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는 이야기
잘렸다.
아니, 이미 잘려 있긴 했지만 (furlough), 이젠 진짜 잘렸다 (layoff). 굳이 따지면 해고 (fire) 된 것은 아니나 내가 이제 이 곳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처음으로 실업 수당과 퇴직금을 받게 되었다. 예상은 했었어도 실제로 이렇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COVID-19의 영향으로 세상이 닫힌지도 거의 두 달이다. 2020년 3월 18일, 나는 여느 일요일처럼 클라이밍 짐(climbing gym)의 문을 열었다.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이는 암장, 나 혼자만이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날도 많이 따뜻해지고, 해도 많이 길어졌다. 수많은 스피커에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언니네 이발관> 플레이스트를 뻥뻥 틀어놓고 묶인 클라이밍 로프들을 풀었다. 큰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노란 햇살에 내가 세팅한 루트 (route)와 문제들이 유난히 멋져 보인다. 따스해지기 시작하는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의 그림자가 진다.
커피를 마시며 여느 때와 같이 일요일 첫 손님들을 맞이했다. 늘 같은 짐 멤버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이 아직까지 클라이밍 짐이 열려 있음에 대해,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스태프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 혹은 고마움의 말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 지금 이런 상황에 일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쉬프트가 될 수도 있겠다고.
'XX 클라이밍 짐, YY 입니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전화를 받고 있으려니 대부분 암장이 정상 운영하고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정상적으로 열려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확실히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는지 평소보다 찾아오는 이들이 적었다. 그럼에도 9시, '로프 클라이밍 기초' 수업을 들으러 온 이들도 있었다. 역시나 이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왠지 소중한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환영해요, 오늘 우리는 안전하게 클라이밍을 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해 배울 거예요'. 내 쉬프트가 끝나고 많은 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 날 저녁으로 암장은 문을 닫기로 했다. 내가 여기에 몸 담은 지 2년 반만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클라이밍을 한 지, 클라이밍에 관련된 일을 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되어간다. 내 개인적인 클라이밍 목표도, 업무적인 목표도 뚜렷하게 세우고 시작한 올해, 다 물거품이 되어 헛웃음이 난다. 이 즈음되니 내가 정말 클라이밍이라는 스포츠를 한 적이 있나 싶다. 내 인스타그램의 영상과 사진을 돌려 보면서 '아, 이런 때가 있었구나' 하며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에 안도한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어느덧 5년 차가 되었다. 내 삶에서 클라이밍처럼 나를 매료시키고 집착하게 만든 것은 없는 것 같다. 클라이밍을 통해 얻은 경험들, 부상들, 알게 된 소중한 사람들은 나의 세계를 너무나 넓어지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클라이밍에 대해 글을 쓰기가 너무나 어렵다. 한 문장, 한 단어에 고민을 한다. 그 경험들을 곱씹어보고, 객관화시키고, 그에 비추어진 나 자신을 이해하기에 아직 내가 클라이밍이라는 경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임이랑 작가의 <아무튼, 식물>을 통해 <아무튼>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아무튼, 요가>도 읽어 보았고, 아내는 아까는 <아무튼, 발레>, 그리고 지금은 <아무튼, 예능>을 읽고 있다. 클라이밍의 인기가 어마어마해지고 있는 요즈음, 아직 <아무튼, 클라이밍>이 없는 것이 놀랍다. 클라이밍이 내 삶에서 없어진 지금, 나의 클라이밍에 대해 돌아볼 좋은 기회가 왔다. 이것은 나만의 <아무튼, 클라이밍>의 짧은 서론이다. 나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