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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ug 12. 2020

커피 이야기

나를 깨우는 의식

 요즘 나의 아침 시간은 제법 규칙적으로 게으르다. '으아옹!', '믜애에애옹!' 문 앞에서 들려오는 보리, 구름이의 성화에 성가심 0.95, 반가움 0.025, 귀여움 0.025의 비율로 구성된 마음을 안고 마루로 나오면 기가 막히게 딱 아홉 시다. 역시나 오늘도 내 새끼들은 천재다. 

 녀석들은 내가 화장실을 갈 때도, 물을 마시러 갈 때도 꼬리를 파르르 떨면서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다 내가 아직 졸음을 떨쳐내지 못하곤 소파에 풀썩 누워 포근한 연둣빛 담요를 덮고 있으려면 마치 지리산 능선처럼 펼쳐진 내 몸뚱이 위로 고양이들이 올라온다. 둘 다 조금 더 내 얼굴 가까이 앉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아마 이는 내가 가까이 있는 녀석을 더 쉽게 쓰다듬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주로 우리 집 막내딸 어리광쟁이 구름이가 먼저 올라와 십 분쯤 내 배 위에 꾹꾹이를 한 후 가슴팍에 자리를 잡고, 어른스러운 보리는 그것을 기다려주다가 구름이 뒤에 살포시 앉는다. 

 쪼끄만 구름이만 올라와 있을 땐 폭신한 구름이 나를 덮고 있는 것 같지만 커다란 보리까지 올라오면 제법 가슴팍이 묵직해져 숨을 보다 능동적으로, 열심히 쉬어야만 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털뭉치들의 무게와 온기, 그리고 낮고 깊은 진동이 느껴지는 것이 좋다. 구름이는 내가 아는 고양이들 중 가장 크게 '그릉그릉', 아니, '거렁거렁' 소리를 낸다. 보리의 그릉거림은 내가 귀를 보리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면 그의 숨소리와 함께 잔잔하게 들려온다. 고양이 그릉거림은 저주파 치료와 비슷하다는데, 아마 이 즈음이면 나의 심장과 폐는 늘 새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

친한 척하는 보리, 구름

 오늘 아침에도 구름이가 올라와 내 배에 꾹꾹이를 하며 콧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잠시 있다가 올라온 보리는 웬일로 구름이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보리는 어찌저찌 구름이 앞의 좁은 공간을 잘 파고들어 내 얼굴에 가깝게 앉아서 평소보다 크게 그릉그릉거리며 침을 뚝뚝 흘렸다. 만년 보리에게 털리기만 하는 구름이는 맘에 안 들었는지 용감하게 보리의 목덜미를 물었는데, 의외로 보리는 눈을 꿈뻑꿈뻑하며 가만히 있고, 심지어 구름이가 보리를 몇 번 핥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권력 서열이 아주 짧게나마 바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이 둘의 관계는 알듯 모를 듯 늘 재미있다. 그들은 치열한 자리다툼 끝에 사이좋게 내 배 위에 앉아 팔을 하나씩 쭉 뻗고는 골골거리며 한 삼십 분쯤 아침잠을 잔다. 내가 당당하게 게으를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어쩔 수 없지, 고양이님들이 이렇게 편히 자는데. 이건 내가 게으른 것이 아니야.' 그렇게 나도 같이 조금 더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 베란다 앞으로 배전반 위에 둥지를 튼 새 두 마리가 '호우 호!' 하며 날아간다. 아니면 거미 한 마리가 베란다에 있는 아이비 이파리 사이로 집을 지으며 달랑달랑 흔들린다. 아니면 아파트 단지 안 꼬마가 왁자지껄 뛰어간다. 그러면 그렇게나 깊이 자던 것 같은 보리, 구름이가 신이 나서 전력으로 내 배와 가슴에 도움닫기를 해서 뛰쳐나가 베란다 창문 앞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곤 그 장면을 지켜보는데, 나는 순간 '억!' 하면서 눈알이 빠질 것만 같다. 이렇게 강력한 녀석들이 나를 죽이지 않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렇게 녀석들이 떠나고 나면 나에게 게으를 명분이 사라진다. 더 늘어져서 뒹굴거리고 싶은데, 사실 게으르게 있는 것도 질린다. 딱히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생각은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않고 시간을 버리는 나 자신을 재촉하게만 되니 결국 지리산을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모카포트에 물을 담고, 커피가루를 담고, 전기 레인지에 3과 4 그 사이 어디쯤으로 세기를 맞춰 둔다. 그 사이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오면 치익, 하는 커피 올라오는 소리와 씁쓸하고 구수한 커피의 냄새가 부엌을 채우고 있다. 부글부글 잘 올라온 커피 크레마가 보기 좋다. 갓 내려진 (정확하게는 '올려진') 아주 진한 커피를 따라 입 안에 조금 머금으면 얼마나 쓰디쓰고, 고소하면서 향긋한지. 한 모금씩 마시며 브런치 한 번 접속했다,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가,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려다 IP가 막혀 있는 것을 보고 창을 닫았다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오늘은 어느 브루어리에서 어떤 맥주가 나왔나 구경하다가, 결국 인터넷도 금방 재미가 없어져 유튜브에 들어가 빌 에반스와 스탄 게츠의 음악을 틀어놓곤, 반 모금의 커피를 남겨두곤 아침에 내가 해야 할 집안일을 시작한다. 아내가 밤에 마저 설거지를 해 둔 그릇을 정리하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잘 익어가는 토마토, 그리고 열심히 크고 있는 부추에 물을 주고, 돌아와서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신다. 아쉽게도 그렇게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과정은 끝이 나지만, 그렇게 커피 향이라는 에너지로 가득 찬 나의 하루가 시작이 된다.


 어릴 적 부모님의 하루도 커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는 동안, 자기들끼리 부딪히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깨지지 않던 하늘색 무늬가 둘러져 있는 코렐 잔에 허리가 오목한 유리병을 잡고 빨간 철제 뚜껑을 열어 '테이스터스 초이스' 인스턴트커피 한 스푼을 담았다. 아빠와 엄마는 주로 블랙으로 커피를 마셨지만, 가끔 손님이 찾아올 때면 빨간 은박 포장 안에 들어있던 '프리마', 그리고 하얗고 고운 설탕을 포트메리온 밀폐 용기에 담아 커피와 같이 내어 놓기도 하였다. '미국제'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빠가 잠시 미국에 출장을 다녀왔다가 친척들에게 이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선물해주면 제법 인기였고, 찾아온 손님들도 '역시 맛있다'는 얘기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식품의 맥심이야말로 바로 한국의 커피인데 말이다. 그때만 해도 '외국'은 미국이었고, 그것은 즉 선진 문물과 같았다. 그러한 인식이 이 COVID-19 사태로 드디어, 이제서야 깨져버린 것도 같다. 어릴 적 한 모금씩 얻어먹어보았던 커피의 맛은 제법 생생하다. 씁쓸한 맛이 조금 있었지만 묽고 맹맹했으며,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엄마가 인스턴트커피를 끓이는 냄새는 기가 막히게 향긋했다.


 내가 처음으로 마셨던 '에스프레소'는 고등학교 시절, 치킨을 시키면 가끔 따라오던 조그마한 코카 콜라 캔 사이즈에 담긴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더블샷'이란 냉장 커피 음료였다. 비교적 날로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지만 어찌 되었건 야자 시간은 열 시까지였고, 내가 다니던 '명문고'의 대학 진학률이 떨어졌을 때엔 한동안 열 두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이 의무화되었다. 강남이나 분당 등 '좋은' 동네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던 동기들은 그것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열두 시까지 남아 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집까지 걸어서 5분 거리였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열 시에, 혹은 심지어 오후 수업이 끝나고 여섯 시쯤 저녁 급식을 먹기도 전에 집으로 적당히 도망쳤다. 집에 와 집밥을 먹고, 스타크래프트 한 판 (혹은 다섯 판) 하고, 패밀리 마트에서 '에스프레소 더블샷' 두어 캔을 사 왔다. 여전히 아주 단 에스프레소 '음료'일 뿐이었지만, 제법 진한 커피의 맛이 신선했고, 정말 에스프레소 투 샷이 들어갔는지 새벽이 깊어가도록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새벽 1시쯤,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을 들으며 두 번째 캔을 까서 마시곤 했다. 그때엔 그때대로 불안했던 시절, 달달 씁쓸한 커피를 마시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유희열 씨의 변태 같은 징그러운 말들에 실실 웃으며 쉬었다. 참 좋은 음악들이 많았지만, <Be the Voice>나 <웅산>, <푸딩>, <Noveau Son/Deux> 등은 내 나름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시험 때문에 해가 새벽녘까지 공부했던 어느 겨울밤, 창문을 잠시 열어두니 정말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내 방을 채워 입김이 하얗게 날 정도였다. <Noveau Son> 첫 곡, <춘천 가는 기차>를 부르는 남예지 보컬의 음색에 위안을 받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잠깐 잠에 들었다가 여전히 맹맹한 '테이스터스 초이스' 인스턴트커피의 따스함에 감사하며 두어 시간 후 다시 학교에 갔다.


 커피를 처음으로 내려 본 것은 미국으로 대학을 온 뒤였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늘 커피를 퍼다 마실 수는 있었지만, 기숙사에서 도서관이나 강의실까지 가는 동선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간단히 기숙사에서도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때 가장 저렴했던 커피는 빨간 플라스틱 통에 든 <Folgers> 브랜드의 간 커피(ground coffee)였다. 커피를 내리는 것이 무슨 개념인지 몰랐던 나는 인스턴트커피와 같은 것인 줄 알고 뜨거운 물에 간 커피를 붓고는 딴에는 열심히 저어서 마셨다. 이상하게 아삭한 식감의 커피 가루가 질겅질겅 씹혔다. 왠지 이 커피 가루는 잘 녹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그제야 커피라는 개념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처음으로 종이 필터를 사서 그 싸구려 <Folgers> 커피를 내리며 보글보글 올라오는 커피 향에 '이게 커피를 내릴 때 나는 향이구나, ' 하고 처음으로 느꼈다. 한편으로, 세계 X위 안에 랭크된 대학에 오면 뭐하나, 삶에 이렇게 멍청한데 하는 생각이, 1갤런짜리 빨래 세제를 통째로 세탁기에 넣고 처음 빨래를 했던 때처럼 스멀스멀 드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주 치열했다. 학생들끼리 경쟁이 심하다기보다는 서로서로 열심히 도왔음에도 내가 죽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답을 알려줘도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의 장이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고,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렇게 공부를 하는 일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잠을 줄이고 줄여가며 공부를 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커피를 들이붓고도 수업을 다 마친 후 저녁을 먹고 나면 학교 마켓에 가서 스타벅스 에너지 드링크를 샀다. 이는 스타벅스 더블샷 에스프레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에 순수한 카페인이 별도로 더해진 데다 비타민이니 인삼이니 별의별 성분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초콜렛, 모카, 화이트 초콜렛, 종류별로 네, 다섯 캔씩 사다가 저녁, 밤, 새벽이 지나가도록 마시며 공부를 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몰아붙였는가 하면 생존에 대한 불안, 당연히 내가 최고로 잘해야 한다는 문화에 길들여진 나 자신의 압박감,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하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나는 똑똑하지 않았고, 적당한 데에서 벽에 막혔다. 지금의 나는 그냥저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며 살고 있고, 여기엔 하루에 한두 잔의 커피면 충분한 것 같다.


 오기와 카페인으로 버텨낸 대학교 1학년을 마친 뒤 인천 공항에서 오랜만에 한껏 끌어안은 여자 친구에게 포근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는 일주일 전쯤 지난 나의 생일 선물이라며 시집 한 권과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시집은 내가 읽으면 좋겠다며 그가 열심히 고르고 고른 따뜻한 시, 혹은 그의 마음을 녹여 쓴 시를 한 편, 한 편씩 담아 직접 기획, 구성, 인쇄하여 엮어낸, 이 세상 딱 한 권 존재하는 책이었다. 예쁜 상자 안에는 혹 깨질까 잘게 찢어진 종이 완충제에 폭 감싸진 두터운 연두색 머그잔이 들어 있었다. 다시 미국에 돌아왔을 때, 그 소중한 잔에 나는 항상 커피나 차를 담아 마시곤 했다. 힘들 때면 그의 시집을 꺼내어 한 편씩, 그리고 거기에 달린 그의 주석을 읽으며 기운을 차렸다. 그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의 '사용 매뉴얼'이 기술되어 있었는데, '여자 친구'에서 '아내'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비교적 많이 유연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맥이건 윈도우건 리눅스건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우여곡절 끝에 그가 '아내'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축복을 얻었고, 어쩌다 나와 그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면 나는 그의 시들을 읽으며 새삼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해 다시 떠올리곤 한다. 아내는 지금도 그 시집을 엮어낸 것이 '찐'사랑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그에게 그럴만한 것을 해준 것이 있나 늘 생각한다. 연두색 잔은 자주 쓴 만큼 커피와 차의 색으로 물이 들었다. 어느 날, 그 흔적을 지우려 끓는 물에 머그를 소독하는 동안 나는 잠들어버렸고, 너무나 속상하게도 물이 모두 증발한 뒤 전기 레인지의 열을 견디지 못한 잔은 깨지고야 말았다.


 늘 불안과 걱정과 싸우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수많은 대학원에 지원하였으나 대기열에만 들게 되어 괴롭게 1년이 넘게 기다리고만 있던 시절이 아마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이전의 쓴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여자 친구는 아직 '업그레이드'가 되기도 전, 그런 나를 유럽에 데려가 다양한 지역의 맛있는 음식들, 특히나 이탈리아의 피자를 나에게 먹여 주었다. 로마에서 머무르던 어느 날, 그는 어디에 가는지 이야기도 해 주지 않고 '누나만 따라오라'며 어디론가 걸었다. 두 달 생일이 빠른 그는 매년 그 간극 동안만큼은 누나 행세를 한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모카팟(Mokapot)을 고안한 비알레띠(Bialetti)의 스토어였다. 그 아이커닉한 모카팟이 색깔별, 크기별로 한가득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모카팟으로 끓인 커피를 먹어본 적도 없었지만 왠지 잔뜩 신이 났다. 필요에 의해서 마시기 시작했던 커피이지만, 어쨌든 실제로 그 맛을 아주 좋아했던 나에게 여자 친구가 또 다른 새로운 커피 세계를 선사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형형색색의 모카팟 사이로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은 'Brikka'라는 제품이었다. (요즘 유튜브 뒷광고로 말이 많으니, 왠지 이 글이 비알레띠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적어야 할 것 같다. 비알레띠가 나의 커피 생활을 후원해 준다면 나는 신이 나서 자랑을 했을 것이다.) 브리카에는 일반적인 모카팟과는 조금 다르게 커피가 올라오는 부분에 무게추가 달려있었는데, 그 덕에 수증기의 압력이 강하게 발달하여 진한 커피 크레마에 덮인, 마치 에스프레소와 비슷한 커피가 브루된다는 디자인이었다. 그때는 유행하지 않았던 단어지만 아내는 그렇게 나를 위해 'Flex'해 주었고, 나는 이 브리카 모카팟과 함께 매일 아침마다 멋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5년간 브리카 모카팟은 나와 아내에게 늘 꾸준하게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연구실 혹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때문에 하루 쉬는 날 없이 아침 일찍 밖에 나가던 시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나를 위해 아내는 깊은 밤 그가 자기 전 모카팟에 커피를 담아놓곤 내가 아침에 불만 켜면 커피를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그 덕에 모카팟이 올려진 스토브의 불을 켜기만 하면 나는 나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나간 후 일어나 마찬가지로 하루를 시작할 원동력이 필요한 아내를 위해 나는 나의 커피를 마신 후 그의 커피를 스토브 위에 올려둔 후, 그가 정성스레 싸 놓은 도시락을 챙겨 일을 하러 나갔다. 연애 초반, 아내의 엄마와 이야기를 하다, 선물을 안 주고 안 받는 것보다는 그래도 주고받는 것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라고 했던 나의 말에 그가 나의 아내에게 얘 괜찮은 남자 같다고 하셨다는 말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내 커피를 준비하고, 아내가 아내의 커피를 준비하는 일이 사실 가장 효율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커피를 준비하는 일에는 사랑이라기엔 간지럽지만, 분명하게 커다란 배려가 담겨 있다.

아내의 커피, 나의 커피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며 구조적으로는 아직도 강하지만, 물이 닿는 부분에 슬슬 알루미늄 녹이 슬어가는 것이 몸에 썩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브리카 제품을 찾으려 하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업이라는 것이 참 웃기게도, 물건을 너무 견고하게 만들면 소비자가 새로운 물건을 살 이유가 없게 된다. 그래서인지 비알레띠의 경영은 어려워져만 갔고, 마찬가지로 제품들 또한 찾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얼마 전, 아주 오랫동안 품절 상태였던 브리카 모카팟이 아마존에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당장 주문했다. 아내가 나에게 첫 브리카를 사 주었을 때부터의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참나, 그 감회가 새로워서인지 살다 살다 언박싱 사진을 찍게 되었다. 스타 유튜버가 된 기분이다.

 모카팟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물을 담는 아래쪽 챔버, 커피를 담는 깔때기, 그리고 커피가 브루되어 담기는 윗부분. 모카팟을 열 위에 올려 두면 수증기가 발생하고, 그 압력에 의해 뜨거운 물이 커피가루를 통과하며 커피가 브루된다. 브리카 모카팟은 위의 무게추 덕분에 더 큰 기압이 생성될 수 있게 하고, 이 덕분에 에스프레소와 가까운 형태의 커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에스프레소와 아주 비슷한 커피를 브루하는 데 있어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나 싶다. 비싸고, 관리도 쉽지 않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둘 생각이 아직은 없는 우리에게, 브리카는 오늘도, 내일도 아주 깊고 고소한 커피를 브루해 준다. 캠핑을 가서도 브루스타 위에 잠잠히 끓이고 있으려면 곧 향긋한 커피의 냄새가 올라온다.

새 브리카, 옛날 브리카

 요즘 시대에는 에스프레소는 한 물 가고 핸드 드립, 사실은 그 유행도 지나 콜드 브루가 대세인 것 같다. 그 트렌드를 파악했는지, 재작년 내 생일에는 아내가 블루보틀의 드립 커피 시스템을 선물해주었다. 드립을 하는 과정이나 필터를 거쳐 브루된 커피 특유의 개운함, 그리고 다양해진 커피 콩과 로스팅 방법만큼 확장된 커피의 맛 세계가 재미있다. 그렇지만 핸드 드립은 아무래도 품과 시간이 많이 들고, 필터도 써야 해서 아주 여유로울 때나 가끔씩 즐기게 된다. 빙글빙글 뜨거운 물을 따르며 올라오는 그 구수한 커피 향이 아주 근사한 것은 맞긴 하지만 말이다. 맥주의 아주 다양한 맛을 즐기는 것과는 달리, 아직 나는 커피의 다양한 맛을 즐기기는커녕, 잘 분간하지도 못한다. 둘 다에 푹 빠져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왕이면 맥주보다는 커피에 빠져 있었으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복잡한 산미가 담긴 요즘 핸드 드립이나 콜드 브루보다는 아직 나는 아주 깊게 로스팅되고 높은 압력으로 브루된 진한 에스프레소가 더 입에 맞는 것 같다. 내 부모의 세대에게 믹스커피나 인스턴트커피가 '국룰'이었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모카팟이 국룰이다. 그렇게 한 철 지난, 늙어가는 이의 입맛을 가지게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프린팅이 지워져 가면서도 단단하게 남아있는 우리 집 1세대 브리카는 점점 정겨워질 따름이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니, 한 1.5세대쯤 돌면 이 유물 같은 모카팟이 다시 '레트로' 열풍과 함께 인기를 끌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 뭔가 선물을 해주는 것은 아내밖에 없지만, 생각해보니 그의 선물 중 커피에 관련된 것이 유난히 많은 느낌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역으로 나는 그에게 늘 주방 기구를 선물해 주니 나도 그에게 맛있는 밥을 제공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해타산이 맞기에 이래도 저래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다섯 시 반, 새벽같이 일어났다.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잠시 클라이밍을 하러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잠에 취한 나는 게을렀고, 그깟 클라이밍이 뭐냐며 나를 침대에 묶어두려고 했다. 기어코 침대에서 기어 나와 모카팟에 물을 담고, 커피 가루를 담고, 스토브의 불을 3과 4 사이에 맞춰 두었다. 이를 닦고 나오니 치직, 소리와 함께 고소한 커피 향과, 탐스러운 커피 크레마가 올라왔다. 그 커피를 홀짝홀짝 한 모금씩 마시며, 차 안에 <보드카 레인>의 노래를 빵빵하게 틀어놓곤 붉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신나게 클라이밍을 하러 갔다.

 나는 때론 엄청나게 게으르고, 때론 제법 열심히 산다. 그 어떤 것이 나인가 하면 아마 둘 다 나일 것이다. 뇌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의 뇌의 네트워크 (Default mode network, DMN), 그리고 무엇인가 행동할 때 작용하는 뇌의 네트워크 (Executive network)가 별개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울증 환자에겐 DMN의 활성이 유난히 강해 자기 안으로만 파고들고,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얻기 어렵다고 한다. 때때로는 힘들고 우울해서 간단한 게으름이 아닌, 컨트롤할 수 없는 무기력증이 내게 찾아올 때도 있지만, 주로 이렇게 모카팟에 올라온 커피는 졸린 나를 깨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아내는 아마도 이를 알고, 내가 무기력에 잠식당하지 않고, 행동하며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모카팟을 선물해 준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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