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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y 07. 2020

바위 위에 앉아 바라보다

5m 위의 풍경,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

나는 사진 찍히는 일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어이고, 공부 잘하게 생겼네' 라던지, '공부 못했으면 어쩔뻔 했어' 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기 때문일까. '와, 쟤 다리 봐 진짜 무다리네. 와, 털 봐, 근데 반바지 입었네' 라던지 '쟤 머리 아프리카 사람 같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너는 못해. 안될거야. 과학은 넌 못해, XX대는 넌 안 돼', 라던지 '왜 혼자 밥먹어? 너 그 반사회적인 성격 고쳐야해. 그거 정신병이야', 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언젠가 '전교 5등'을 했을 때 '그것보단 잘 할 수 있지 않나?'라는 말을 듣다가 전교 1등을 했을 때는 '1등이 2등되고, 2등이 4등되고, 4등이 16등되고 [...] 그렇게 망하게 되는기다' 라고 할아버지께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등수의 법칙은 매번 2배가 되는 것인가 혹은 제곱이 되는 것인가' 고민을 했기 때문일까. 하여튼 나는 내가 싫었고 나의 모습이 남는 것이 싫었다. 그 반향으로, 나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 것이 싫었다. 아직도 인물 사진은 어떻게 찍는지 도통 모르겠다. 사진을 찍히기 싫어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그 어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학회에 가서 사진을 찍혀야 할 때는 키 큰 이들 뒤, 제일 뒷열 오른쪽 끝에 숨는다.


Black Mountain, CA

해발 3000m, 11월, 손끝이 시리다. 정말로, 정말로 춥다. 손발이 덜덜 떨린다. 그러나 차가운 바위가 손가락에 감기는 기분이 좋다. 넷째 손가락 둘째 마디가 돌에 쓸려 갈라졌다. 복근과 등근육이 늘어졌다. 바위 위에 올랐다. 고작 시작점에서 5m 위. 내가 떨어질 것을 대비해 밑에서 스폿 (Spot) 봐주던 이들의 고마운 환호가 잠시 약하게 들리더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차가운 공기에 금방 귀가 시리다. 바람의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난다. 서쪽으로 물들어가는 석양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다. 내가 이 루트 (Route)를 올라 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 바위 위에 있다. 고작 5m의 높이에도 사람도, 소리도 작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노을이 저 산너머 빛난다.

Tour de France, Black Mountain, CA

성공적으로 바위를 오른 후에 마시는 맥주는 너무나 특별하다.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 (Bouldering)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나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것을 한다, 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싶어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바위를 오른 순간을, 그 주변의 풍경을, 나와 함께한, 내 목숨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그 경험을 담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봤자 거의 모두 뒷모습이다. 그것이 내가 내 모습을 보는 데 있어 적당한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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