더니 내가 일찍 자러 간 지난밤 그것을 쑤어 굳혀낸 것이었다. 콩국수에 도토리묵이라니.

갑갑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우리가 LA에 머물며 얻게 된 얼마 되지 않는 소중한 인연, 같이 캠핑도 하고 클라이밍도 하고 음식도 나눠먹게 된 가까운 지인도 한동안 이 쿼런틴에 지쳤을 테다. 그도 한동안 집에서만 버티다가 특별한 날씨를 맞아 우리와 함께 특별한 식사에 함께해 주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콩국물의 고소함, 그와 어우러지는 매끄러운 소면. 이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씨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여전히 많이 불안한 세상에 자그맣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오래간만에 먹은 새콤한 사워는 역시나 콩국물의 고소함과 잘 어울렸다. 입안 한가득 퍼지는 라즈베리의 향, 그리고 뒤로 느껴지는 쌉쌀한 자몽의 향.

살면서 먹어본 도토리 묵 중 가장 맛있었다. 세상에,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은 다 그렇기는 하지만 도토리의 고소함이 한껏 느껴졌다. 직접 도토리 가루를 갈아낼 수 있으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풍요롭게 먹고 나서 나는 설거지를 시작한다. 요리라는 과정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설거지 정도이다. 싱크대의 물소리를 뒤로 두 사람이 베란다에서 아내의 티라미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그들이 할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설거지가 끝난 후 나도 아내가 준비해 준 달콤한 티라미수를 맥주와 함께 먹는다. 창밖, 그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자몽 색 오후의 빛이 왠지 나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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