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의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필자는 직장 내에서 MBTI 과몰입러로 알려져 있다. 회식 때마다 사람들의 MBTI를 맞춰보고, 유형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에 대해 대화하는 걸 즐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MBTI 이야기가 불편해졌다.
물론 아직까지 '저 사람 MBTI가 뭘까?'라는 호기심은 항상 따라다니지만, 대중적으로 MBTI 과몰입 현상이 강화될수록 '성격유형 검사'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느낀다.
모든 심리 도구의 목적은 ①개인의 성향, 기질, 정신 건강 등의 척도를 알려주고, ②각 유형이 가진 한계점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친사회적인 효과를 지향한다.
무엇이든 근본적인 기능을 잃는다면 '남용'과 '오용'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MBTI는 심리 도구로서 제대로 사용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다른 의미의 트렌드가 돼버렸을까?
MBTI에 과몰입되어 있는 한 사람으로서 MBTI 유행이 가진 양면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MBTI의 순기능
성숙한 인간관계 문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캐서린 브릭스와 이사벨 마이어스 모녀가 칼 융의 '심리유형론'을 기반으로 하여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다. 그리고 그녀들은 사람들이 인간의 다양성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동기에서 이 검사를 만들게 되었다.
창작자들의 바람대로 MBTI 문화는 특히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서로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MBTI가 유행하기 전에는 상대의 탓을 하기 쉬웠지만, 지금은 서로의 MBTI를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갈등의 기류를 더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SNS상에 MBTI 관련 다양한 콘텐츠들이 확산되면서 상호존중에 대한 교육적인 효과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연인 사이에 있어온 다툼들도, MBTI를 사용하면 연인의 성향을 존중해 주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풀어나갈 수 있다. '나 우울해서 폭식했어'라고 하는데 상대가 '뭐 먹었어?'라며 음식 메뉴를 궁금해하더라도 전보다는 덜 서운해 할 수 있다.
이렇게 MBTI 유행을 기점으로 인간관계 문화가 보다 더 성숙해져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문화
MBTI라는 검사가 만들어진지는 무려 80년이 되었지만, 뒤늦게 이 시대에 빛을 보게 된 데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배경에 코로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코시국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유대감'에 목말라 있던 중, MBTI가 그 욕구를 해소시켜 줬다. MBTI 각 유형별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자신의 성향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을 나누며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즉, MBTI는 재미를 넘어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게 해 줬다. 이런 유대감이 더해질수록 MBTI에 대한 신뢰도도 더 높아진다(MBTI는 사이언스).
이렇게 공감대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MBTI가 가진 선한 영향력도 대두된다. 곧 자신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특징'으로 재정의 해준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받았을 때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가 엄격한 문화에서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라는 위로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나아가 MBTI를 길잡이 삼아 사람의 심리를 공부하다 보면 개인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이 결과적으로 같은 모양임을 깨닫게 된다. 부디 MBTI가 장기적으로 유행해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문화를 이루는 데에 디딤돌이 되어주길 바란다.
MBTI의 부작용
효율적인 인간관계 문화
여러 세대 중 특히 'MZ세대'가 MBTI에 열광하는 이유를 분석한 통계가 있다. 물론 젊은 세대라 유행에 민감한 것도 있겠지만 분석 결과는 참신했다. 바로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기성세대와 달리 우리나라 MZ세대는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는 문화에서 태어났다. 나아가 정보에 대한 접근도 용이해서 무슨 일이든 효율적으로 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러한 세대적인 기질이 MBTI 유행을 타고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되어버렸다.
MBTI라는 도구를 통해 관계를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나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여 감정소모를 줄일 수 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 서로를 이해해 가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효율성'의 근거였다(기사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모든 MZ세대를 일반화한 내용은 아님). 어른들이 말하는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안다'라는 통념을 깨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이런 효율적인 사상이 왜 MBTI의 부작용일까?
사람에 대한 프레임을 씌워버리기 때문이다. MBTI의 순기능이 역기능으로 변해버리는 양면성이 보이는 순간이다. 이 프레밍은 자기 자신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심리 도구를 잘못 사용하게 되는 대표적인 예다.
모든 사람은 고유성을 가진다. 즉, 사람은 다 다르다. 마치 같은 빨간색이라도 그러데이션을 준다면 수백가지 색을 가질 수 있으며, 결은 비슷할지라도 쓰임과 이미지는 같지 않다. 같은 MBTI라고 할지라도 각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성향을 풍길 수 있다.
특정 MBTI를 가진 사람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받았다고 해서, 그 MBTI 성향을 가진 모두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MBTI는 편의상 사람의 성향을 구분해 놓은 하나의 지표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도 일곱 빛깔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편의상 일곱 개의 색깔이라고 구분할 뿐이지 어떻게 보면 무수한 색들로 나뉠 수 있다. 사람을 편견에 따라 구분해서 사귀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자기 자신에게나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물 안에서도 행복하면 그렇게 살면 된다. 다만 내면의 성장에 관심이 있다면 MBTI는 인간관계에서 '참고'만 하길 추천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
MBTI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MBTI를 방어기제 삼아 변화하기를 당당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내가 I라서 발표는 잘 못해', '네가 T라서 F인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P니까 계획적인 일은 시키지 말아 줘' 등 특정 성향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한계에 가둬버리는 일이 이제는 합리적인 현상 같기도 하다(일종의 가스라이팅처럼). 특히 회사에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과 일을 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성격 유형 검사를 하게 되면 해당 성격의 특징을 설명해 주는 동시에 내면을 키우기 위한 피드백을 주는 경우도 많다. 비단 MBTI 뿐만 아니라 애니어그램, DISC 등 많은 검사들은 이렇게 '성장'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도 함께 가지고 만들어졌다.
심리 도구는 '현재' X-ray처럼 나의 내면 상태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지,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MBTI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I 성향이어도 단상에 설 수 있으며 P 성향이라도 질서 있는 일처리가 가능한 근거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은(필자를 포함해서) 부디 MBTI를 자기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MBTI의 올바른 사용법
MBTI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참고'만 해야지 나 자신이 그 MBTI와 일체가 되면 안 된다. 어쩌면 MBTI 열풍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싶은 욕구와 그 유행의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에 더 이슈였을 것이다. 다만 오렌지 주스에 오렌지가 10%도 들어가 있지 않듯, 나의 MBTI도 나의 일부를 표현할 뿐이다.
MBTI로 자아성찰을 이루는 방법
첫째, 자신의 MBTI가 가진 뾰족한 특징(같은 유형이라도 점수대가 다름)을 파악한다.
둘째, 근본적으로 왜 그런 성향으로 발전이 되었는지를 돌아본다(*필자의 글 중 내면아이 찾는 방법 추천).
셋째, 앞으로 더 발전하고픈 성향대로 행동해 본다. 즉, 자신의 틀을 깨 본다.
이러한 도전이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고 진정한 성장이다.
MBTI에 진심인 덕후로서 올바른 MBTI 문화도 널리 널리 퍼져나가길 바란다.
*Reference) 'MBTI의 의미', 박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