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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ug 03. 2020

클라이밍의 기록

바위를 오르는 나를 바라보는 일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 (Bouldering)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나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것을 한다, 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싶어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바위를 오른 순간을, 그 주변의 풍경을, 나와 함께한, 내 목숨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그 경험을 담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봤자 거의 모두 뒷모습이다. 그것이 내가 내 모습을 보는 데 있어 적당한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요즘 핫하다는 유튜브, 나 또한 계정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딱히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 고양이들의 귀여운 모습이나, 캠핑을 갔을 때의 우리의 모습과 밤하늘의 타임랩스, 그리고 볼더링 경험을 담은 영상들을 저장하는 매체의 개념으로 이용하고 있다. 나에겐 영상보다는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즐겁지만 간간히 이렇게 모아둔 영상을 보고 있으려면 사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정보, 즉 시간의 흐름, 움직임, 소리를 통해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경험을 더욱더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 점이 좋다.

 볼더링의 본질은 어떤 바위의 낮은 부분부터 오르기 시작하여 바위 꼭대기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드물게는 짜릿하게도 한 번의 시도 만에 올라 '내가 지금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구나, ' 하며 자신감을 채울 수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떨어지고 다시 오르며 몸과 머리를 단련시키는 과정을 통해 때로는 몇 번의 시도만에, 때로는 몇 번의 세션에 거쳐, 때로는 몇 번의 계절을 거쳐 바위를 오르곤 한다. 그 사이 변화하는 빛의 색깔, 동행하는 사람들, 계절의 열기와 냉기,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엔 역시 영상이 가장 좋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그것의 흐름을 담을 수 있는 영상이라는 매체 다음 추가적으로 기록이 가능해질 수 있는 감각은 아무래도 냄새가 아닐까 싶다. 이것이 발달한다면, 언젠가는 내가 맡는 바람의 냄새, 풀과 나무의 냄새, 건조한 모래의 냄새, 까칠한 바위의 냄새, 뽀송하고 뜨거운 햇빛의 냄새, 안타깝게도 꼬릿꼬릿한 암벽화의 냄새도 담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정말로 오랜만에 자연 바위를 다녀와 새로운 클라이밍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목록을 보니 어느덧 올린 영상이 수십 개가 넘게 되었다. 그 김에 모처럼 내 채널을 훑어보고 있으려니 내가 올랐던 모든 바위, 그 상황이 아직도 하나같이 생생하다. 내가 오르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지 못한 바위들도 제법 있다. 언뜻 그런 바위들이 생각이 나면 그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아무래도 그 모습이 덜 선명하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그걸 올랐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조금씩 많아진다. 문제가 쉽건 어렵건, 나의 성취감이 어느 정도였건, 가능하면 영상을 남기고 싶은 이유이다. 나에게 바위를 오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하고, 나는 그 감정을 가능한 잊고 싶지 않다. 나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시간을 보낸 나에게 지금은 나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들이 찾아와, 나는 그 기록과 흔적을 최대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상을 찍는다.

Aquatic Hitchhiker, Bishop, CA

 클라이밍을 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일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낯선 부분이 있다. 정말 못 생기게 얼굴을 찌푸리며 바위를 붙잡고 쓸 데 없는 짓을 열심히 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제법 뿌듯하다. 쓸 데 없는데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바로 아마추어로서의 열정이 아니겠는가 하고 관대한 자부심을 부려보기도 한다.

 정말 차분하고 조용하게, 섬세하면서 부드럽고 동작으로 클라이밍을 하는 이들을 나는 동경한다. 그러나 동경은 동경일 뿐이고, 실제로 클라이밍을 하는 나의 모습은 거칠고, 투박하고, 잔 움직임도 많고, 감정적이다. 굉장히 소심해서 큰 소리 하나 못 내던 내가 클라이밍을 할 때엔 어찌 그리 소리를 잘 지르는지. 결정적인 무브를 할 때면, 그리고 그 무브에 성공하면 성공하는대로, 놓치고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꼭 크게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발견한다. 그 모습에 조금은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주변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내가 다음 돌멩이를 잡느냐 안 잡느냐에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게 된 내 모습에 말이다.

Angry Beaver, Tramway, CA

 어린 시절 뚱뚱하고, 아주 심한 곱슬머리였던 나는, 돼지니, 아프리카 사람 같다느니, 무다리라느니, 공부 열심히 해야 하게 생겼다느니, 혹은 한동안 키에 관하여 '루저' 발언으로 난리가 났을 때에는 내가 루저고 난쟁이니, 어깨가 좁은 '어좁이'니 외모와 체형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들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는 내가 시각적으로 기록되는 것을 꺼리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수련회를 가는 날이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았던 시절, 친한 친구들과 같이 놀러 갈 생각에 들뜬 나를 위해 엄마는 입고 가라며 백화점에서 그 당시 유행이었던 노스페이스 반팔 티셔츠, 쨍한 주황색과 세룰리안 블루가 배색된 녀석으로 사 주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학교 앞에 줄지어 세워진 고속버스 중 우리 반 버스에 오르니, 맙소사,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던 '일짱' 녀석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었겠는가. 순간 눈 앞이 아찔했는데, 귀에 박히는 소리는 더 아팠다. 너 같은 돼지 새끼가 우리 XX랑 같은 그런 옷 입는 게 말이 되냐며, 당장 찢어버린다며 따까리들이 별 지랄을 다 했다.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패거리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입학하기 몇 주전, 동네 놀이터에서 어쩌다 그들을 만나 농구를 했는데, 내가 까불랑 거리며 슈팅을 하고, 의외로 제법 골을 잘 넣었던 것이 맘에 안 들었으니 이제는 나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눈 앞의 담뱃불과 연기가 아주 무서웠다. 그러나 그 이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나를 그들이 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괜한 오기가 들어 그 하루 동안 잘 입고 있었다. 만약에 나에게 그런, 사실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방패마저도 없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나의 몸과, 나의 외형적 모습, 그리고 그것을 나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큰 불편함을 가지고 살았고, 아무리 더운 한여름 8월에도 긴바지를 입고 다녔다. 

Verdigo Boulders, Burbank, CA

 나의 그런 바디 이미지 (Body Image)를 개선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그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난데없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 중력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는 것처럼 그가 왜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여전히 잘은 모르겠으나, 그는 나를 많이 좋아해 주었다. 시간을 많이 감아, 아내는 내가 그때는 동글동글 곰 같은 부분이 귀여웠고, 지금은 가슴이나 어깨 근육, 복근이 생겨서 보기 좋다고 했다. 한편, 클라이밍을 하며 상체에만 집중하느라 가냘프게 된 하체는 별로라고, 같이 허벅지나 엉덩이 운동을 하자고 얘기한다. 하여튼, 그는 자신이 남자를 보는 데 있어 외형적인 부분이 그리 크게 차지하지 않는다면서도,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나 스타일을 내게 늘 얘기해 주었고, 이는 나로 하여금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취향을 형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나로 말하자면 처음에 그가 예뻐서 그에게 빠졌고, 여전히 나는 그가 예쁘다. 이 말을 하면 아마 아내는 '어휴 미쳤나봐, ' 하면서 자리를 피할 것이다.

 아내의 권유로 어쩌다 클라이밍에 빠지고 나서,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했던 그 어떤 것 보다도 열심히 클라이밍을 했다. 너무나 즐거워서 때때론 삶의 희열을 느끼며 실내 짐에서, 자연 바위에서 클라이밍을 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사람 치고는 제법 클라이밍을 잘하게 되었고, 게다가 클라이밍 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클라이밍 문화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많은 운동이 그렇듯 클라이밍을 할 때엔 몸의 움직임이 방해받지 않아야 하며, 손과 바위의 마찰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몸의 체온을 가능한 낮게 유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클라이밍을 하는 많은 이들의 옷가지는 짧고, 몸이 많이 드러나는 편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탱크탑, 혹은 민소매, 혹은 나시를 입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밝은 하늘색에 군청색으로 끄트머리가 마무리된 민소매를 입었던 나는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동네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서 축구를 하던 형들이 평소보다도 나를 놀렸다. '야 저 돼지 또 롤러 탄다. 저거 머리랑 겨드랑이에 돼지 털 봐.' 그들은 꿀꿀 소리를 내며 나를 실컷 비웃었다.

Green Peace, Tramway, CA

 클라이밍을 하는 데 있어 탱크탑은 당연한 개념이었고, 클라이밍이 아니더라도 팔을 들고, 겨드랑이와 겨드랑이 털이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탱크탑을 입었을 때 내 어깨의 자유로움과 온몸의 시원함,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옥죄던 어릴 적 경험, 그리고 거기에서 기인된 자기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에 왠지 마음이 아렸다. 이제는 나에게 수많은 탱크탑들이 있고, 예쁜 것이 보이면 꼭 하나씩 산다. 며칠 전,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르고 탱크탑을 입고 클라이밍을 하다가 피부를 시뻘겋게 태워버렸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름엔 탱크탑이다.

Crack, Stoney Point, CA

 어렸을 때엔, 맨살을 보이는 것은커녕, 옅은 색깔의 티셔츠를 입고 있으려면 내 젖꼭지의 음영이 비치는 것조차도 마치 내 잘못이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 같아 웅크리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탱크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의를 완전히 탈의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클라이밍 문화에서 그것은 제법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들은 흔히 상의 탈의를 하고, 여성들도 아주 적은 면적의 천으로 법적으로 가려야 할 정도로만 가슴을 가리곤 했다. 어떤 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좀차 되지 않는, 시도하던 V10 그레이드(등급)의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 그 그레이드의 문제로선 처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너무나 간절했고, 그를 위해선 뭐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입고 있던 탱크탑을 벗었다. 아주 더웠던 날, 10% 정도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으며, 300%의 해방감이 들었고, 5% 정도의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첫 V10 문제를 풀었다.

 최근 내가 오랫동안 팬이었던 여성 클라이머가 자신의 집에서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클라이밍을 하는 뒷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너무나 신선하고, 해방감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시대까지도 공공에서 여성이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는 것이 법적으로도, 통념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놀랍다. 남자의 젖꼭지는 괜찮고, 여자는 안 된다니. 덧글들을 보니 개판이었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고, 성상품화를 당하는 것이다라는 의견부터, 그렇게 자본주의적으로 만들어진 예쁜 몸을 공개하는 것은 남성에게 자신의 성을 파는 것이며 뚱뚱한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괴로움을 주는 일이니 금지해야 한다는 말까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이 났다. 나는 그의 클라이밍과 부상, 회복, 노력을 오랫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봐 왔고, 어쩌다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가 클라이밍을 하는 것을 보았다. 상의를 탈의했다는 이유로 그의 모든 노력이 그렇게 이념적인 쟁점으로만 치닫게 되는 모습에 슬퍼졌다.

Humping the Whale, Tramway, CA
Powerglide, Stoney Point, CA

 나는 아직도 내 몸이 아주 뚱뚱하고, 어깨가 좁고,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예전에 비하면 살도 많이 빠지고, 근육도 많이 생겼지만, 내 몸에 여전히 자신이 없다. 실제로 내가 클라이밍을 하는 그레이드를 하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나는 배도 볼록하고, 근육도 부족하며, 애초부터 키가 작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내가 이렇게 부정적인 바디 이미지에 빠져들 때마다 아내는 10년 전 내 사진을 보여준다. '야, 진짜 그때 나 츄파춥스였구나' 하고 왠지 웃음이 나면서 다시 내 영상을 보면 나 또한 나름대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시 깨닫게 된다. 상의를 탈의한 모습을 자랑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몸을 가진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세상 모두가 나름대로의 육체적 노력을 해야한다고 강요하려는 것도 아니며, 역으로 어마어마한 자기 관리로 조각같은 몸을 보여주는 이들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상품화를 한다'며 까내리려는 요즘 흔히 보이는 생각은 내게 더더욱, 전혀 없다. 내 영상을 찍는 것은 그저 내가 내 몸을 조금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내 이런 모습에 불편함을 느낄 것인데, 그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이 정도면 되었지, 그리고 내 몸인데 뭐.

Scatterbrain, Joshua Tree, CA

 나에겐 타투가 있다. 내가 탱크탑을 입거나, 아예 윗옷을 벗고 클라이밍을 하는 영상을 찍을 때나 볼 수 있는 타투다. 요즘 말로서나 타투지, 문신이다. 어릴 때엔 문신을 한 인간들은 다 조폭이나 양아치인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문신을 하게 된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지만, 나에게도 오랜 시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문신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여전한 것 같다.

 타투를 하는 놈들은 다 '배달이나 하다가 치킨 닭다리 하나씩 빼먹는 쓰레기'라는 글을 보고 조금은 속이 쓰렸다. 인터넷 글이 뭔 대단한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생채기도 상처다. 그 글에 확 화가 나서, 나는 타투가 있고, 대학원생이라고 받아칠 뻔했는데 잘 참았다. 인터넷 밈 상으로는 대학원생은 인생 선택을 잘못한 불쌍한 노예일 뿐이니, 그렇다면 나는 등짝에 문신이나 새긴, 배달이나 하다가 치킨 닭다리 하나씩 빼먹는 쓰레기같은 노예 대학원생이 될 것이었다.

 나는 대학원생이다. 진보적인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만큼 동기들 중에도 타투가 있는 이들이 정말 많다. 인터뷰를 하러 왔을 때 교수의 손가락에 타투가 있는 것을 보고선, 여기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학교에 다니면서 보니, 온 팔에 슬리브 타투를 한 동기를 보곤 정말 아프고 비쌌겠는데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꼭 하고 싶은 타투가 있었다. 몇 년간을 디자인에 대해, 위치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타투를 받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젬병인 그림 실력으로 그린 두루뭉술한 도안을 한동안 갖고 있었고, 캘리포니아에 이사를 오자 마자 나는 타투 상담을 받으러 갔다. 조금은 무서운 마음이 있었으나, 내 디자인을 받아본 타투 아티스트는 반갑게 맞이해 주며 여러 차례 수정을 해 주었다. 자신의 위생 관리, 타투 후 관리법 등을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 주는 모습에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결정을 내리곤 나는 타투를 새겼다. 생각했던 것처럼 아프지는 않았으나, 40분 정도 계속하여 콕콕 찌르는 바늘에 나는 식은땀을 한껏 흘리며, 읽으려던 책을 한 장도 넘길 수 없었다.

Square Dance, Tramway, CA

 나의 여자 친구는 내가 커다란 나무 같다고 종종 얘기해 주었다. 나는 그를 위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우울감에 빠져 사는 내가, 그를 위한 단단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참 철없고 섣부른, 곧 후회할 결정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 년을 고민한 후, 아마 이 타투를 새기는 것이 나의 마음을 강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투를 하고 여자 친구의 엄마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네에 앉은 애는 얘라기엔 좀 통통한 것 아니니, 하고 말해 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너무나 웃음이 났다. 요즘은 당당히 말하는 편이다. 사실은 아주 약하고 불안정한 나지만, 나는 아내가 싱그럽게 그네를 탈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다고. 아내는 말한다. 뭐, 혹시 우리가 어쩌다 헤어지게 되면 적당한 다른 의미를 부여해 보라고. 그때까지 나는 그와 함께 살아갈 커다란 나무가 되어보려고 노력 중이다.

 내 클라이밍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내 등 뒤의 나무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는 나를 위해, 나는 그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 왔던가. 항상 이것을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개인의 의지를 쉽게 쓸어가 버리는 법이다. 항상 눈 앞에 보여 익숙해지다 못해 무뎌지게 하지는 않으면서, 이렇게 간간히 나의 의식을 파고 들어와 내가 그리던 이상을 일깨워주는, 내 클라이밍의 기록 속 나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타투는 내일도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힘을 내게 해 주는 것이다.

Brian's Project, Bishop, CA

 나의 클라이밍 영상에 담긴 나는 거의 대부분이 뒷모습이지만, 성공적으로 바위를 오른 후 그 위에 돌아 앉아 그 순간을 만끽하는 장면이 찍힐 때가 가끔 있다. 숨을 몰아쉬며 몇 미터 위의 풍경을 즐기는 나는 내가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활짝 웃곤 한다.

 언젠가 아내가 나에게 얘기했다. 나에게 드물었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좋아 늘 캡쳐를 해 둔다고. 나는 내가 늘 아내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그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말했듯, 나에겐 활짝 웃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그와 같이 별을 보고, 그와 함께 고양이를 돌보고, 그와 함께 캠핑을 하고, 그와 클라이밍을 하면서 나는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웃음을 본 나는 조금 더 활짝, 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웃을 수 있게 되어간다.

 COVID-19 사태가 손 쓸 수 없게 되기 바로 직전 3월 초, 우리는 마지막으로 Bishop에서 클라이밍을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의 프로젝트를 끝냈고, 나는 나대로 최고 그레이드 문제를 푸는 등 닥쳐올 암울한 시기는 예상치 못한 채, 혹은 예상이 되니 이번만큼은 정말로 즐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신나게 클라이밍을 했다. 그 중 Brian's Project(V8)는 내가 몇 년간 시도했던 문제로, 너무나 파워풀한 문제라 찾아갈 때마다 대여섯 번 정도 시도하고 나면 근육이 풀려버리곤 했다. 그 날도 한 일곱 번쯤 시도를 했고, 그 끝무렵 거의 모든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바위를 덥히던 햇빛을 마침 구름이 감싸주었고, 그간 따스해졌던 공기가 무색하게 여전히 눈덮인 산 너머 귀를 에이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이구나, 이게 마지막이구나, 라는 생각에 카메라는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사실 영상을 찍는 일은 배터리나 용량 때문에 한 번 시도를 할 때마다 카메라를 껐다 켰다, 녹화를 시작했다 멈췄다,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내 안에 남은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을 모아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떨어지기만 했던 그 무브를 했을 때, 이번만큼은 나의 몸은 여전히 바위를 붙잡곤 허공에 떠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귓속에 들리는 심장소리에 숨을 깊이 쉬곤 바위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몸을 돌려 앉아 비숍의 어마어마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찬 바람이 나의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혀 주었다. 영상을 찍지 못해 아쉬웠지만, 나는 몇 년을 오르려 노력하던 바위 위에 앉아 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카메라를 들어 나의 그 모습을, 활짝 웃는 나의 모습을 찍어 주었다.


 그렇기에 아마 돌아오는 주말에도 나는 나를 영상에 담기 위해 굳이 무겁게 카메라와 고프로를 가방에 담고, 얼린 맥주 몇 캔을 담고, 크래시 패드 두 개를 메고 내가 오르고자 하는 바위를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언덕길을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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