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 예쁜 색깔들로 알록달록
나의 부모는 당신들에게 내 삶에 대한 '계획이 다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계획에 여전히 감사하고 있고 실제로 많이 따랐지만, 나에게 찾아온 여럿 우연들이 그 계획에, 내 삶의 방향성에 큰 뒤틀림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 새로운 계획을 그들은 썩 좋아하지 않지만,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이 수정안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우연이라고 하면, 고등학교 때 스펙을 열심히 쌓으려고 팀 과학 실험 토론 대회에 같이 나갔던, 나 만큼이나 아싸였던 녀석과 친해져 같이 별을 보러 가게 된 것일 것이다. 그는 그만의 우연으로 알게 된 다른 별 보는 친구 또한 초대하였는데, 이 친구의 친구는 빨리 감은 시간을 통해 나의 아내가 되었다. 길고 긴 얘기다. 그 친구가 나의 글을 혹시나 본다면, 오늘도 너무나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
클라이밍의 시작 또한 우연이었다. 방학을 맞아 잠깐 한국에 들어간 어느 봄, 아내가 얼마 전 시작한 클라이밍을 같이 해 보러 가자고 했다. 나에게 운동이라곤 반년 정도 전쯤 시작한 웨이트 트레이닝이 전부였다. 지금 운동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 시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헬스장에 갔다가 아무 중량도 올리지 않은 빈 쇠 봉 조차도 벤치프레스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곤 PT를 통해 운동을 배우게 된 다음이었다. 여전히 턱걸이 한, 두 개 할까 말까 한 때였다. 이제는 클라이밍이 미디어에도 많이 나오고, 스타 선수들도 여럿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아주 마이너한 스포츠였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에게 간접적으로 얘기만 들었지 뭘 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뭐가 그리 힘든지, 왜 재미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일일 권을 끊고 암벽화를 대여한 후, 아내의 지도에 따라 암장에 들어섰다. 새하얀 벽에 다양한 모양과 예쁜 색깔의 '돌'들이 한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돌이 아니라 클라이밍 '홀드'라고 하였다. 마치 점묘화를 보는 듯 채도가 높은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등의 홀드들이 흩뿌려져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두근두근했다.
아내가 가장 쉬운 난이도 등급의 볼더링 문제에 나를 붙여보았다. 같은 색깔의 홀드를 잡고 '탑'이라고 쓰인 곳까지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정말 쉬운 것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 같았다. 아주 예쁜 색깔의 사다리. 그렇게 조금씩 어려운 문제들에 붙어 보려니, 내 몸이 이렇게 무겁고 부자유스러운 존재던가 하는 신선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냥 내 머리 조금 위에 있는 홀드를 향해 일어서서 손을 뻗으면 될 것 같은데, 떨어지는 것은 무섭고, 생각보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그러다가 힘이 빠져서 어버버 하면서 푹신한 매트 위로 떨어지곤 했다. 그러고 나면 앞팔이 얼마나 뻐근하고 딱딱하게 부어오르는지, 전완이라는 근육을 써 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볼더링 문제는 고작 해봐야 4-5m, 6-7번 정도의 무브(동작)로 올라 완등 할 수 있었다. 반면 별개의 '지구력 벽'에서는 각 난이도당 40-50개 정도의 무브로 윗쪽 방향 보다는 옆쪽으로 움직여야 했다. 높지는 않지만 아주 폭발적인 힘을 통해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에 반해 지구력을 가지고 몇십 미터의 벽을 오르는 로프 클라이밍을 층고가 낮은 공간에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가장 쉬운 난이도의 지구력 루트에 붙어 보았는데, 한 열 무브쯤 움직이고 나니 전완이 너무나 아팠다. 떨어지고 나서도 단단하게 수축된 전완에 손가락이 펴지지를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 그 고통이 기분 좋았다. 까끌까끌한 홀드의 표면에 잔뜩 벗겨져, 덴 듯 뜨겁고 따가운 피부의 감촉도 좋았다.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클라이밍 신발을 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클라이밍을 열심히 하게 될 줄은 아내도, 나도 몰랐다. 그 때의 나에게 과하게 푹 빠지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 내가 아무리 클라이밍에 대해 회의감과 공허감을 느끼고 있어도, 아마 나는 다시 그 알록달록한 돌들에 매료되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