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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May 10. 2023

참는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

방어기제 1 : 억압과 부정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자기 자신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실제 의사결정의 바탕은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정이 있어야만 삶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고,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지킬 수 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자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에너지가 강하다. 그래서 방어기제가 필요하다(필자의 방어기제 관련 스토리들을 미리 읽어보길 추천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강력한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을 무의식이라는 창고로 미루어 보관한다. 이렇게 잠시나마 감정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억압하는 방어기제가 습관이 될수록 감정의 욕구 불만 상태가 심각해질 수 있다.


방어기제 시리즈 중 첫 번째 주제로 '억압'과 '부정'을 선정했다. 이유라면, 방어기제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가진 유형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부정'의 방어기제가 표현된 사례들을 통해 우리 자신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매번 사고 치는 착한 A양


적대감을 억압하고 수동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

A양은 참 순하고 착하다.

편안함을 주는 A양을 사람들은 좋아하고 자주 찾는다. 다만 A양 때문에 매일 '돌아버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그녀의 남편이다. 그녀는 매일 그녀의 남편 앞에서만 사고를 친다. 접시를 깨는 일부터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리는 일까지 각양각색으로 실수를 한다. 왜 유독 가정에서만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지 A양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수차례 상담을 거쳐 그녀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남편에 대한 분노가 드러났다.

 

적대감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간접적인 방식' 곧 수동공격적 방향으로 감정을 표출하곤 한다. 분노를 직접 표출하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중요한 일을 계속 미루거나 고집스럽게 협조를 거부하거나 또는 그냥 그 일을 '잊어버린다'(까먹는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다수는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억압' 방어기제를 만든 내면아이

억압은 궁극적으로 '고통'을 회피하는 방어기제 수단이다. 그리고 A양과 같은 수동공격성 방어기제는 갈등에서 고통을 느끼는 경우다. 자신의 분노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가족과의 갈등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신의 무의식으로 '분노'를 억압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때 A양의 내면아이는 '분노'라는 타당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부정당한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잘 참는'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적대감을 가진 대상에게 자신의 분노를 삐뚤어지게 표현한 것이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B군


'부정'의 방어기제
저 여자가 절정의 맹세를 너무 요란하게 떠드는 걸 보니 믿음이 안 가는구나
-《햄릿(Hamlet)》 3막 2장

'부정'의 방어기제는 특정한 사건이나 가치를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태세를 말한다. 그리고 '부정'하는 강도가 강할수록 부정하는 대상에 대한 갈망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사망한 연인의 환상을 보는 '은정'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녀는 현명하고 주체적인 여성이지만,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죽음은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환상 속에서 대화하고 동행한다. 은정은 '부정'의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간혹 '절대'라는 말을 사용하며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의 곁에도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며 20대에 비혼주의를 선언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 아이 둘의 엄마다. 생각해 보면 비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이 가장 빨리 결혼을 하곤 한다. 감히 예상컨대 그들도 결혼에 대한 '부정'의 방어기제를 사용했다고 본다.


의존적 욕구를 부정하는 사람들
#어른아이

B군은 참 어른스럽다.

청소년기에도 사춘기 한 번을 겪지 않았고, 알아서 척척 자기 할 일을 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 부모님의 공백을 채워주며 든든한 오빠가 되어준다. 주변 지인들은 그에 대해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회사에서는 일잘러에 집에서는 효자라며 이만한 남자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B군의 여자친구는 그가 참 어렵고 답답하다. 자신이 B에게 필요 없는 존재로 느껴져 이별까지 생각하고 있다. B군의 연애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에게 '의존의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의존 욕구는 신생아 때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욕구'이다. 나아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욕구를 평생을 가지고 살아간다. 장기적으로 의존 욕구를 '부정'하게 되면 의존성을 '필요 없고 나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B군과 같이 의존 욕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대인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가족, 연인, 친구 등 소중한 관계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결국 인간관계가 무너지게 된다.


욕구는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의식 속 욕구를 다르게 표출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억누르는 사람들은 음식, 술, 약물에 자주 의존한다(일중독도 마찬가지다). 못 미더운 인간관계보다 자신이 구매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물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회피형 남자친구 C군


부정적인 감정 느끼기를 부정하는 사람들
#냉혈한 #회피형

C군은 참 이성적이다. 그의 감정적이지 않고 논리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다. 그래서 인기 많은 C군은 연애가 끊인 적이 없었다. 아, 물론 연애 기간이 100일을 넘겨본 적도 없다. 여자친구가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혼자 마음을 닫는다. 상대방이 모를 수도 있으니 연락의 텀을 길게 가져가본다. 그러면 '헤어지자'라고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애를 끝낼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억압'이나 '부정' 방어기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성향으로 비친다. 마치 C군처럼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감정을 억압'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감정이 주(main)가 되는 관계에서는 비일반적인 패턴이 반복된다. 이럴 때는 단순히 성향 탓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감정은 모든 대인관계의 생명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감정을 회피하게 되면 친구든 동료든 연인이든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부정' 방어기제를 만든 내면아이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냉정해 보이는 이들에게도 사연이 있다.


'부정'의 방어기제는 어떤 사실이 자신의 소망이나 믿음과 모순되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상처를 덮기 위해 형성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의존하고 자신의 모든 감정적 욕구가 인정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소망이 좌절되면 내면아이의 자존감은 손상된다. 어릴 적 부모나 보호자에게 의존하려는 욕구가 좌절되었다면, 내면아이는 의존하려는 상황에 대한 수치심을 갖는다. 감정의 욕구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자신의 욕구를 억제했을 때 보호자에게서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온다면 '부정'의 방어기제는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B군은 매우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누구보다 의존할 대상을 갈구하고 있을 수도 있다. C군도 감정이 없는 사람 같지만 누구보다 감정에 예민할 수 있다.


억압, 부정 방어기제
해체하기

내 안에 있는 방어기제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순간부터가 극복의 시작이 된다. 위의 A, B, C 유형 중에 '뜨끔'한 포인트가 하나라도 있다면 해당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억압'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기억이 의식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끔 '막으려는' 방어기제 과정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뭔가를 계속 억압해 두려고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신호를 인지하는 법을 배우면 언제든지 방어기제가 가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수동공격성'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은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반복적인 행동'이 무의식에 감춰진 부정적 감정을 증명한다. '부정'의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은 (핵심 욕구일 가능성이 높은) 특정 사실을 부정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이제 자신의 방어기제를 직면했다면, 내면아이를 찾아가 위로해 보자. 그간 당연히 존중받아야 했던 욕구와 감정이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드러낼 수 없었던 사연에 공감하고 상처받았음을 인정하자.


나중에 또 위와 같은 방어기제가 작동하려고 할 때(이제는 인지할 수 있다) '반대로' 행동하면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내면의 습관에 금을 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방어기제는 우리 정신에 붙박이처럼 장착된 버릇과도 같다. 성장하려면 그 버릇에서 탈피해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분명 세상이 나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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