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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ul 31. 2020

피자 이야기

나의 혈관엔 토마토소스가 흐르는가

 이번 공모전 주제라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 짧은 문구에 '나'가 두 번이나 들어간다. 중요한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무엇인가에 대해 모처럼 생각을 해 보기 시작하니, 꽉 막혀 물이 고인 세면대를 뚫기 위해 배수관 안쪽을 긴 고리로 쑤시고 헤집어 미끌미끌하고 끈적끈적한 찌꺼기들을 끌어올리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모든 것이 그렇듯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과해지면 독이 된다. Self-rumination, 즉 자신에 대한 '반추'는 우울증의 중요한 면모 중 하나이다. 가뜩이나 바쁘고, 스트레스받는 시기에 굳이 나에 대해 생각하며 늘 그렇듯 더욱더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리는 일에 나의 마음과 정신,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마음을 마주하며 그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은 용감하고 현명하며 강하다. 나는 거기서 도망쳐, 주어를 바꾸어보기로 했다. 

 '피자를 피자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비슷하게 어렵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잘 모르겠으나 왠지 재밌어서 잊을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질문이다. 두루뭉술하게, 널찍하고 얇은 반죽 위에 소스, 치즈, 그리고 그 외 토핑이 올라가는 녀석을 우리는 '피자'라고 부른다.

아내의 치즈, 고구마 크러스트 피자

 내가 대학교에 합격하고 나서, 같이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길드의 모든 형들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축하해 주었다. 합격 소식을 알리려 배틀넷에 접속을 하자, 여럿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축하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하필이면 고3 때 스타크래프트에 빠진 나는 이들과 같이 하루에 몇 시간씩 게임을 하며 몇천 승을 올렸다. 가족들은 내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물론 나에게도 더 '좋은' 대학에 대한 허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열정 없는 노력, 오기, 의지로 더욱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드원 중 신림동에서 미스터피자 체인점을 운영하던 형이 있었다. 그의 게임 플레이는 아주 민첩하고 예리해서, 한동안 그의 스타일을 따라 하려 하기도 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자퇴하기까지 두어 달 남짓의 짧은 시간 그 어느 사이, 그는 자기가 축하 턱으로 피자를 만들어 주겠다며 신림역에 놀러 오라고 했다. 6513번 버스를 타고 그가 운영하는 매장에 갔더니, 목소리만 들어봤지 실제로 마주한 것은 처음인, 잘 생긴 형이 피자를 구워줄 테니 좋아하는 토핑을 고르라고 했다.

 낯도 많이 가리고, 그런 신세를 지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민망했던 나는, 소세지, 양파, 거기에 치즈를 조금만 많이 올려 달라고 쭈뼛쭈뼛 얘기했다. 그 형은 내가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처럼 쪼잔하고 소심하게 굴지 말라며,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에 고구마와 치즈로 크러스트를 둘러 새우와 스테이크 조각까지 올려서 구운 무거운 피자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신림역에서 집까지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들고 있는 커다란 피자 상자에서 너무나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저녁으로 피자를 먹고, 밤엔 또 그들과 만나서 신나게 게임을 했다.

 어릴 적 피자는 역시 피자헛이었다. 누구 생일이라던지, 중간고사가 끝난 날이면 동네 피자헛의 커다란 테이블 한쪽씩, 한 면은 벽에 막혀 있는 기다란 의자에 누가 어디에 앉느니 다투곤 했다. 지금보다 아주 관대했던 시절, 피자헛 샐러드바는 한 테이블당 5,500원이었고, 사실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 싶은 일이다. 혹은 그것이 점점 비싸지다 못해 테이블당이 아닌 사람당 가격을 매기고, 피자 값 또한 점점 비싸지면서 그렇게 피자헛이 쇠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뭘 그렇게 잘도 먹었는지, 피자가 나오기까지 이미 감자 샐러드와 마카로니 샐러드로 보울을 세 번이 넘게 채워서 먹고 난 채였다. 물론 피자도 여러 판을 거의 다 먹고, 남은 두, 세 조각은 피자헛 로고가 새겨진 작은 상자에 포장해서, 빨갛고 반짝이는 리본 끈을 손에 걸고 달랑달랑 흔들며 피시방에 갔다. 물론 그때도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엄청나게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집에 가면 엄마는 냉동실에 피자를 얼려 두었고, 어느 게으른 주말 오후에, 그때는 오븐도 없었으니 전자레인지에 적당히 데워서 먹으면 딱딱하고, 질기고, 냉동실의 맛이 나는 그 피자도 뭐가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피자헛의 치즈 크러스트 피자를 처음 먹었을 때는 굉장한 쇼크였다. 바로 갓 구웠을 때에나 그나마 괜찮지 한 번 냉동했다가 먹기라도 하면 나무 조각을 씹는 것 같은 같았던 크러스트와 달리, 고소하고 짭쪼름한 치즈가 주욱 늘어나는 크러스트는 정말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이었다. 거기에 고구마 무스까지 더해지니 단짠의 조합은 파괴적이었고, 그것을 아주 강하게 내세운 것이 아마도 치즈바이트였던 것 같다. 피자 한 조각당 두 개일 수도, 세 개일 수도 있던 치즈바이트 때문에 투닥거리기도 했으며, 개념을 아직 탑재하지 못한 부끄러운 나는 피자는 안 먹고 치즈 바이트만 떼어먹기도 했었다. 크러스트가 이렇게 진화를 한 것처럼, 한국 피자의 토핑 또한 점점 고급화되었다. 감자, 베이컨이야 평범해진 지 오래고, 위에도 언급했듯 새우니, 오징어니, 스테이크니, 아직 트러플이 올라가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다. 뭔가 많은 재료를 올려서 비벼먹는 한국의 식문화에 기인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이는 피자뿐만이 아니다. 스파게티 위에도 유난히 다양하게 부재료라고 하기엔 주 식재료로 쓸만한 스테이크나 가재 등등이 올라가고, 하물며 마카롱 같은 디저트마저도 커다랗게 만들어 그 위에 뭘 올리고, 크림은 산더미처럼 넣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그것이 그 가격과 재료들의 가치에 비해 맛있는가 하면 그것은 조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지만, 그 창의성 자체는 늘 놀랍다.


 반면, 미국의 피자는 정말로 심플했다. 옥수수밭에 둘러싸여 살았던 시절, 동네에 작은 피자집이 있었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힙하며, 적당히 캐주얼한 피자집이었다. 주차장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 피자집 특유의 토마토소스의 산미와 감칠맛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퐁신퐁신한 도우와 크러스트, 그리고 고급진 토핑을 자랑하던 한국 피자와는 달리, 얇고 바삭한 도우에 토마토소스, 치즈, 원한다면 페퍼로니, 딱 그게 다였다. 그 한 구석에는 팩맨을 할 수 있는 오락기가 있었는데, 쿼터를 넣어서 두 판 정도 하려면 일 분 안에 죽어버리니 언제부턴간 동전 몇 개만 달라는 말도 하기도 민망해졌다. 그래서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데모 플레이가 진행되고 있는 스크린만 보면서 조이스틱을 빙글빙글 돌리고 버튼을 톡톡 두드리곤 했다. 그곳의 피자는 아직도 냄새의 기억이 강하다. 정말 심플한 피자인데, 토마토소스의 향이 깊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름대로의 컬트적인 인기가 있었던 곳이니 소스에 신경을 좀 썼었던 곳일 수도 있었겠다. 피자를 다 먹고 나서는 골목을 돌면 존재하던 카드 게임 숍에 꼭 들렀다. 포켓몬에 아주 심취해 있던 나를 위해 아빠는 가끔 8장 정도 든 포켓몬 카드 팩을 하나씩 사 주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유리장에 진열되어 있던 $120짜리 리자몽 레어 반짝이 카드를 보면서 침을 흘리기도 했다. 어디엔가 묻혀있는 나의 모든 포켓몬 카드를 판다면 나는 지금 은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작은 동네에 언젠가 파파존스가 들어서면서 피자에 대한 이해가 조금 또 변한 것 같다. 아주 심플한 미국식 띤(신(Thin))-크러스트 피자와 한국식 피자의 그 어느 중간, 도우는 폭신폭신하고 거대했으며, 토핑이 많이 올라가지는 않았으나 소스와 치즈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심플한 듯 푸짐했고, 먹고 나면 손가락이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크러스트를 찍어 먹는 파파존스 특유의 갈릭 디핑 소스가 얼마나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결국 미국 배달 피자의 가장 주류적인 패러다임은 여전히 이러한 피자들이다. 파파존스, 도미노 피자, 그리고 많이 쇠퇴했지만 그래도 피자헛.


 한참 화덕 피자 유행이 시작될 무렵, 나는 나를 파스타에 빠지게 했던 계기가 되었던 동네 이탈리안 체인 레스토랑 '소렌토'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 정통'의 '화덕 피자'를 먹어보게 되었다. 들어본 적도 없었던 마리게리따 피자는 아주 얇은 도우 위에 토마토소스, 모짜렐라 치즈, 바질 잎이 올라가 있었고, 이 간단한 재료들의 조합은 재료 각각의 다듬어지지 않은, 그리고 신기하게도 풍부한 맛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론 나름 이름이 있는 파스타 집에 가면 꼭 화덕 피자를 먹어보게 되었고, 간단한 만큼 각각 재료의 신선도와 질이 굉장히 중요한 피자이기에 생각보다 맛있는 화덕 피자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화덕 피자를 기업화시킨 캘리포니아 피자 키친이 이태원에 들어섰을 때엔, 줄을 서서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미 미국에선 피자헛과 크게 다름없는 적당하고 무난한 피자집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화덕 피자 붐은 피맥, 피자와 맥주라는 훌륭한 조합을 세상에 조금 더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쳤던 동부 지역, 당시 제법 힙했던 햄덴이란 동네에는 집집마다 길고양이를 위한 물그릇, 밥그릇이 놓아져 있었다. 낮에야 귀엽기만 하지만, 어두울 때면 갑자기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날아다니던 까만 고양이 녀석들에게 놀라면서 좀 걷다 보면 '비로테카'라는 피맥집이 있었다. 같은 과 동기이자 고양이 동지인 친구들과 함께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기본 마르게리따를 먹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가 물어보니, 사나흘마다 로컬 팜/크리머리에서 얻어온 토마토, 바질, 그리고 치즈, 그리고 700도가 넘는 화덕 덕분이라고 했다. 기본이 탄탄한 그 피자집은 참 창의적인 시도를 많이 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리와 오리알이 올라간 피자였다. 뭐라고 얘기하기도 어렵고, 감칠맛이 한가득 담긴 쫄깃한 오리고기와, 오리알의 고소함이 바삭바삭한 도우와 아주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아직 아내가 되기 전, 여자 친구가 놀러 왔을 때도 그 피자를 주문하였다. 멋지게 피자를 들고 오던 서버는 어쩌다 발이 미끄러졌고, 콩트 장면에서나 볼 것 같이 피자는 180도 뒤집어져 철퍼덕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더니 얼마 있지 않아 그는 -- 이번에는 안전히 -- 피자를 가져다주었고, 서비스라며 깔라마리 튀김 또한 내어 주었다. 어찌나 부드럽고 바삭하고 쫄깃하던지, 처음으로 오징어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아파트 바로 앞에 있던 피자 집에선 이탈리아 피자 스탠드에서처럼 기다란 직사각형 판 모양으로 피자를 구웠고, 토핑은 파파 존스처럼 종류는 얼마 없지만 토마토소스와 치즈를 듬뿍 얹었으며, 크러스트는 버터를 잔뜩 넣어 시카고 딥디쉬 피자와 같은 느낌이 났다. 얼마나 대단한 혼종이었나 모른다. 가끔 장사가 끝날 때쯤 가면 팔다 남았다며 프렌치프라이나 버거를 하나씩 건네주어서, 아내와 나는 야밤에 신나게 맥주와 함께 파티를 벌였다.

로마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결과를 기다리던 애매한 시간,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냐며 아내는 그간 열심히 모은 돈으로 나를 데리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하여 파리, 프라하, 뮌헨을 거쳐 로마에서 끝이 나는 여정이었다. 각 도시에서 얼마나 신나게 먹고 마셨는지 모르겠다. 이탈리아에 들어서서 처음 파스타를 먹었을 때 놀란 부분은 아주 투박하다는 점과 재료의 향과 맛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너무나 달고 턱에 힘이 들어가도록 상큼했던 토마토는 내가 알고 있는 토마토가 아닌 것만 같았다. 야채 맛도, 후추 맛도 강하고 그놈의 '알 덴테'는 찾아볼 수 없이 계란 맛 많이 나는 푸석한 칼국수 면 같은 것이 들어간 파스타는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왜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지, 이제는 우리도 직접 파스타 면을 뽑아서, 마당에서 길러낸 향이 센 허브들과 좋은 토마토로 소스를 내어 만든 러스틱한 파스타를 먹으며 이탈리아를 그리곤 한다. 아내는 늘 그렇듯 현명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냐, ' 지금 상황을 비춰보니 참 씁쓸하다. 앞으로 우리가 언제쯤 제대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트라스테베레 (Trastevere)

 이탈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피자를 매일 두 판씩은 먹었다. 5-6 유로면 두 명이 실컷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너무나 맛있었다. 그중, 우리는 트라스테베레 피자리아 Ivo를 심심하면 찾아갔다. 트라스테베레 (Trastevere)는 제법 힙한 동네로, 좁고 굽어진 예쁜 골목길 사이로 뜨거운 햇빛이 흐르고, 많은 이들이 노래를 하고, 공연을 하고, 그 자리에서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곤 했다. 그중, 어떤 어려 보이는 아티스트가 만드는 팔찌의 디자인이 아내와 나의 취향에 아주 잘 맞았다. 며칠 왔다 갔다 하며 안면이 틀 정도로 구경하고, 살까 말까 고민했으나 결국 살 수 없었다. 나중에 돌아보며 그게 얼마라고 안 샀을까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후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적은 돈으로 커다란 여행을 했던 것이니까 말이다. 어느 저녁, 매대를 정리하면서 와인 병나발을 불며 주변 사람들과 신나게 춤을 추던 그 아티스트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가 아직도 그런 자유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좋겠다.

 더운 여름에도 장작을 계속 넣어가며 떼던 Ivo의 화덕에는 동그란 보물들이 멋지게 구워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크러스트가 방울방울 부풀어 구워진 피자 위로 피자 마스터는 아주 원초적으로 프로슈토 네다섯 장을 턱, 턱 올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통 올리브를 무심하게 한가득 던져 놓았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바질 통 잎 몇 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물론, 올리브에는 씨가 그대로였다. 내가 익숙했던, 조각마다 토핑이 다 손질되어 비교적 고르게 분포된 것과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피자는 어찌나 맛있던지, 토마토, 바질, 올리브, 프로슈토, 치즈, 그 자체로 맛이 어찌 그렇게 풍부할 수 있는지.

 로마를 떠나던 마지막 날 아침에도 우리는 Ivo를 찾았고, 이제는 우리를 안 알아볼 수도 없었던 피자 마스터는 직접 나보고 내 피자를 구워 보라고 초대해 주었다. 커다란 나무 필 (Peel) 위에 내 피자를 올리고 화덕에 훅 넣었다. 분명히 사진도 찍었었는데, 아쉽게도 0-255의 숫자로 이루어진 디지털 매체는 어디론가 증발되고 말았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아직도 피자와 파스타 중에 고민을 하게 된다. 이제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한식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피자와 파스타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피자와 파스타 중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특별할 때엔 피자, 일상적으로는 파스타다. 아내가 아직 미국에 오지 않았을 시절, 바쁜 한 주를 마친 금요일 밤이면 도미노 피자에서 커다란 바비큐 치킨 피자를 시켜 맥주와 함께 먹으며 애니메이션을 보건, 스타크래프트 영상을 보건, 클라이밍 영상을 보건, 나름대로의 불금을 보내면서 짜릿함을 느끼곤 했다.

 '바비큐 치킨 피자', 이는 엄밀히 따지면 피자일까? 토마토소스 대신 바비큐 소스, 치즈는 없고 닭고기와 고수가 잔뜩 올라간 이 것을 피자라고 할 수 있을까. 피자의 본질에 대해서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소스가 있어야만 하는지, 그렇다면 꼭 토마토소스여야 하는지, 치즈가 있어야 피자인지, 우유 성분을 못 먹는 이들을 위한 non-dairy 치즈가 올라가면 이것이 과연 피자인지. Non-dairy 치즈는 치즈라고 할 수 있는지. 콩고기는 '고기'인지. 얇은 반죽 위에 이것저것 올려 먹는 것이 피자의 본질이라면 또띠아 위에 이것저것 올려 먹는 타코도 피자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반죽으로 내용물을 감싸는 스트롬볼리나 칼조네는 피자의 범주에 드는 걸까, 그렇다면 케사디아는 어떨까. 한식의 메밀 전병은 어떠할까. '피자'로 불리나 사실은 피자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것이 있다면 빈대떡, 'Korean Pizza'다. 기름에 그렇게 지글지글하게 구워지는 것이 피자라고 불렸던 것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궁금하다. 빈대떡, 전은 그 자체로 카테고리가 있어야만 할 훌륭한 한식이며, 점점 그러한 입지를 갖추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파인애플 피자와 마르게리따 피자

 파인애플이 올라간 하와이안 피자나 민트 초코는 괴식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대머리를 놀리는 것이 안타깝게도 당연한 밈이 된 것과 비슷하게 하와이안 피자, 그리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을 놀리는 댓글은 그저 당연스러운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여진다. 풍자나 해학을 통해 소소한 웃음거리를 찾는 것은 자유지만, 좋아하는 것을 놀림 받음에 속상함을 느끼는 것 또한 자유다. 정치적 올바름이 아주 중요한 요즘 세상, 어떤 것이 '옳은가', 한다면 옳고 그름에 있어 정확한 정의가 있던 적이 있었던가. 그 시대, 그 환경에 우세한 의견이 이기는 법이다. 그렇기에 대머리와 파인애플 피자와 민트 초코는 놀림거리가 된다.

 독일에서 맥주 순수령이 존재하던 시절엔 물, 홉, 보리, 효모 외 다른 것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반대로 정작 그 옆 동네 벨기에에서는 맥주에 과일 껍질이나 향신료 등, 별의별 것들을 첨가했으며 람빅처럼 효모를 직접적으로 첨가하는 것이 아닌, 공기 중에 떠다니는 효모를 정착시켜 발효시킨, 스파클링 와인과 비슷한 형태의 상큼하고 상쾌한 맥주를 만들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맥주에 우유 설탕도 넣기도 하고, 과일, 심지어는 구운 베이컨이나 스테이크를 넣어서 숙성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맥주인가, 맥주가 아닌가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주세법 상으로는 맥주인 것은 분명하다.

 막걸리는 종종 'rice wine'으로 번역되곤 했다. 요즈음에는 'rice beer'라는 불리기도 하는데, 과연 막걸리는 와인일까 맥주일까. 발효된다는 부분에서는 와인과 비슷한 맥락이 있는가 하면, 사실 와인은 과일의 과육을 발효시킨 것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막걸리는 와인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곡식으로 빚어 탄산도 있고 도수도 그리 높지 않은 부분에서는 맥주에 가깝다. 그러나 맥주처럼 홉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끓이는 것도 아닌 막걸리는 사실 그저 막걸리다. 맥주도 아니고, 와인도 아닌 막걸리다.

 세상의 아주 많은 것들은 연속적인, 그리고 다차원적인 개념으로서 존재하나, 인간의 편리를 위해, 그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개의 확실한 디지털적인 카테고리로 나뉘곤 한다. '권선징악'이라는 이분법적인 테마가 어릴 적에는 명쾌하고 커다란 카타르시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0점부터 100점까지 존재하는 점수에서 89.9점은 B가 되고, 90.01점은 A가 되며, A는 B보다 낫게 여겨진다. 옛날엔 토마토나 수박이 과일인지 채소인지로 침 튀기게 싸우곤 했다.

어렸을 적엔 혈액형으로 인간의 성격을 간단하게 구분하곤 했다. 그것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보편적으로 돌아다니던 밈이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엔 조금 더 정교하고 복잡한 MBTI와 같은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 열여섯 가지로 인간의 성격을 나누곤 한다. 나와 아내도 신나게 둘이서 성격 검사를 하며, 우리 둘의 성격 궁합이 '파국'이 나올 때까지 낄낄거리며 문항들을 골라 보았다. 아무리 16가지의 구획이 생긴다고 해도, 각각의 차원(I-E, S-N, T-F, J-P)은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분할이 된다. 아내의 I-E 결과는 거의 49:51이라 검사를 할 때마다 종종 바뀌고, 나는 S-N의 결과가 그러하다. 인간의 성격이란 공간은 네 개의 선형적, 이분법적 경계면으로 구분하기엔 여전히 너무 커다랗다.

 성별만큼은 스펙트럼 상에 있어도 그래도 비교적 확실한 경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해리포터의 작가 JK Rolling이 트랜스포비아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담긴 기사들을 읽었다. 월경 대한 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 '월경을 하는 사람'이 아닌 '여성'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게 무슨 말인지에 대해 한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이해를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매스미디어에 비친 정치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 그 단순하고 자극적인 선형적 경계선에 나뉘어있다. 보수는 '틀딱'이고, 진보는 '빨갱이'다. 그러나 사실 보수건 진보건, 모든 사안에 대해 일괄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씌워지는 원색적인 정치적 프레임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대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힘싸움을 하는 데 있어 편리한 수단이 되며, 한편 일개 시민에겐 살아가며 느끼는 힘듦과 분노를 쏟아내기 좋은, 달콤하고 감칠맛 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빨갱이, 틀딱, 반일, 반중, 반미, 경제, 복지 ... 권선은 없어진 지 오래고, 징악만을 외칠뿐이다.

 인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인, 황인, 흑인, 이렇게만 이해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 정체성이 섞이고 섞인 인종의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 점점 더 복잡한 세상이 되어간다. 각자의 정체성을 보장받고자 목소리를 내는 시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시대가 오기까지 힘쓴 많은 이들의 고생과 노력, 죽음에 감사하다. 그러나 매스미디어, 정치권은 아주 자극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몇 개의 칸막이 만으로 세상을 나눈다. 

 세상을 구분하는 방법이 복잡해지고, 그 경계선이 섬세해지고 옅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무질서, 엔트로피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우주의 법칙마저도 질서가 흩어짐을 시사하는데, 한낱 작은 인류의 구분선들이 옅어지는 것은 파도에 하염없이 쓸려가는 모래에 새긴 나의 이름과도 같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하면, 사실은 내가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변명일 뿐이다.


마르게리따, 바질 페스토
프로슈토, 아보카도, 아르굴라
피맥은 진리다.

 아내와 나는 집에서 우리에게 더욱더 잘 맞는 피자를 찾아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기에, 가능한 얇은 도우에 재료 본질의 맛만 간단하게 담은 기본 피자를 만들고 싶어 한다. 기본적인 토마토소스나 바질 페스토에 모짜렐라 치즈, 바질, 파마산 치즈 정도로 이루어진 피자의 궁극을 찾는 것이 나의 커다란 목표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조금 더 토핑이 많은 피자를 좋아한다. 한국식 피자처럼은 아니더라도, 그가 좋아하는 많은 야채를 올리고, 크러스트에 고구마나 치즈를 두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집 피자는 이럴 때도, 저럴 때도, 그 어느 중간일 때도 있다.

 최근에는 열심히 키우고 있는 천연 발효종 '방방이'로 사워도우 피자 반죽을 만들곤 한다. 요즘 사워도우 피자 반죽은 더 '자연스럽고', '속에 좋다'라고 홍보를 많이 하는데 글쎄 나는 전혀 모르겠다.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의외로 '사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튼, 다만 직접 천연 발효종으로 만든 사워도우 반죽은 약간의 산미가 더해져 조금 더 입맛을 돋우고, 우리 방방이가 지금 상태가 아주 좋아서 크러스트가 예쁘게 올록볼록 부풀어 오른다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다. 그것에 건강에 대한 의미를 더할 것이면 그냥 피자를 안 먹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힘이 넘치는 봄과 여름을 거쳐 허브들이 신나게 자랐다.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향이 강한 타임, 오레가노를 잘라서 토마토소스에 더했다.

 센토스 토마토, 물론 집에서 잘 길러 익힌 토마토로만 소스를 내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양이 좀 부족하고, 그다음으론 캔에 담긴 센토스 토마토만 한 것이 없다. 의외로 토마토는 숙성시키면 더 맛있어진다고도 한다. 다만 생 토마토에 비해 비싼 편인데, 모처럼 할인을 하는 캔 토마토를 잘 구해와서 신이 났다. 

 크러스트의 두 면에는 이렇게 고구마 무스를 두르고, 나머지 둘에는 치즈를 둘렀다. 크러스트까지 너무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볶은 양고기에 토마토소스를 더해서 라구 소스 같은, 정확히는 양고기 디아볼로 (lamb fra diavolo) 베이스 소스를 만들었다. 언젠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나온 디아볼로 소스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매콤한 맛과 양고기 특유의 향이 정말 잘 어울린다.

 거기에 브로콜리, 양파, 벨페퍼를 올렸으니 이 정도면 건강식이 아니냐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보게 된다.

 매콤한 디아볼로 소스가 올라간 피자에 계란 노른자와 치즈, 페페론치노를 섞은 딥을 찍어먹으면 그 조합이 어마어마하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풍부한 재료들의 맛이 돋보이는 우리의 고구마/치즈 크러스트 양고기 디아볼로 피자. 또 피곤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피자'라 부를 수 있을까. 이탈리 나폴리 지방이나 미국 뉴욕에선 얇은 반죽 위에 토마토소스, 모짜렐라 치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올라간 피자는 이단으로 여긴다고 하니, 그들에겐 이것이 피자가 아닐 것이다. 포테이토 피자 같은 것도 피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얘기하니 말이다. 그렇게 순수주의적 정의를 고집하는 이들도 있지만, 피자의 개념이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별의별 토핑이 다 올라간 한국 피자도 그중 하나이며, 사실 미국 안에서도 뉴욕 피자 외에도 시카고 딥디쉬, 디트로이트식, 뉴올리언즈식, 이슬람식, 캘리포니아식 등등 이미 피자의 공간은 이제 무한히도 넓다. 가장 전통적인 맥주들이 지켜지듯 누군가는 피자의 전통을 계속해 나갈 것이고, 위스키 배럴에 숙성시킨 스타우트 맥주에 히비스커스 꽃과 립아이 스테이크를 넣어서 추가로 숙성시킨 맥주가 출시되듯, 예를 들면 오이가 올라간 기상천외한, 새로운 피자 또한 만들어질 것이다.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은 본디 굉장히 넓은 범위에 통용되는 법이다. '수'(Number)로 온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사고와 정체성에 대해, 온 인류의 역사가 고민을 하고 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나에게 피자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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