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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09. 2020

콩 이야기

콩국수, 두부, 청국장.

화끈한 맛의 마라탕이 땡길 때가 있는가 하면, 그와 전혀 다른, 거의 완전히 반대 방향의 맛의 스펙트럼에 놓인 음식에 끌릴 때도 있다. 고소하고, 구수하며, 부드러운 맛. 2019년간 또 무엇을 열심히 먹었는가 생각을 해 보니 바로 콩을 이용한 음식들이다. 


참 신기하다. 어릴 때는, 사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콩을 좋아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 완두콩을 먹고선 심하게 토를 한 적이 있고, 급식에 나온 강낭콩은 꾸역꾸역 씹어 삼켜야 했으며, 서리태는 작았기에 알약처럼 삼켜버렸다. 콩으로 만든 많은 것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된장찌개는 나쁘지 않았지만 굳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두부는 그저 그런 그냥 밍밍한 맛을 가진, 미묘한 식감의 재료였다. 마찬가지로, 콩국수는 이상한 질감의, 밍밍한 맛을 가진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요리였다. 비지찌개는 아주 어릴 때 강원도 어디인가 아주 유명하다는 요릿집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는 기억밖에 나지를 않는다. 청국장은 더욱이 할 말도 없다. 그랬던 내가, 나의 아내가 콩으로 만든 다양한 음식에 환장을 하게 되었다.


1. 콩국수

콩국수라, 이곳 LA에서는 한 그릇 + 세금 + 팁 하면 최소 $10, 즉 12,000원쯤 된다. 나는 콩국수에 대해 큰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아 굳이 사먹을 일이 없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콩국수를 아주 좋아하는 나의 아내는 이 사실에 분개하였다. 이윽고 그는 직접 콩국수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그는 잘 들지도 않는 싸구려 믹서에 열심히도 콩을 갈았다.

그 다음날 햇살 좋은 휴일, 고상스러운 브런치로 콩국수를 먹기로 했다. 너무 멋지고 따스한 햇살과 바람을 만끽하며, 발코니에 나가 앉아, 김치, 오이, 그리고 맥주 한 캔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대망의 콩국수.

이게 왠걸, 이토록 맛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고소하고, 부드럽고, 시원하고, 국수와 국물이 끝도 없이 후루룩 넘어갔다. 거기에 잘 익은, 아내가 담근 김치. 이 참을 수 없는 맛있음에 정신없이, 아내보다 훨씬 일찍 한 그릇을 끝내 버렸다. 늘 그렇듯 아내는 자신의 그릇에서 한, 두 젓가락을 나에게 아낌없이 더 내어주었다. 나는 오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내가 건내준 콩국수에 배여있는 오이 향이 향긋했다.


나는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경험이었으나, 아내는 조금 생각이 많았다. 갈아낸 콩국물이 아직 충분히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있지 않아 마침 아주 좋은 할인 행사가 있어 그 유명한 Vitamix 믹서를 사다주기로 하였다.

그 이후로 콩국수의 질은 한껏 더 상승되었다. 여기가 아니라 그 어디를 가도, 콩국수를 사 먹을 일이 없을 것 같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정말 곱게, 부드럽게 갈린 콩국물. 우리의 여름을 아주 시원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아내의 친구들과 함께 이 전날 저녁을 먹고 남은 불족발을 포장해와서 콩국수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얼얼할 정도로 새콤한 키위 사워 맥주를 페어링 하기로 하였다. 부드러운 콩국수에 상큼한 맥주가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이 때 부터 우리에겐 '콩국수엔 사워지!'라는 공식이 생겼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추천할 만한 마리아주이다.


족발은 한국에서도 싸지 않지만, 여기서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 이후로 아내는 결국 족발까지 직접 요리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 그 진득한 질감, 고소한 맛. 깨가 올라가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그 시원한 국물과 함께 넘어가는 소면.

역시 콩국수엔 사워지! 아주 멋진 사워 맥주였다.


2. 두부

아내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콩을 한 번 갈기 시작하더니, 두부를 만들어 보겠다고 선언했다. Vitamix로 콩을 잘 갈고 염촛물을 간수 대신 응고제로 사용하여 잘 굳히더니 아내는 보란듯이 두부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두부를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두부, 간장양념장.

너무나 부드럽고 고소해서, 내가 여태 알고 있었던 두부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주었다.

모양도 멋진 물결 두부.

그 이후로 종종 두부를 해 먹는다.

어떤 흐린 날, 김치전, 부추전, 제육볶음, 콩나물무침, 그리고 두부. 양파 장아찌는 덤.

더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아내가 만든 두부는 직접 만든 소에 들어가 직접 반죽한 만두피와 함께 손만두가 된다. 이 또한 별개의 이야기.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만두도 더 이상 사 먹을 수가 없다.


3. 청국장

아내는 멈출 줄 몰랐다. 어느 날 청국장이 먹고 싶다고 선언하더니, 콩을 발효시키기 시작하였다. 나는 청국장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었고, 꾸리꾸리한 냄새가 난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음식은 나를 늘 그렇듯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콩으로부터 멋지게 발효된 청국장.

꼬릿한 냄새는 없고, 너무나 침이 나올 정도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밥과 비벼먹는 청국장은 너무나 고소하고 깊은 맛을 자랑했다. 아주 적당한 정도의 꼬릿함은 그 맛을 더 짜릿하게 했다.  

이를 다른 음식과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고문이었다. 커다란 양지를 사다 직접 썰어 만든 소수육. 

마찬가지로 청국장과 함께 직접 양지 덩어리에서 썰어낸 차돌박이 로스구이.

멸치 청국장과 고등어 구이.

청국장과 함께하는 바싹 닭갈비, 바싹 돼지불고기. 배가 고파서 더 할 말이 없다.


4. 번외: 비지마라탕, 콩탕.

이렇게 콩국수, 두부, 청국장을 하기 전에 수도 없이 비지찌개를 해 먹었다. 추운 날 그렇게 세상 행복하게 해 주는 음식이 없다. 어쩐 일인지 비지찌개의 사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저 아쉽다. 

유일하게 건진 것은, 어느 저녁 어쩌다 비지가 남고 마라탕이 남아서 섞어 끓인 비지 마라탕. 마라탕의 얼큰함과 짜릿함, 그리고 비지의 고소하고 깊은 맛의 절묘한 조화.

비지찌개와는 다르게 맑게 끓여낸 콩탕. 콩국수가 차갑고 담백하다면, 이는 따스하고 고소한 맛을 한껏 끌어올렸다.

콩, 이제는 생각만 해도 그 편안함, 고소함, 부드러움에 신이 난다. 


아직은 한겨울이지만, 여름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콩국수를 먹을 때를 위해, 아주 맛있는 사워 맥주를 아껴두기까지 하였다. 어느덧 새해가 지났고, 봄,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또 여유롭게 발코니에 앉아 우리는 콩국수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못할 것이다. 그 뒤에 또 가을이 찾아오면 신나게 두부, 청국장, 비지찌개, 콩탕을 먹게 될 것이다. 콩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낌없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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