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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열차 출발합니다

오사카 여행_4일차(1)

by 잎새 달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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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날이 밝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가는 날이다. 숙소가 있는 난바역에서 USJ까지는 한 번의 환승을 거쳐야 했다. 환승역인 니시쿠조역에서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지가 나와 같은 듯했다. 상당한 인파였다. 바닷물에 휩쓸리듯 이동하니 어느새 플랫폼이었다. 너도나도 상기된 얼굴과 들뜬 목소리. 나 또한 전날 밤의 대성통곡이 무색할 만큼 연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행여나 혼자 웃는 모습을 들킬까 입꼬리 단속하느라 혼났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그곳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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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만난 인파는 인파도 아니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펼쳐진 행렬에 입이 떡 벌어졌다. 테마파크 입구까지는 아직 좀 더 가야 하는데 이미 인산인해였다. 군중 속에 홀로 있다는 것이 전날까지만 해도 그토록 쓸쓸했는데 이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즐거웠다. 저 멀리 입구가 보이자 심장이 뛰었다. 나 정말 유니버셜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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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후 30분 정도 지나서 입장했다. 게이트 통과 직후 곧장 해리포터 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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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존은 다른 구역과 달리 입구에서 정문까지 별도의 오솔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스피커에선 영화 OST가 흘러나오고 길가에 가로등마저 영화에 나오는 것과 같으니 마치 나도 호그와트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머지않아 론 위즐리의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보였고, 이어서 웅장한 크기의 정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비로소 꿈에 그리던 그곳에 당도하고야 말았다.


어릴 적 나는 영화 속 장소들이 모두 실재한다고 믿었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호그와트 성도 어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저곳에 가고 말겠다는 굳게 다짐까지 했더랬다. 그러나 내가 믿었던 견고한 세상은 컴퓨터 그래픽을 포함한 각종 기술의 집약체였으며 영화 속 장면은 일부 배경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세트 혹은 초록색 크로마키 천 앞에서 촬영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호그와트는 언제나 내게 꿈나라 동산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정문을 지나 저 멀리 호그와트 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한없이 마음이 벅차올랐다. 낡지도 닳지도 않는 어떤 마음이 저기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 재현된 세상이라 해도 상관없을 만큼 어린 시절의 동경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만이 기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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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호그스미드의 지붕은 겨울과 아주 잘 어울렸다. 사시사철 눈 쌓인 지붕이라는데 때마침 계절이 겨울이라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는데 그건 이미 철거된 뒤였다. 어트랙션 탑승 대기 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구경했다. 해리포터 세계관 내 가장 핫플이라 할 수 있는 ‘허니듀크 과자점’과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서 해리와 헤르미온느가 착용한 파티 의상이 진열돼 있는 ‘글래드래그스’ 마법사 의상점, 해리와 초챙이 데이트했던 ‘퍼디풋 부인의 찻집’, 특이하고 신기한 장난감들을 판매하는 ‘종코의 장난감 가게’, 마법사 지팡이를 판매하는 ‘올리밴더스’ 등이 보였다. 사실 ‘올리밴더스’는 호그스미드가 아닌 다이애건 앨리에 있는 곳인데 워낙 상징적이다 보니 함께 구현해 놓은 듯했다. 정문 근처에 세워진 기차 모형에서는 때때로 기적소리와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반복 재생되는 영화 OST와 주변에 비치된 짐가방 때문에 당장이라도 9와 4분의 3 승강장으로 달려가 마법사들을 태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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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성문 앞이었다. 거의 다 왔겠거니 했는데 성문을 지나서도 구불구불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해그리드가 눈밭 위로 끌고 갔던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가 즐비한 숲길을 지나 스프라우트 교수의 온실에 들어섰다. (모두 대기 동선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마주치는 사소한 표지판마저도 영화 속 소품과 꼭 닮아있어 지루한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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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진입한 성 내부. 벽에 걸린 초상화와 말하는 모자, 덤블도어 교장의 집무실과 기숙사 휴게실 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품과 공간이 실감 나게 재현되어 있어 구경하랴 이동하랴 정신이 없었다. 이때부터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나이 먹고도 이토록 해맑을 수 있다니. 이런 내 모습이 어딘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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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에 짐을 보관하고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의자에 몸을 실었다. 배부받은 VR 안경을 쓰자 금세 호그와트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포비든 저니’는 마법 빗자루를 타고 호그와트 성 주변을 날아다니는 일련의 모험을 4D로 생생하게 구현한 놀이기구였다. VR 안경을 착용한 채 레일에 매달려 움직이는 의자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순간순간 잊어버릴 만큼 몰입도가 높았다. 끝나자마자 또 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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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트랙션 탑승까지 마쳤으니 본격적인 구경과 쇼핑을 시작했다. 어트랙션에서 바로 이어지는 기념품 상점부터 시작해 호그스미드 곳곳에 조성된 상점을 드나들며 이것저것 구매했다. 벼르고 왔던 목도리와 지팡이와 함께 영화의 상징적인 소품인 개구리 초콜릿과 마루더즈 맵(호그와트 지도), 동생에게 선물할 버터 맥주잔과 함께 나눠 가질 키링 몇 가지 등을 샀다. 이날을 위해 예산을 아낀다고 아꼈는데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욕심만큼 마구 사들이지는 못했다. 나만의 토너먼트를 진행하며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것들로 부단히 애쓰며 골랐던 기억이 난다. 목도리와 지팡이를 살 땐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제법 심도 있게 고민했는데, 목도리의 경우 상징성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그리핀도르’가 제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슬리데린’이나 ‘래번클로’가 더 취향이었다. 지팡이는 해리포터 vs 헤르미온느 vs 덤블도어 삼파전이었는데 주인공이냐, 죽음의 성물이냐,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상징성과 개인 취향 중 무얼 선택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고, 이게 뭐라고 그리 심오한지 스스로조차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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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목도리는 가장 상징적인 ‘그리핀도르’, 지팡이는 내 마음에 드는 ‘헤르미온느’의 것으로 선택했다. 목도리는 구매하자마자 바로 둘렀다. 굿즈에 마법약이라도 묻은 건지 아이템 하나 장착했다고 아까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다시 한번 기록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내 모습을 남겼다. 그새 경험치가 쌓였는지 이제 사진 부탁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긴장의 연속이라 굳은 표정이었지만 마음은 사뭇 달랐다. 마음속에 감정을 질량으로 비교하자면 이날만큼은 확실히 낯섦보다는 설렘이, 부끄러움보다 즐거움이 컸다. 힘이 센 감정이 이끄는 대로 부지런히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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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딱 한 번 크게 속상해진 순간이 있다. 버터맥주까지 사서 마시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싶을 때 동생에게 영상통화를 시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생도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궁금해했던 터라 해리포터 존에 가게 되면 반드시 실시간으로 구경시켜 주기로 약속했는데. 몇 번의 시도 끝에야 데이터가 바닥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로움이 빚어낸 여러 번의 통화와 순간의 감정 공유를 빙자한 고화질 데이터 전송이 화근이었다. 서로 이날만 벼르고 있었던지라 상당히 허망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직접 찍은 영상을 대신 보내주기로 했다. 해리포터 존 초입부터 호그와트 성까지의 동선을 원-테이크로 촬영해 보냈다. 화질 면에서는 오히려 나은 선택이었지만 생동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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