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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Oct 29. 2020

아폴로 버거 이야기

지도 속에서 발견한 내 작은 세계 안 최고의 버거

0.


 나는 어릴 적부터 지도를 보는 일을 좋아했다. 문 두드리듯 두드리면 경쾌하게 '통통' 소리가 나던, 은은한 나무 냄새와 함께 기억되는 지구본을 매일같이 빙글빙글 돌려본 것은 물론이며,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서울과 지방을 왔다 갔다 할 때면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커다란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훈수를 두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을까, 우주 배경에 지구가 그려진 사회과 부도 교과서를 받았을 때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빳빳한 새 교과서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책을 열어 보면 내가 가 본 적 없는 수많은 곳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그저 반짝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수업에선 별로 쓸 일이 없었지만 나는 그 사회과 부도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여다보며 가지고 있었다.


 네이버 지도 서비스에 대해 알았을 때에는 미래가 찾아온 것만 같았다. 지하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아빠가 운전을 하건 가야 할 길을 알아서 다 알려주다니. 조금 지나서는 심지어 '로드뷰'가 가능해졌다. 길을 따라, 골목 따라 거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그래서 중학교 시절의 나는 네이버 포털에서 지도와 경로를 프린트해 길을 찾아가곤 했다. 지도를 좋아하는 것 치고는 아빠, 엄마 동생과는 다르게 굉장한 길치였던 나이기에 그렇게 준비를 해도 한참 헤매곤 했다.


 치열하며 작은 세계에서 외로움과 부질없음을 느끼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우연히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을 같은 반 동기를 통해 별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우연을 통해 그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동갑내기 별지기를 알게 되었고, 별에 관심 있는 우리가 다 같이 별을 볼 기회를 주선했다. 나와 친구, 그리고 그의 남자 친구는 이미 오후 일찍 만나 저녁 느지막이 도착할 그들의 친구를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진 시간, 버스 정류장에 내린 그 친구가 이 쪽으로 걸어왔다. 살짝 경사진 언덕을 올라오는 그는 천천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 까만 뿔테 안경, 밤색 스웨터, 청바지, 그리고 등산화. 나는 이미 그때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 양 끄트머리에 살았던 내가 언제 다시 그와 만날 수 있을지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다만 서로 알게 된 네이버 블로그에서 덧글이나 안부 게시판을 통해 시시콜콜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는 의외로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그와 같이 <EBS 스페이스 공감>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던 친구가 펑크를 내어 표가 남았는데 혹 관심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연을 보기 전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 당시 온 동네 파스타 집을 쏘다니던 나는 매봉역 EBS 근처 <소렌토>에 갔던 기억이 나 이를 제안하였다. 길치인 나는 이미 가는 길을 잊어버렸지만, 세상은 그새 조금 더 발전하여 3G 데이터 통신망을 통해 핸드폰으로 지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나는 A4용지에 경로를 인쇄 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매봉역 입구에서 만나 당당하게도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라이터를 모티브로 한 <듀퐁>이란 3G 핸드폰 작은 화면 안, 픽셀이 하나하나 보이는 듯한 지도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가려던 <소렌토>로 그를 이끌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메뉴를 시켰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렌토>라면 까르보나라, 아마트리치아나, 까망베르, 아니면 알리오 올리오, 이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친구는 새우가 올라간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의 <소렌토>와는 달리, 매봉의 <소렌토>는 강남이라 그런지 껍질을 까지 않은 통새우를 올려주었다. 그는 가만히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새우 깔 줄 알아?'

 제법 당황한 나는 어버버 거리며 깔 줄 모른다고 답했다. 젓가락으로 집어 먹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해 주던 엄마 덕분에 고등어 가시도 바를 줄 모르는 나였다. 그래도 그는 제 나름대로 새우를 잘 까먹었고, 우리는 신나게 <스테랑코>의 공연을 보고, 편의점 앞 계단에 앉아 맥주를 한 캔씩 까서 마시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에게 아주 소중한 관측 장소이자 그의 삶의 커다란 일부인 지리산 자락으로 나를 초대해 주었고, 우리는 같이 별을 보게 되었으며,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릴 적 지방에 살던 나는 서울 할머니 댁에 가려면 평소엔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몸살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떤 날, 부모님과 나, 동생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해 김포 공항에 내렸고,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지하철을 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개찰구 너머를 향해 달려가다 자동 개폐식 빨간 플라스틱 가림판 한 쌍에 정통으로 얼굴을 한 대 맞았기 때문이다. 인과 관계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 날부터 나는 지하철이라는 개념에 굉장히 매료되었다. 역마다 매표소 위에 대문짝 하게 붙어 있던 노선도를 보는 것이 좋았고, 창구 앞에 배치되어 있던, 주머니나 지갑에 쏙 들어가도록 세 겹, 혹은 네 겹으로 접히던 휴대용 노선도는 늘 하나씩 챙기곤 했다. 그러다 못해 알록달록하고 복잡하게 얽힌 수도권의 지하철 역들을 하나씩 모두 다 가 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나는 고등학교 시절엔 실제로 혼자서도 많이 다녔고, 연애를 하면서 둘이 온갖 데를 더 쏘다니다 못해 심지어 굳이 안 가 본 역을 찾아가 걸어 다녀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굉장히 훌륭하게도) 수도권에는 이미 지하철 역이 너무나 많았는 데다 내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조차도 지하철 역이 두어 개씩 더 생길 정도로 계속 노선은 늘어나 나의 원대한 꿈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지하철 노선도도, 축척 50,000:1의 지도도, 시거잭에 꽂아 사용했던 '내비'도 모두 스마트폰 안, 그리고 그 안의 구글 맵 등의 지도 시스템으로 통합되어 보편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세상의 빛나는 발전에 발맞춰, 새우 깔 줄 아냐고 묻던 그는 이제 새우는 물론이고, 곱창이나 막창, 족발도 손질하고, 닭을 발골하고, 통 양지나 삼겹살, 목살 등 큰 덩어리 고기도 직접 썰어 내고, 고등어 머리도 자르고, 연어를 손질하고, 멸치를 다듬고, 오징어도 분리해 내고, 선지도 만진다. 그리고 나에게 고등어 가시 발라내는 방법을 알려 준다. 나는 뭘 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매일매일 이런 그를 바라보며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구글 맵은 대단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담겨 있다. 도심의 거의 모든 길의 -- 때로는 심지어 가게 안의 -- 로드뷰를 볼 수 있고, 상점이 열렸는지 닫았는지, 언제 가장 바쁜지, 그 주변 주유소 기름이 얼만지 등등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한편, 구글 맵은 나로 하여금 방구석 여행자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나는 가끔씩 뜬금없는 곳, 이를테면 남극이라던지, 그린란드라던지, 서해 다도해 해상공원 홍도라던지 등의 로드뷰를 한참 들여다본다. 가끔은 그냥 사진일 때도 있고, 운이 좋으면 360도를 둘러볼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면, 세상의 넒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조그마한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며 두근거림과 평온을 얻곤 한다. 언젠가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찾아가는 기회를 꿈꿔보면서.


 한편으로는 인공위성이나 GPS 등 엄청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을 이용해 거의 모든 부분이 기록된 이 세상에서 일개 개인인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가능성은 날고 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인 손오공 마냥, 손바닥만 한 핸드폰 안 구글 맵 어플리케이션 안에 가두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묘한 무력감이 들 때도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 정도로 인류적인, 공적인, 보편적인, 객관적인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이젠 실제로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설령, 예를 들자면, 구글 맵이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경험한 뾰족뾰족한 나무들과, 황량한 사막과, 그 사이에서도 열심히, 아름답게 핀 꽃들과, 장엄한 바위는 나의 개인의 세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엔 미지를 탐험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세계 속에서 조슈아 트리는 처음으로 말을 타본 경험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상형 문자나 지형, 지질 등을 직접 보며 관찰하며 그만의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많은 개인들의 경험의 집합체는 결국 다시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대한 공적인 정보에 다양한 방면으로 조금씩, 조금씩 살을 붙여나가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나에게 지도라는 추상적인 개념, 혹은 구글 맵이라는 구체적인 도구는 나에게 세상의 멋진 것들의 존재와 그에 대한 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내가 직접 찾아가 경험을 하며 나만의 미지를 개척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구글 맵마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길을 떠나곤 한다.


 요즘은 클라이밍을 위한 캠핑, 혹은 단순히 캠핑을 위한 캠핑도 종종 하지만, 별을 보며 만난 우리는 본디 별을 보기 위한 캠핑을 많이 해 왔다. 천체를 관측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두운 하늘을 찾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고, 별 보기 명소로 알려진 곳들, 예를 들면 조슈아 트리 같은 곳은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캠프 사이트들에서 흘러나오는 잔 불빛 때문 관측이 썩 만족스럽지 않기에 피해야 한다. 그래서 원하는 장소를 찾기 위해 우리는 구글 맵 기반으로 한 광해 (light pollution) 지도를 들여다보며 어두운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 그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우리가 접근할 수 있을만한 캠핑 가능한 장소를 물색하곤 했다. 


 그렇게 찾게 된 Eastern Sierra의 한 곳은 우리의 영혼의 캠프그라운드이자 별 보러 가는 곳이 되었다. 해발 8,800ft(2,700m)에 자리 잡은 캠프그라운드는 대기의 영향도 덜 받고, 주변에 큰 도시가 없는 데다 온통 산에 둘러싸여 아주 어두웠고, 저 멀리 7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는 높은 산맥이 별빛에 아름답게 빛났다. 

 관리되는 캠프 사이트들 뒤로 이제 더 이상 그 구글 맵에도 표시되지 않는 제법 울퉁불퉁한 오프로드 길을 따라 더 산 깊숙이 들어가면 백컨트리 (Backcountry) 캠프 사이트들이 듬성듬성 흩뿌려져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둘만이서, 푸른 숲 속에서 별을 보고, 낮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어떤 때엔 무작정 한참 걷다가 언제 쓰였는지도 모르는 갱도의 입구도 발견하기도 하고, 더 걸어 들어가 막다른 숲길의 끝에 포근히 자리 잡은 캠프 사이트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지반은 고르고 평평했으며 파이어 링은 돌로 곱고 단단하게 쌓아져 있었고, 언제부터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장작들 위로 나뭇잎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어떻게 세웠는지도 모를 엉성한 간이 테이블로부터 마치 집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구글 맵의 도움을 받아 캠프그라운드를 찾고, 우리만의 추억을 쌓고, 구글 맵도 모르는 미지의 정보까지 알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심심할 때면 한 번씩 지도를 들여다보며 두근거리곤 한다.





1.


 우리가 <아폴로 버거>를 만나게 된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으로 별 캠핑을 떠났을 때였다. 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우리는 관측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때엔 망원경을 싣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작은 경차, '용식이'를 몰았기에 캠핑 장비까지 싣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후 늦게 두어 시간 정도 되는 곳에 가 새벽까지 별을 보고 해 뜰 때 즈음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자곤 했다.


 반나절 당일 밤치기로 별을 보러 다니는 것이 점점 피곤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별 보는 것과는 별개로 점점 캠핑에 대한 욕구가 커져갈 때쯤, 아내가 어쩌다 알게 된 친구와 함께 셋이서 캠핑 트립을 떠나기로 했다. 그 친구의 차 또한 일반 승용차였기 때문에, 우리는 큰 마음을 먹고 SUV 한 대를 렌트하여 신나게 망원경과 캠핑 장비로 채워 넣은 뒤 길을 떠났다. 광해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며 우리가 가기로 결정한 곳은 너무 멀지도 않으면서 그때까지 우리가 본 하늘들보다는 훨씬 어두울 것으로 예상되는 Amboy라는 화산 분화구 지역이었다. 지금이야 여섯일곱 시간도 아무렇지 않게 운전을 하고 다니지만, 그땐 처음으로 LA에서 세 시간 반 정도 거리를 떠나는 길, 우리도 차도 재충전하고, 점심도 먹을 겸 중간에 어디 멈출 곳이 있나 찾아보기로 했다. 


 구글 맵을 이리저리 스크롤해보려니 Angeles와 San Bernardino 두 개의 National Forest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사가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펼쳐지는 고지대 사막 지역(High Desert)의 도시, Victorville이면 적당히 중간지점인 것 같았다. 확대한 지도 위로 스쳐 지나가는 무난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버거집이나 피자집, 멕시칸 레스토랑들 사이로 유난히 평점이 좋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아폴로 버거>였다. 로드맵 상으론 간판도 건물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것이, 왠지 '맛집'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에겐 제대로 된 웹사이트도 없이 페이스북 페이지만 존재했는데, 들여다보니 매일같이 소고기 덩어리를 직접 갈아 패티를 만들고, 버거 번도 직접 구워 아주 클래식하고 심플한 버거부터, '오프 메뉴'로서 어니언링이나 파스트라미, 할라뻬뇨, 블루치즈, 칠리 등등이 올라간 별의별 모던하고 심지어 아방가르드한 버거까지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런 버거집에 가 보게 되는 것이 별을 보고 캠핑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찾아간 빅터빌의 아폴로 버거, 로드뷰에서 봤던 것보다도 더 눈에 띄지 않아 두어 번쯤 지나친 후에야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패티 구워지는 냄새가 물씬 풍겨와, 차라리 창문을 내리고 있었더라면 더 금방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도 내 머릿속에 있는 '미국'이란 이미지 그대로였다. 유난히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섞여있고, 유난히 운동도 많이 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LA와 달리, 이 작은 중산층 지방 도시의 버거집에는 정말 덩치가 커다란 백인이나 히스패닉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우리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시선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이, 다들 그 맛있어 보이는 버거와 프라이를 먹느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며 침을 흘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주문을 해 놓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다시 보아도 정말 평범한 인테리어에, 바깥에는 황무지 사막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미드 CSI (라스베가스 편)의 광팬인 아내는 이런 곳에서 범죄 해결의 실마리가 나온다고 했다.

 나르시시스트(Narcicist)라는 커다란 버거에는 두툼한 패티 두 장에 베이컨이 네 장, 그리고 체다 치즈 네 장이 올라가 있었다. 자기애를 온전히, 혹은 과하게, 담아낸 '버거'의 개념 그 자체였다. 아주 어렵게 커다란 한 입을 베어 물었더니 직접 갈아 만든 패티에 오롯이 담긴 고소한 육즙과 살아 있는 식감, 바삭한 베이컨의 짭짤함과 감칠맛 사이로 느껴지는 사각거리는 지방의 식감과 파괴적인 맛,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체다 치즈의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 버거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구나.


 버거를 두 개를 시킬까 하다가 하나만 시키고 사이드를 두 개를 시킨 것은 주문을 하기 전 다른 테이블을 한참 둘러보고 있으려니 맛있어 보이는 사이드 메뉴가 너무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프라이 류가 어찌나 영롱해 보였는지, 우리는 그중 감자 프라이와 어니언링을 주문했다 그 당시 갓 개발해서 테스트해보고 있다는 다양한 갈릭 아이올리와 할라뻬뇨 마요네즈는 덤이었다. 튀김이야 어떻게 해도 맛있다고 하지만, 갓 튀겨 나온 프라이와 어니언링은 정말 바삭하고 뜨거웠다. 간은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고, 직접 만들었다는 디핑 소스들과의 궁합도 굉장했다. 버거도 버거지만 이 곳의 사이드는 꼭 하나씩 다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디핑 소스들은 곧 당당히 정식 추가 메뉴에 포함되게 되었다.


 배 터지게 버거와 프라이를 먹고 한 시간 반쯤 더 달려 도착한 앰보이 (Amboy) 분화구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 저 멀리까지 펼쳐진 노란 모랫빛 평지, 간간히 흩뿌려져 있는 아스팔트 빛 현무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새파란 하늘과 함께 우리를 반겨 주었다. 이 넓디넓은 사막에는 나무는커녕 아주 작은 풀들만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적막, 황폐, 공허라고 하기엔 기분 좋은, 긍정적인 비어있음이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소리 외엔 마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은 거의 완전한 정적과 고요는, 그 아무것도 없음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잠시 뒤 그 정적을 가른 것은 딱딱딱, 돌을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열려 있는 트렁크 사이로 까만 반사 망원경이 보이는 은색 세단 앞에 레게 머리를 한 조그마한 아이가 앉아 돌멩이들을 만지작거리다 딱딱 맞부딪히다 하면서 놀고 있었다. 일단 트렁크 속으로 보이는 망원경이 반가웠는데, 지역 천체관측 그룹이 간간히 정모를 하는 곳이라더니 확실히 여럿 이들이 망원경을 세팅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지간한 차 값은 나올 것 같은 장비들도 있었다. 별을 보는 곳으로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이가 돌을 딱딱거릴 때마다 풍채가 커다란 그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화석'이 망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화석? 자연스레 눈썹이 올라가며 궁금해져 그에게 말을 걸었다. '브랜던'과 그의 아들 '제이미슨'은 그들의 컬렉션을 보여 주었다. 크고 작은 돌들에 신기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진짜로 화석이었다. 뭔지 모르겠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히 조개껍질의 무늬나 다리 여럿 달린 갑각류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한동안 신나게 화석 얘기를 해주던 브랜던은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왔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도 망원경을 가지고 관측 겸 캠핑을 하러 나왔다고, 안 그래도 당신네 트렁크의 망원경을 보니 반갑다고 대답했다. 그 또한 반가워하며, 여기도 나쁘지는 않지만 불도 못 피우고 텐트도 펼 수 없어 캠핑하기는 썩 좋지 않다고 얘기해주었다. 대신, 15분쯤 더 깊숙이 들어가면 보여준 화석들이 널려 있고, 하늘도 훨씬 더 어둡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불도 피우고 자유롭게 캠핑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같이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옛 개척 시대 시절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던 66번 옛 국도를 따라 그의 차 뒤를 달리고 있으려니, 점점 길이 울퉁불퉁해지다 못해 더 이상 정비가 되지 않는 흙길을 따라 폐허가 된 고스트 타운마저 지나 아무것도 없는 곳 안쪽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아내는 이거야 말로 CSI의 스토리라인이 아니냐는 농담을 했다. 겁대가리가 없었다면 없었고, 좋게 보자면 인간의 선의를 믿었던 우리였다. 유난히 세상이 험악한 지금이었다면 그렇게 제법 위험한 지대에서 뜬금없이 만난 사람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는 선의를 가진 이들이 더 많다고 아직도 믿고 싶다.


 그러나 브랜던은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만난,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자기가 비밀스럽게 알고 있던 멋진 장소를 알려주는 커다란 선의를 베푼 것뿐이었다. 도착한 곳에는 그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뒤로는 민둥성이 돌산들이 보였는데 거기가 바로 그가 화석들을 수집하는, 내가 어릴 적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그 '캄브리아기'의 '삼엽충' 화석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고 했다. 참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 고독함은 커다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브랜던!

 사막의 밤공기는 따뜻하고 건조했다. 하늘은 정말로 어두워서 어지간한 데에선 망원경으로도 보기 어려운 대상들이 맨눈으로도 보였다. 66번 국도와 함께 미국의 번영에 기여를 했을 동-서 횡단 철도를 따라 간간히 지나가는 기차의 소리가 어째서인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했다.

 밤새 관측을 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든 우리는 금방 찾아온 사막의 뜨거움 때문에 금방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럼에도 일이 있어서 일찍 먼저 가야 한다던 브랜던은 이미 떠난 후였고 우리 차 와이퍼 아래에는 그가 그 와중에도 정성스럽게 그려 놓은 지도가 꽂혀 있었다. 우리에게 삼엽충 화석이 발견된다는 지역을 알려주고자 구글 맵도 아직 모르는, 브랜던 그 자신만의 지도를 우리에게도 공유해준 것이었다.





2.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우리는 첫 관측 캠핑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다시 또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바깥으로 나가 밤새 별을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매번 렌트를 할 수 없는 일, 우리에겐 큰 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적당한 SUV를 찾아 한 열흘 정도 중고차 시장을 헤매었고, 모아둔 돈, 있는 돈, 없는 돈, 그리고 대출을 끼곤 무턱대고 차를 사 버렸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겁 없이 욜로적 선택들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선택으로 한동안은 백 불대의 잔고로 아슬아슬하게 가슴 졸이며 살던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포포'는 나와 아내를 별, 캠핑, 클라이밍으로 가득 찬 찬란한 장소와 시간, 경험으로 데려가 주었다.

'용식이'와 '포포'

 '포포'를 새 식구로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금요일, 우리는 그리하여 다시 Amboy로 향했고, 물론 가는 도중 아폴로 버거에 들렀다. 이때 또 새로운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금요일에만 파는 사이드 메뉴, 테이터 밤 (Tator bomb: 감자볼 튀김)이었다. 이전에 왔을 때엔 토요일이어서, 기필코 다음엔 금요일에 와 먹어보겠다고 별렀던 것이었다.

Boss Hog: 파스트라미가 올라간 버거

 패티 두장에 패스트라미까지 올라간 여전히 압도적인 버거에, 사이드로 테이터 밤을 두 세트나 시켰다. 갓 튀겨져 나와 너무 뜨거워 집기도 어려운 녀석들에게서 바삭바삭한 아우라가 잔뜩 뿜어져 나왔다.

 테이터 밤의 바삭바삭한 튀김 껍질 안쪽으로 폭신폭신하고 뜨거운 감자가 진득한 체다 치즈와 매콤한, 아니, 간간히 '스읍-하' 할 정도로 매운 할라뻬뇨 렐리쉬를 품고 있었다. 

Bomb Bay: 어니언링이 들어간 버거
Creaminal: 크림치즈와 할라뻬뇨가 들어간 버거 | Fun Guy: 마늘 버터에 볶은 버섯과 양파 튀김이 올라간 버거

 그 훌륭한 밸런스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테이터 밤 때문에 우리는 아폴로 버거를 계속 찾게 되었다. 가능하면 금요일에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의 버거는 언제나 참신한 시도가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였다. Boss Hog란 녀석은 가뜩이나 두터운 패티 두 장 위에 파스트라미까지 얹어 무지막지한 고기의 힘을 보여주었고, Bomb Bay란 녀석은 달달하고 바삭한 어니언링이 인상 깊었다. Creaminal이란 녀석은 매콤한 할라뻬뇨에 부드럽고 고소한 크림치즈가 더해져 아주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한편, 그 날은 정식 메뉴도 아니고, 오프 메뉴도 아닌, 막 개발해 본 새로운 메뉴가 입간판에 분필로 적혀 있었으니, 바로 Fun Guy라는 녀석이다. 이름의 말장난(Fungi: 버섯)에서 알 수 있듯, 마늘 버터에 볶은 버섯과 양파 실튀김이 올라간 버거였는데, 버섯을 정말로 좋아하는 아내는 잔뜩 신이 나서 이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 Fun Guy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버거라고 늘 얘기한다.


 이렇게 Amboy에서 캠핑을 하러 갈 때마다 우리는 아폴로 버거에 들리곤 했으나, 우리의 캠핑 반경이 넓어지며 그럴 일은 점점 줄게 되었다. Amboy의 적막함은 아주 멋지지만, 테이블도 없고, 그늘도 전혀 없고, 낮 동안에 할만한 것도 마땅히 없는 데다 안타깝게도 그곳의 밤하늘은 점점 광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사막 지역이지만 땅 깊숙이 흐르는 수맥이 발견되었고, 이 지하수를 LA 주변 도심으로 보내기 위한 파이프를 설치하려는 거대한 사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에 다양한 건물, 시설이 천천히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는 조명이 늘어남을 의미했다. 이렇게 점점 찾아가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가 열심히 캠핑을 다니기 시작하게 된 곳이기에, 브랜던이란 재미있는 사람을 알게 된 곳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도중에 잠시 들러 아폴로 버거를 먹으러 갈 수 있기에 Amboy는 항상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3.


 그 이후로 정말 많은 곳을 여기저기 다녔음에도 Amboy를 갈 때가 아니면 아폴로 버거가 동선상에 있을 일이 도저히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씩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보면서 침만 흘리다가 정말 오래간만에 찾아가게 된 것은 COVID-19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며 락다운 행정명령이 내려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전, 한동안의 마지막 캠핑이 될 것이란 직감을 하고 떠나기로 한 곳은, 빅터빌을 지나 북쪽으로 40분쯤 떨어진 캠프그라운드였다. 


 무엇을 닫아야 하고, 무엇은 열어있을 수 있는지 중앙 정부와 주, 지자체가 갈팡질팡하던 때, 아폴로 버거는 테이크아웃 주문만 받고 있었다. CSI 드라마 안에서 범죄를 모의할 것 같던 테이블들 위로는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청소할 때처럼 휑하게 의자들이 올라가 있고, 그 바깥으로 바리케이드마저 쳐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 안에서 기다리던 손님들의 시선이 온통 우리에게 쏠렸다. 굉장히 차갑고 불편한 시선이었다. COVID-19에 대한 기본적인 불확실성과 불안으로부터 나오는 배타심에 세계 최강국의 수장이 이를 '중국' 바이러스로 지칭한 것이 더해져, 가뜩이나 동양인들이 적은 동네의 버거집에 있는 우리가 썩 달갑게 느껴질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당당하게 카운터에 가 주문을 했다. 가족이 운영한다는 아폴로 버거의 직원들은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굉장히 친절하여 늘 고마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 기다리던 손님과 다르게 --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손님을 응대하는 데 있어 프로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먹는 아폴로 버거는 역시나 감격스러웠다. 좋은 재료에 충실한 기본기, 그리고 폭발적이고 창의적인 시도가 담긴 버거. 마침 금요일이라 시킨 테이터 밤은 여전히 최고였다. 실내에서 먹을 수 없으니,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차 옆 길바닥에 앉아 먹는 버거는 우습게도 너무나 맛있었다. 내가 나이가 들면 '라떼는 말이야... 2020년에는 길바닥에서 버거를 먹었어'라고 얘기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정말 지긋지긋하게 갇혀 있었다. 캠핑도, 클라이밍도, 별보기도, 평범한 운동도 할 수 없어 지치는 몇 달의 시간을, 원체 집을 좋아하는 우리이기에 그나마 신나게 빵도 굽고, 맛있는 것도 먹고, 고양이들과 놀며, 우리가 건강한 것에 감사하며 잘 버텼다. 그러다 보니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고, 적어도 아웃도어에 대한 제한이 많이 풀리게 되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을 주변 클라이밍 크랙이나 캠프그라운드를 다시 찾아 나섰고, 이는 우리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그렇게 점점 더 제한이 완화되며 정말 오랜만에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클라이밍과 캠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직도 한여름 날씨에 많이 더웠지만 우리는 또 언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갈 수 있을 때 가기로 했다. 그리고, 한 40분쯤 돌아야 하긴 하지만 그나마 갈 수 있는 기회이니 또 한 반년만에 아폴로 버거에 들리기로 했다.


 내가 아폴로 버거에 처음 갔을 때였다. 조리대 위로 왠 크리스피 크림 도넛 더즌 상자들이 서너 통 쌓여 있었다. 스태프들이 중간중간 당 보충을 하려는 것이겠거니, 싶으면서도 왠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웬걸, 번을 도넛으로 대체한 버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버거 번 대신에 도넛으로 위, 아래를 싼 버거 말이다. 버거에 대한 내 상식과 패러다임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직원이 말하길, 프렌치토스트를 좋아한다면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도저히 이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한편 마음 한 구석엔 '루터'라는 이름의 이 무지막지한 도넛 버거가 커다란 존재감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젠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회가 이번에 찾아왔다. 또 언제 세상이 닫힐지, 또 어떤 범세계적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 이것을 먹지 않으면 또 언제 기회가 찾아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내는 어차피 무지막지한 것을 먹을 거라면 제대로 먹으라고 권했다. 도넛 두 개에 패티 하나가 들어간 '싱글 루터'가 아닌, 도넛 세 장에 패티 두 장이 들어간 '더블 루터'를 먹어 보라고. 그의 말에 동의했으나, 후회할 줄 알면서도 소심하게 일반 싱글 루터 버거를 주문했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 두툼한 베이컨 두 장, 체다 치즈 두 장, 패티 하나. 이게 무슨 맛일까 2년쯤 고민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파괴적으로 맛있는 것이었다. 머리가 찡할 정도로 달콤한 도넛, 짭짤한 베이컨, 고소한 패티, 그리고 살짝 꼬릿 하면서 날카로운 체다 치즈... 마치 공학적으로 설계된, 맛이 없을 수 없는 단짠고소의 무시무시한 조합이었다. 아내를 보면서 이다음엔 반드시 '더블 루터'를 시키겠다고 얘기했더니 그는 자기가 뭐랬냐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켜 본 쥬키니 프라이 (호박 튀김)은 고소하고 달달하며 바삭한 튀김의 식감과 폭신한 호박의 식감이 잘 어우러졌다. 언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아폴로 버거의 프라이 사이드는 언제처럼 놀라웠다.

 

 여전히 아스팔트 바닥에 버거를 먹어야 했지만, 상황은 그나마 나아졌고, 사람들의 불안과 경계도 많이 누그러졌다. 마찬가지로 주차장 바닥에서 버거를 먹는 이들과 인사도 나누고, 버거 품평도 하며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다시 살만해졌구나, 하고 믿기로 했다.

 조슈아 트리는 한밤 중까지도 뜨거웠고, 아직 넘어가지 않은 여름밤 별자리 아래 우리는 바위를 올랐다.



5.


 '오늘은 루터 버거 안 먹고 다른 것 먹을래.'

 아내에게 얘기했다. 그는 나를 답답해했다. 또 그렇게 더블 루터를 안 먹고 또 후회할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잠자코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뭐가 그리 어렵고 두려워서 나는 그런 사소한 시도에 이렇게나 주저하는 것일까. 다 못 먹을 것을 걱정하는, 아니, 많아도 억지로 꾸역꾸역 먹을 나의 모습을 걱정하는 나를 위해 아내는 컨테이너까지 준비해 왔다.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고,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아내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같이 클라이밍을 하는 크루들 덕에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주를 벗어나 네바다 주 레드락 캐년 (Red Rock Canyon)에 가는 길, LA에서 네 시간 정도, 딱 적당한 시점에 빅터빌은 꼭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경로였다. 그런 만큼 아폴로 버거는 당연한 것이었고, 주중에 일을 몰아 해 놓은 후 금요일 아침 LA를 떠났다. 테이터 밤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아내의 조언에 따라 드디어 도넛 세 장 짜리 더블 루터를 시키고야 말았다.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Fun Guy, 버섯 버거는 도저히 다시 메뉴에서 볼 수가 없었는데, 혹시나 주문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그간 물어보지 않았던 게 무색하도록 흔쾌히 준비해주겠다고 하였다. 메뉴에도 없고, 오프 메뉴에도 없는 버거를 주문하니 왠지 진짜로 단골손님이 된 것 같아 미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동행하던 이는 Mexican, 아주 클래식하면서도 할라뻬뇨의 매콤함이 잘 어우러지는 버거를 주문했다.

 테이터 밤, 정말 이 끝없이 늘어나 입을 한가득 채우는 체다 치즈, 그리고 느끼할 수 있는 맛을 매콤한 할라뻬뇨로 잡아주는 밸런스는 가히 파괴적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아무래도 더블 루터겠다. 크리스피 도넛 세 장, 베이컨 네 장, 체다 치즈 여섯 장. 저번에 싱글 루터를 먹었을 때에도 굉장히 폭발적이었지만, 더블 루터는 비선형적으로 더욱더 그러하였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달콤함, 기름짐, 고소함, 꼬릿함이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아내는 늘 그렇듯 현명했고, 나는 드디어 '더블 루터'라는 꿈을 이뤄 그저 후련했다.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았다. 

 처음 가 보는 레드락에서 우리는 멋진 풍경을 뒤로 바위를 올랐다. 어렵지는 않지만 고독하고 높은 이 바위 위에서 나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클라이밍과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용기를 얻는 미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대중적으로 찬양받는 인 앤 아웃 버거를 캘리포니아에 와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었을 때 잔뜩 기대했던 기억이 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평범해서 실망스러웠다. 버드와이져나 카스가 맥주로서 유명하지만 맛있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피상적인, 혹은 자본주의적인 유명세가 있는가 하면, 그래도 가끔씩은 정말 훌륭한 본질 덕에 유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아폴로 버거는 후자의 경우로, 인스타그램 등으로 마케팅까지 열심히 하면서 제법 유명해지고 장사가 점점 더 잘 되다 못해 LA 근처에 분점을 낼 계획까지 세웠다. COVID-19 전까지는 말이다. 그 이후로 그들은 당장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었고, 다행히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다. 거의 10년째 High Desert 지역에서 최고의 버거집으로 선정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음식에 있어 좋은 재료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하며, 항상 따뜻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가장 본질적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지켜나가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그들은 그 허름해 보이는 간판을 달고, 눈에 띄지 않음에도 이것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 


 최근에 맥 앤 치즈를 튀겨서 패티 위에 올리는 또한 무지막지한 버거가 출시되었다. 이다음엔 또 무엇을 먹어볼까 하면, 아무래도 그 녀석일 것 같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어쩌다 알게 된 내 마음 속 최고의 버거집, 다시 악화되는 COVID-19 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넓은 세상 속, 또 나는 어디에 가게 되고, 중간에 어디에 멈춰볼 것이며, 어떤 멋진 인연을 만들고, 어떤 삶을 살아갈까. 지도 속에서 계속 내가 갈 곳을 찾고, 또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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