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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y 31. 2020

도넛 이야기

동그란 창에 담긴 달콤함

 무뎌진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추려내며 어렵게 글을 시작한다. 콜라는 코카콜라, 햄버거는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은 베스킨 라빈스, 그리고 도넛은 던킨 도넛.


 초등학교 시절, 서울에서 온 누군가가 반장이 되었다. 온 지 며칠만에 나보다도 사투리를 잘 구사했던 그는, 반장이 된 턱으로 우리에게 예쁘고 가지런하게 접힌, 주황색과 핑크색 폰트로, 요즘 경상도 말로 하면 '등킨드나쓰'가 써 있는 작은 박스를 돌렸다. 그 속에는 한 입 거리인 도넛 구멍, '먼치킨'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기본 슈거 글레이즈, 슈거 파우더가 듬뿍 묻혀진 것, 딸기 쨈이 들어있던 것, 초콜렛에 감싸진 것 등등.


 나는 언제나 장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서울로 이사온 후 아파트에서 10분 거리 지하철 역 바로 옆 이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엄마는 늘 '도넛 먹을래?'라고 물었다. 도넛을 사고 나면 바로 옆 붙어 있는 같은 계열사인 베스킨 라빈스를 가리키며, '아이스크림 먹을래?'라고 물었다. '엄마는 외계인', '레인보우 샤베트',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나의 단골 맛이었다. 베스킨 라빈스 직원은 언제나 '많이 드렸습니다,' 고 말하였으나 나에겐 늘 부족했다. 


 고등학생 시절, 인싸 중 인싸였던 놈 하나와, 나보다도 조용하고 소심하고 아싸였던 놈 하나와 던킨 도넛에 앉아 탁상공론을 하곤 했다. 사랑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인생은 무엇인가, 하고. 니콘의 필름 카메라 FM을 들고 다니며 우리의 시간을 담았었는데, 외장 하드가 없던 시절, 노트북이 명을 다하면서 스캔된 나의 어린 추억들이 다 어디론가 증발하여버렸다.


 나는 주로 기본적인 것들을 좋아했다. 빵은 바게트, 케익은 생크림 케익, 파스타는 까르보나라, 컵라면은 육개장, 라면은 ... 그래도 무파마, 맥주는 바이젠, 그리고 도넛은 슈거 글레이즈. 처음으로 아내가 미국에 와 같이 워싱턴 DC로 여행을 가던 날, 유니언 스테이션 던킨 도넛에서 슈거 글레이즈 도넛 여섯개를 샀다. 아내는 도넛이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다며 한 개만 먹었다. 그가 한 개 먹는 동안 나는 다섯개를 먹었다. 워싱턴 DC 우정 (USPS) 박물관을 돌다가 나는 의학 대학원 합격 메일을 받았다. 너무 애타게 기다렸던 소식에 박물관 한 가운데에서 소리를 질렀고, 이에 놀라 달려온 세큐리티 직원에게 얘기해주니 같이 즐거워해주었다.


 의학 대학원의 첫 일년은 힘들었다. 돈은 너무 없고, 할 것은 정말 토나오게 많고, 같이 살던 인간들은 미친 새끼들이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동네 도넛 맛집에서 슈거 글레이즈 한 더즌을 사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기서 '베이커's 더즌'이라고 하면 열둘이 아닌 열셋이다. 스트레스에 베이커's 더즌을 먹곤 엄청난 당분에 의해 정신을 잃고 자기도 하고, 가끔은 토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또 그 다음 날, 그렇게 도넛을 사러 갔다. 아침에 그렇게 단 것을 쳐 먹고도 힘들고 슬퍼서, 저녁에는 오레오 한 패키지를 다 쑤셔넣었다. 자그마치 3,400 칼로리였다. 그게 너무 속상해서 다시 내 목구멍에 손가락을 후벼넣어 토해 내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 또 나는 도넛과 오레오를 사러 갔다. 그렇다, 나는 그 당시 우울증과 섭식장애를 겪었다.


 놀랍게도 그래도 나는 도넛이 정말 좋았다. 언제나 그 달콤함, 기름에 튀겨진 겉의 바삭함, 그리고 반죽 속의 폭신함은 나를 괴롭게보다는 행복하게 하였다. 이 동네엔 던킨 도넛이 아닌 아주 많은 도넛 샵들이 있었다. 비교적 작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기에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위 말하는 'mom and pop (엄마 아빠의)' 도넛 샵들도, 작정하고 고급스런 도넛을 표방하는 비싼 도넛 샵들도 많았다. 나는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기 저기의 도넛을 먹고 다녔다.


 언제부터 아내가 도넛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신나게 먹던 마늘, 고수, 고추를 먹게 된 것처럼, 어느날부터 그 또한 도넛을 좋아하게 되었다. 도넛 셋을 주문하면 내가 둘을 먹었었다면, 이제는 아주 공평하게 한 개 반씩 먹는다. 도넛 맛에 길들이는 것이 아닌데. 자정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 이 지역의 랜드마크, 랜디's 도넛에 들러 슈거 글레이즈 도넛과 애플 프리터를 사 가면 아내가 그렇게 신나하는 모습에 행복했다. 아버지들은 그래서 치킨을 집에 사 들고 가는 것인가보다.


 그 이후엔 이 지역 내로라하는 도넛 샵에 같이 찾아갔다. 특히 <사이드카 도넛>이나, <블루스타 도넛>, 그리고 <올리볼리 도넛>은 이 지역의 최고 도넛으로 명성이 나 있어서 특별한 날 찾곤 했다. 추억의 '등킨드나쓰'와는 조금 다른 맛이나, 하루 꼬박 천연발효를 시켜 주문하자마자 튀겨주는 <올리볼리>의 따스한 도넛과 그 위에 올려진 특제 다양한 글레이즈는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베이킹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미국에는 절대 오지 않겠다던, 도넛이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다던 그는 조금씩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달달한 앙금 가득한 찹쌀 도나쓰를 튀겨내더니, 그 다음엔 돌돌 예쁘게 말린 꽈배기를 튀겨 내었다. 갓 튀겨진, 따뜻한 꽈배기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아내도 맛있다며 둘이 실컷 꽈배기를 먹었다.

 어느 날, 하자 있는 스타우브 (Staub) 주물 냄비를 어찌 싸게 구한 며칠 뒤, 아내가 도넛을 튀기겠다고 했다. 산 이후에 아주 열심히 일하는 키친에이드 반죽기로 반죽을 돌리더니 하루 꼬박 발효를 시켜야 한다고 했다.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내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도넛을, 베이킹도, 도넛도 별로라던 그가 직접 튀기겠다고 나에게 선언하였다. 들떴으나 대수롭지 않은 척, 그를 지켜보았다.

그 다음날, 아내가 도넛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동그란 구멍난 도넛과, 그 도넛 구멍이 폭신하게 잘도 부푼다.

차분히 튀겨 간단하게 설탕을 입혔다. 그리고 레몬 제스트를 넣어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기름맛을 잘 잡아주는 상큼한 글레이즈도 얹었다.

 세상에, 도넛이 어떻게 이렇게 따뜻하고, 폭신하고, 바삭하면서 달콤할 수 있는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 것을 열심히 참았다.


 며칠 뒤, 기름이 남았기도 하고, 도넛의 감을 익히고 싶다며 아내는 다시 도넛을 튀기기로 했다.

많이 늘어난 양에도 이 전보다 더 능숙하게 도넛을 성형했다.

측면에 드러나는 하얀 띠는 반죽이 잘 발효되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보글보글, 탐스럽게 도넛이 잘도 기름 위에 떠 다니며 튀겨진다.

너무나 탐스럽다.

 나는 레몬 성애자다. 어릴 때부터 레몬 사탕에 사족을 못 썼으며, 레몬 타르트, 레몬 파이, 조금 다르지만 키라임 파이, 레몬 케익, 레몬 쇼트브레드 등등에 정신을 차지리 못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위해 이번엔 레몬 제스트 한가득한 반죽에 레몬 글레이즈를 올리거나, 레몬 커드와 휘핑크림을 섞어 도넛 안에 채워주기로 하였다.

 평범한 초콜렛 도넛이 아닌, 클리어런스 칸에서 50센트로 할인하는 벨지안 초콜렛을 녹여 만든 가나쉬를 올린 도넛. 내가 먹어 본 초콜렛 도넛 중 가장 맛있었다.

 나는 늘 내가 하는 일을 때려치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것에서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인지, 아내는 이민자의 정석처럼 도넛을 튀겨내기 시작했다. 그가 튀겨 내는 도넛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보고, '나 그냥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라도 먹고 싶으면 가서 일해,' 라고 대답해 주었다. 참나, 열심히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슈거 글레이즈 도넛, 초콜렛 도넛, 코코넛 도넛, 레몬 크림 도넛, 그리고 그 각각의 도넛홀, 즉 먼치킨들, 나는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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