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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진오 Apr 12. 2017

그대가 걷는 길 #17 에필로그

여행의 마지막

처음 파리 행 비행기를 탔을 때만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60일이라는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하루하루 착실하게 흘러 그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행을 끝맺음 한지 5개월이 지나서야 내 여행의 마지막 에필로그를 작성하고 있다. 


여행은 끝이 났고 여행을 하면 적었던 나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브런치를 통해 발행이 되었지만 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이야기가 '작가의 서랍'에 임시 저장된 채 발행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이유는 어쩌면 내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물론 그렇지 않았으면 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웠고 치열하게 외로웠던 나의 유럽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이제야 나는 여행의 마무리를 할 용기가 생겼다.





모로코에서 꽤나 오랫동안 다음에 여행할 도시를 결정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즉흥적으로 다음 도시를 계획하던 나지만, 어쩌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가 될지도 모르는 장소를 언제나처럼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구글 맵을 켜고 여기저기를 비교해가며 알아보다가 문득 여행을 시작하기 전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왔던 직장선배가 생각이 났다. 그분은 나보다 2년 정도 먼저 회사를 그만두었고 지금은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SNS에 퇴사 후 유럽여행 계획을 알린 글을 보고 영국에 놀러 올 계획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마음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운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영국은 방문할 생각을 안 하고 있던 터라 확답을 드리지 못하고 만약 가게 되면 연락을 하겠노라 답장을 남겨 놨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마지막 나의 여행은 영국에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지체 없이 항공권과 숙소를 알아보고 결재를 해 버렸다. 이로서 내 60일간의 유럽여행의 마침표는 영국 런던에서 찍게 되었다. 


늦은 새벽 런던의 Victoria 역에 도착했다. 숙소는 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듯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수 없이 걸었지만 늦은 새벽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밤거리를 걷는 것은 언제나 낯설었고, 그 새벽에 보는 런던의 길거리는 내가 생각해오던 런던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조심스레 밤거리를 걷다 보니 숙소 사장님과 만나기로 한 사거리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배터리는 간당간당했고 늦은 새벽이어서 일까, 역에서 통화를 했던 사장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나는 잠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횡당보도 건너편에서 잔뜩 술에 취한 외국인이 비틀비틀 걸어왔다. 늦은 새벽, 길거리에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는 한적한 곳에서 술에 취한 덩치 큰 외국인을 마주하는 것이 나에게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나는 괜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최대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다행히 그 외국인은 먼 타지에서 온 작은 동양인을 알아볼 정신조차 없는 인사불성의 상태로 나를 지나쳐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사장님과 통화가 되었고 나는 숙소에 check-in 하여 쉴 수 있었다.





보통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의 유럽여행의 시작점은 영국 런던인 경우가 많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런던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아 이탈리아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일종의 '유럽여행의 정석'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유럽여행을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런던을 들렸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 같이 런던을 이야기 할 때 도심 속 공원을 언급하며 거기서 느끼는 한적함 혹은 여유로움에 대해 극찬을 하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조금은 여유롭고 느긋한 아침을 보내고 싶었으나 한인민박의 규칙이 11시 전에는 모두 숙소에서 나가야 하는 이상야릇한 규칙이 있어 조금은 급하게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너무 늦게 도착한 탓도 있고 급작스레 런던행을 결정한 것이기에 특별히 갈 곳은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동행들이 이야기 해준 런던의 도심 속 공원들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실제로 그다지 크지도 않은 런던에는 참 많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도심 한가운데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공원의 모습이 나쁘지는 않다. 나는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St James park를 찾았다. 가는 길에 커피를 한잔 사려 스타벅스에 들렸다. 주문을 받는 사람은 동양인이었는데 특별히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조심스레 'Americano ice please.' 라며 짧은 영어로 주문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달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맞으세요?' , 이른 아침부터 우연히 들어간 스타벅스 매장에서 듣는 한국말이라니, 주문을 받는 사람이 동양인이지만 설마 한국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려 보니, 왠지 내가 했던 어설픈 영어가 창피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도 한국사람을 만나 반가워서 인지 간단하 몇 마디를 나눈 후에 나는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왜 런던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도 런던의 공원을 찬양했는지 이유를 알만했다. 내가 갔을 때는 가을의 문턱이 가까워져서 인지 곳곳에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었고, 평일 오전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런던의 모습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했던 그들의 말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가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영국에서 지낸 다던 직장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조금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분이 살고 계신 곳은 런던이 아니라 'Durham'이라는 런던에서 한참은 위쪽에 있는 작은 소도시였다. 나는 왜 당연히 영국에서 지낸다고 했을 때 런던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생각해 보니 출발하기 전에 선배가 사는 도시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은 채 런던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모두 서울에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국도 런던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나는 당연하게도 런던에서 선배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런던에서 그곳까지 가기에는 나에게 남겨진 시간도, 돈도 넉넉하지 않았기에 나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기회에 찾아뵙겠다는 답장을 했다. 그러자 선배는 잠시 고민하더니 주말을 이용해서 본인이 런던으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나는 괜히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극구 말렸지만 선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로 5시간이 넘는 먼 거리를 달려와 주었다. 


사실 선배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는 파트도 달랐기도 했고 서로가 바빠 많이 친해질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다만 외국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해 온 선배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자유분방했고 직장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캐릭터이긴 했다. 가끔씩 여러 명이서 술자리를 가져본 적은 있지만 단 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선배가 퇴사를 한 지 2년이 거의 다 되도록 그동안 한 번도 안부인사조차 하지 않던 후배를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달려오는 것이 나에게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감사했다. 왠지 내가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외국에서 동행으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과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듯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그 선배는 예전보다 더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때 느낀 반가움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저 때문에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너무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라는 나의 걱정에 선배는 대수롭지 않게 


'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보겠냐. 사람은 시간이 생길 때 보는 게 아니라 만들어서 보는 거야.' 


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참으로 고맙고 멋있었다.


우리는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런던에서 신나게 소맥을 섞어 마셨고 2차로 마트에서 그다지 비싸지 않은 보드카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2년 만에 만난 선배와는 그전에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보다 먼저 퇴사를 하고,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에게 이제 막 퇴사를 한 나는 잘 지내냐는 안부의 인사보다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선배의 인생이 더 궁금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내 모습이 조금 구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보러 먼 길을 달려와준 선배에게 그 와중에 나는 이 사람의 인생에서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모습만 보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런 것은 다 잊고 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준 선배를 위해 

정말 진심을 담아 선배의 안부와 근황을 더 많이 물어볼 수는 없었던 걸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선배에게는 사소할지도 모르는 그날의 만남이 

나에게는 그래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작지 않은 위로를 주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전달해 줄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어찌 보면 불과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시간의 추억을 머릿속에서 꺼내어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 내 머릿속에서 많은 장면들이 미화되고 재구성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은 재구성되고 미화가 되었던 그 장면들도 그 순간에 느꼈던 나의 어떠한 마음이 반영된 결과라 생각한다. 미화된 기억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는 것도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리라.


귀국행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에도,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행이 끝났음을 인정하기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즐겁기만 했던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끝맺음이 아쉬운 이유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할 경험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면 '여행'의 가치는 지금처럼 소중하거나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떠나야만 하는 순간' 모두가 다르겠지만 떠나야만 하고 떠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시기는 물론 각자 다르겠지만 인생을 살면서 모두에게 한 번쯤은 찾아오는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소중했던 순간을 마무리하는 지금의 나는 

조금은 아쉽지만 담담하게 그 순간을 매듭지으려 한다.

언젠가 또다시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도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기를

그 순간이 더없이 찬란하고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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