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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un 25. 2020

계속해서 떨어지고, 다시 오른다.

그렇게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일찍 눈이 떠져 아이패드 홈 버튼을 꾹 눌러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다시 이불속에 몸을 파묻었으나 계속 뒤척이게만 될 뿐, 잠 기운은 이미 새벽빛에 날아간 것 같았다. 아내마저도 깨게 할까 조용히 방에서 나오니 이게 무슨, 장을 보고 와서 쓰레기봉투로 쓰기 위해 잘 접어둔 비닐봉지들이 온 마룻바닥에 잔뜩 별자리같이 수놓아져 있었다. 원래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서랍은 빼꼼 열려있고, 자다 깬 보리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당당했다. '참 나, ' 탄식, 혹은 감탄하며 웃었다. 비닐봉지 뭉치는 보리가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이다.

 많이 자지 못하였으나 정말 오랜만에 정신이 맑았다. 불안과 걱정, 무기력에 자도 자도 피곤하고, 계속 느껴지는 내 빠른 심장소리에 혹시나 공황 에피소드가 찾아올까 두려워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이 나를 저 깊은 어디론가로 몰아넣던 요즘이었다. 보리 옆에 잠시 누워있다가 커피를 올렸다. 나가기로 했다. 며칠 전 내 짜증에 꺾여 가지 못했던 스토니 포인트에 가서 딱 두 시간 클라이밍을 하기로 했다. 나의 이성은 어제도, 그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바위를 잡으라고, 몸을 움직이라고, 클라이밍을 하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게으름, 불안, 무기력에 잠긴 내 무의식은 나를 자꾸 끌어내려, 그 감정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리며 숨이 막혀가게 했다. 오늘도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빨리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암벽화와 초크, 크래시패드는 모두 차에 있으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어서 차에 탔다. 이른 아침의 고속도로는 뻥뻥 뚫려 있었다. 첫 노래로 Maggie Rogers의 <Light On>이 흘러나왔다. 볼륨을 한껏 키우고 신나게 달렸다. 

...
Can you feel me now
That I'm vulnerable in oh-so many ways?
Oh, and I'll never change

Oh, I couldn't stop it
Tried to figure it out
But everything kept moving
And the noise got too loud
With everyone around me saying
"You should be so happy now"

Oh, if you keep reaching out
Then I'll keep coming back
...


 

 클라이밍의 역사에 있어 스토니 포인트는 꽤 중요한 곳이다. 작년에 상영하여 클라이밍 업계에 한동안 영향을 미칠 다큐멘터리 영화 <Free Solo>나 <Dawn Wall>에 나온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클라이밍 루트들을 개척할 시절, 많은 이들이 이 곳에서 연습했다고 한다.

스토니 포인트, 바위를 오르는 아내

 스토니 포인트는 '요즘' 스타일의 크랙(Crag: 클라이밍 스폿)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랙이 많다. 이런 곳에는 돌들의 질감이나 방향, 바위 위까지 올라가는 루트, 어려울 수는 있어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동작들, 떨어질 수 있는 랜딩(Landing)의 안전성, 그리고 한 구역 안 바위들의 근접성, 루트의 다양성 등이 아주 훌륭해서, 마치 자연이 인간이 클라이밍을 하기를 바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스토니 포인트는 조금 다르다. 바위들이 많이 모여 있기는 하지만, 아주 무른 사암(Sandstone)이라 자주 부서지고 -- 이는 바위를 오르는 중에도 종종 발생한다 -- 동작(Move)이 클라이머의 신장에 따라 너무 쉽거나 불가능하기도 하며, 요즘 생각되는 클라이밍 무브에 비해 신체에 무리가 많이 가거나 억지스럽거나, 너무 바위가 높거나, 랜딩 장소에 커다란 바위가 있거나 등등,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 와중에 스토니 포인트의 루트/문제들을 개척하던 시절엔 안전 장비도 훨씬 열악했다. 암벽화가 열악한 것은 물론이고, 떨어졌을 때 밑에서 받쳐주는 폼으로 된 매트리스, 즉 크래시 패드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요즘에 비하면 아주 얇고 작아서, 지금보다도 훨씬 위험한 상태로 클라이밍을 할 때였다. 그렇기에 초창기 클라이머들은 많이 죽었다. 공원 곳곳에 그 선구자들을 기리는 비가 놓여 있다. 클라이밍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르는, 근본적으로 위험한 스포츠인 것이다. 그런 것을 왜 하는가 나에게 물어보아도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 쓸 데도 없다.

  스토니 포인트는 나에게도 그러하였듯 이 지역의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아웃도어 클라이밍을 하게 되는 곳이다. LA 도심에서 (교통 체증이 없을 때엔) 30분 정도면 찾을 수 있고, 어찌 되었건 수백 개가 넘는 루트/문제들이 존재하고, 역사적 의미까지 있으니, 루트/문제들의 질이 조금 미묘하더라도 이 주변에서 클라이밍을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찾게 되는, 그런 곳이다. 

 내가 어릴 적, 동네 상가 지하에 돈까스 집들이 알게 모르게 유명했다. 빈대떡 보다도 얇은 두께, 그중에도 튀김옷이 4/5를 차지했으나, 그래도 얼굴만 한 면적의 돈까스 두 장, 주인아줌마와 친해지면 세 장을 5000원이면 먹을 수 있었다. 마카로니와 양배추 샐러드, 깍두기 몇 개, 밥, 게다가 친구와 같이 오면 미원 맛 가득한 부대찌개 또한 포함이었다. 그것이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 <연돈>의 돈까스라던지 그런 것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내가 살던 동네의 중, 고등학생들에게 축복과 같은, '우리 동네에는 이런 거 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존재였다. 스토니 포인트가 이 지역 클라이머들에겐 바로 그런 존재였다. 

 한편으로 도심에서 가까우면서 애매하게 먼 공원이다 보니 골 때리는 부분도 많다. 갓길에 차를 세워두면 유리창을 깨고 이것저것 훔쳐가는 경우도 가끔 있고, 저녁 늦게 클라이밍을 하고 있으려면 어린 남녀들 여럿 모여 딴엔 구석에 들어가서 신나게 몸을 섞기도 한다. 때론 주사기도 발견되고, 예전엔 마약이 거래되곤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모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내가 오르려는 바위가 그라피티로 뒤덮이면 정말 화가 난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의 창작욕을 이해는 해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오르려는, 다른 클라이머들이 오르려는 바위에 덕지덕지 스프레이를 뿌려놓은 모습을 보면 나는 욕을 내뱉지 않기 위해 아주 노력해야 한다. 내가 오랫동안 도전했던 문제에도 처음에 너무 심한 그라피티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제를 몇 년에 거쳐 시도하며 겸사겸사 그 그라피티를 솔로 문질렀고, 비라는 위대한 자연의 힘에 씻겨 COVID 사태가 시작되기 바로 전, 비로소 몇 년 만에 깨끗해진 바위를 나는 드디어 올랐다.

클라이밍의 성지, Bishop, CA

 클라이밍은 사실 오르는 것보다는 떨어지는 것이 메인인 스포츠이다. 요즈음이야 안전 장비가 많이 갖춰졌지만, 여전히 높은 것에서 떨어진다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위험함,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의 움직임, 나의 몸, 나의 높이, 내가 떨어질 곳에 대해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떨어지면 나는 다칠 수 있고, 혹은 죽을 수도 있다.

 오늘도 오랜만에 나선 클라이밍, 손발 끝, 몸의 근육이 낯설었다. 내 머리나 척추가 깨지지 않게 뒤를 봐줄 스포터 (Spotter)도 없어서 아무래도 더 긴장하게 되었다. 모처럼 일찍 안개를 헤치고 나온 태양은 쥰 글룸 (June Gloom)을 따스하게, 사실은 조금 덥게, 반갑게 날려 보내어 주었다. 그 덕인지 나의 몸도 모처럼 가벼워서 바위를 끌어안는 기분이 좋았다. 돌은 단단하고, 까끌까끌하고, 나는 그것을 잡고 올라 지면을 떠났다. 그래 봤자 몇 미터 위였지만, 내 몸의 모든 감각에, 나의 안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걱정과 불안이 아침 안개와 함께 증발해 있었다.

 나에게 클라이밍은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나쁘게 말하면 도피, 좋게 말하자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수단이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하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지배할 때면 실내라면 클라이밍 홀드(Hold), 실외라면 바위를 잡고 올랐다. 그때만큼은 내가 떨어지지 않고 그다음의 동작을 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했다. 특히나 아웃도어 클라이밍은 실내에 비해 훨씬 위험하기에 내가 당장 하고 있는 무브에 대한 더 큰 집중과 완벽을 요했다. 그리고 세상에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느껴지는 풀과 나무의 냄새,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 고요함, 그 평화에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얻곤 했다. 어쩌다 모든 무브가 잘 이루어져 고작 5m 바위의 위에 올랐을 때엔 그 성취감에 너무 뿌듯했다. 굳이 무겁게 짊어진 보냉백 속 맥주 한 캔을 톡 까서 자축하는 것이 너무나, 너무나 신이 났다.

 걱정을 유발하는 실질적인 원인에 비해 걱정하는 마음은 종종 과하게 불어나곤 하다. 이를 다루기 위해 걱정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만드느니, 명상을 하느니, 도움이 되는 방법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여간 쉬운 것이 아니다. 사실 걱정은 미래를 대비하는 방어 기제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의 몸에 비하자면,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에 대해 일어나는 염증 (Inflammation)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외부 자극을 잠재우고, 그에 대해 회복을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때로 염증은 과하게 작용하여 우리의 몸을 해치기도 한다. 깊은 흉터로 남기도 하고, 붓기도 하고, 때론 알레르기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하면 자가면역의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이때 현대 의학은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제로 이러한 염증의 반응을 다독여 몸이 평소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염증을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듯, 세상에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노래를 부른다. 어떤 이는 파도를 타고, 어디선가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마 클라이밍이 가장 잘 맞는 레메디(Remedy)인 것 같다. 오늘 오후, 저녁에도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지만, 오늘 느꼈던 바위의 촉감, 바위를 당기던 나의 근육의 느낌, 그리고 다시 돌아가 끝내야 할 나의 프로젝트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어두운 감정들은 마음 어디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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