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옛날다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nsom Lee Apr 23. 2017

동파육과 추사팽

우리에겐 왜 이런  역사스토리를 지닌 음식이 없는가 - 이빈섬<문자향>

동파육(東坡肉)과 추사팽(秋史烹) 


        

절강성에서 명물이라고 내놓는 요리 중에 ‘동파육’이란 게 있다. 레서피는 간단하다. 돼지 삼겹살(혹은 갈비살)을 두툼하게 썰어 물을 넣는 대신 소흥의 술을 부어서 사기로 만든 솥 안에 넣고 덮개를 덮은 다음 약한 불로 오래 끓여서 익힌다. 그래서 내놓으면 고기는 붉은 빛이 아름다운데다 바삭바삭하면서도 쫀득하니 바스러지지 않아 입을 즐겁게 하고 국물 맛 또한 괜찮다. 물론 소동파 이래로 먹었던 음식이니 지난 9백여년간 맛을 높이는 노하우가 많이 쌓였을 것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을 위해 요리법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마늘과 생강, 그리고 대파 흰 뿌리를 물이나 술에 넣고 돼지 갈비살을 주먹 크기로 썰어 삶는다. 이 과정에서 필요이상의 지방을 녹여낸다. 그 다음에는 고기에 녹말가루를 묻혀 탄수화물을 보충한 다음 불포화지방산이 포함된 기름으로 튀긴다. 이후에는 양념 간장에 졸이거나, 양념을 재워 찐다. 이때 쓰는 간장은 캬라멜이나 흑설탕을 주로 쓴다. 마지막으로는 청경채를 데쳐 같이 내는데 고기와 채소의 균형있는 식단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홍육(紅肉)과 녹채(綠菜)의 빛깔 대비를 아름답게 하려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 요리의 이름에 왜 ‘동파’라는 말이 붙었을까. 몇 가지 민담이 전해온다. 1089년 소동파가 절강성의 항주 태수로 있을 때 소흥주를 넣어 끓인 돼지고기를 백성들에게 대접했는데 맛이 아주 좋아 먹는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민간에서 술을 넣어 끓이는 돈육요리를 ‘동파육’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는 재미 있다. 위의 저 장면에서 동파가 술에 끓인 고기를 내놓은 게 아니라, 그저 술과 고기를 내놓았더니 사람들이 그걸 함께 쪄서 먹으라는 것인줄 알고 요리를 만들었단다. 동파의 뜻을 오해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들어낸 음식이라는 얘기다. 오해시리즈는 또 있다. 동파가 식당에서 돼지고기 삶은 것과 소흥주를 주문했는데 절강성 사투리만 아는 주방장이,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술에 삶은 고기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동파육이 그가 직접 요리를 고안한 것이든, 아니면 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민간에서 생겨난 것이든, 그 이름으로 음식장사를 해온 중국사람들의 ‘센스’ 만은 높이 사야 하리라. 유명한 시인이 만든 요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 보인다. 담담한 맛에도 소동파의 향기가 느껴진다.     


소동파는 시인이자 탁월한 서예가이자 학자이지만, 그 명성에 ‘정치가 동파’가 가려진 감이 있다. 그는 아주 열정적인 공직자였다. 1789년은 그가 항주태수 겸 절서지구 사령관으로 부임한 해다. 거기서 그는 이전의 관리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몇 가지 대형사업을 벌인다. 첫째는 서호(西湖)를 준설하고 그 물막이 벽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지금의 서호를 만든 위대한 사람으로 소동파를 기억한다. 그는 곡가(穀價)를 안정시키고 중국 최초의 공공병원을 만든다. 또 식수 공급시설을 정비하고 기근 구제에 팔을 걷는다. 그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면서, 집무는 갈령(葛嶺) 아래에 있는 석불원(石佛院)에서 했다. 그림같은 산 아래 방이 열 세칸 딸린 곳이었는데, 일을 하면서 그는 시를 읊었다. 산색공몽우역기(山色空濛雨亦奇). 산빛이 텅 비는 듯 사라지더니 이윽고 안개가 서린다. 비가 내리니 더욱 기이해진다. 이런 시절이었다. 동파가 돼지고기를 내놓은 때는 대대적인 서호의 공사를 마친 뒤 백성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스런 그들을 위해 뭔가 맛있는 요리를 내놓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그는 고민을 했으리라.    

 

그는 식저육(食猪肉 ; 돼지고기 먹는 법)이란 시를 지은 적이 있다. “광주의 질 좋은 돼지고기는 아주 값이 싸다/ 잘 사는 사람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는 삶는 법을 모르네/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은 다음 저절로 제맛이 나는 것을.” 이것이 동파육의 요리법이기도 하다. 술을 넣는다는 착안만 들어가면 완벽하다. 술을 좋아하는 동파는 우연히 파격적인 요리실험을 해봤을지 모른다. 아, 이것으로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자.      


저 동파육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나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추사팽’을 만들어내지 않는지 답답하다. 추사의 예서 대련 중에서 마지막 역작으로 꼽히는 ‘대팽고회(大烹高會;위대한 음식, 훌륭한 모임)’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돌아온 천재지식인이 죽음을 앞둔 그해에 마치 최후의 깨달음처럼 내놓은 글귀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의 난초가 그랬듯, 이 글씨에는 잘 쓰겠다는 인간적인 현시(顯示) 욕망이 보이지 않는 담담한 졸박(拙樸)이 내려앉아 오히려 순정한 감동을 준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疆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위대한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주     


추사가 71세가 되어서야 드디어 대팽과 고회를 알게 됐다. 그동안 세상이 권하고 부추기는 대팽을 찾아 얼마나 많이 헤맸던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코가 비뚤어질 만큼 술도 먹어보고, 온갖 희귀한 음식, 비싼 음식, 보약같은 음식, 남이 못먹는 음식도 먹어 보았다. 그러나 그 음식 다 돌고 돌아와서 이제 문득 발견한 소박한 밥상. 그것이 두부과강채이다. 생강과 나물이 들어있는 걸 보면, 동파육의 양념과 비슷하다. 추사가 그토록 존경했던 동파 또한 백성들을 위해 귀하고 비싼 음식을 내놓은 게 아니라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요리를 개발해 내놓지 않았던가. 추사가 제시한 저 밥상 또한 구하기 쉽고 값도 싸며 보통사람들이 흔히 먹는 것들이다. 그러나 차림새는 간략하지만 매력적인 웰빙 식단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파육과 추사팽의 다른 점은 후자는 전적으로 식물성이라는 점이다.    

  

솥 속에서 자글자글 끓여서 먹는 음식은 모두 '팽'이지만, 추사는 그 중에서 대표 음식 네 가지를 택했다.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이 그것이다. 오이의 밋밋함, 생강의 매콤새콤함, 그리고 나물의 향그럽고 풋풋함. 그런 것들도 꼭 필요하지만, 최고의 팽인 대팽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은 역시 두부다. 저 풋것들을 부드럽고 깊게 잠재워 음식의 풍미를 높이는데 두부 만한 게 어디있겠는가?      


동파육과 달리 추사팽이 민간에서 전승되는 요리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스페셜 요리라고 할 만한 창의적 재구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기를 술로 삶는 것은 얘기가 되지만, 일상적인 음식과 양념을 나열해놓은 대팽은 오직 깨달음을 위한 수프일 뿐이다. 그건 맞다. 하지만 내가 이 대목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역사란 흘러간 시간에 대한 잠정적인 기억 만이 아니라, 음식을 각인시키기 위해 들이는 홍보의 노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매력적인 자원’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 들어간 맛있는 국을 만들어내라. 보편적인 식재료를 특별하게 만드는 아이디어는 자유다. 그 ‘두부국’ 이름을 추사팽 혹은 추사대팽이라고 불러, 전시대 지식인의 위대한 깨달음을 동파육처럼 써먹는 센스를 발휘하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국을 먹으면서 말년의 그가 그리워한 소박함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으리라. 내가 좀 흥분했나 보다. 대팽과 맞세운 고회의 7언까지를 읽으면, 추사의 쓸쓸함과 허무함이 그림처럼 짚인다. 내가 세상의 음식 다 먹어봤지만 시골밥상이 최고이고, 세상의 멋지고 훌륭하고 매력적인 사람 다 만나봤지만 가장 즐거울 때는 내 아내, 내 새끼, 내 손주들을 만나던 때였다. 

     

위의 '대팽'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보자면 이 글씨를 쓴 때는 아마도 그해 초록이 돋는 어느 봄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과천의 쓸쓸한 방 안에서, 함께 그릇 댕그렁거리고 수저 달그락거리며 밥을 먹던 식구들을 떠올려본다. 정치에 들떠 겅중거리고 학문에 미쳐 골몰하고 세상의 명성과 향기로운 교유에 눈 팔리면서 살아왔으나 대체 남은 게 무엇인가. 치솟고 곤두박질치던 청룡열차를 타는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은 다 돌아가고 흩어졌다. 내 집 안에 대팽과 고회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다가 찢어진 영혼이 되어 여기 앉았는가. 세상아, 너희는 나처럼 되지 말아라. 소박한 것에 깃든 기쁨과 만족을 귀하게 여기고, 부디 시간을 아껴 잘 먹고 잘 살아라. 추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협서로 논지(論旨)를 부연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추사는 자기 속에서 일어난 간절한 기분 때문에 다시 말을 잇는다.


차위촌부자제일락상락(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수요간두대황금인(雖腰間斗大黃金印)식전방장(食前方丈)시첩수백(侍妾數百)능향유차미자기인(能享有此味者幾人)위고농서(爲古農書)칠십일과(七十一果)


이것이 시골 사람의 으뜸 즐거움이요 높은 즐거움이다.비록 허리에 아주 큰 황금인장을 차고 밥상 앞이 운동장처럼 넓고여인 수백명이 서비스를 한다고 해도능히 이 맛을 누릴 수 있는 자가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너무나 리얼하고 단호해서 문명의 과욕과 잡답에 반기를 들고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버린 헨리 데이빗 소로가 떠오를 지경이다. 당대의 사람들의, 그리고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별반 틀리지 않는 욕망의 세목들을 추사는 열거한 뒤, 묻는다. 그게 대팽과 고회보다 나은 거냐고? 문제는 욕망을 채우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욕망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삶에 합당한 것이냐에 있음을 뒤틀어 꼬집는다. 그리고는 그 뜻을 글씨로 보여준다. 풍운과 노도를 통과한 한 천재의 소박과 무심의 경지에서 슬금슬금 흘러나온 문자. 칠십한살 먹은 과천노인이란 뜻의 '칠십일과'를 모양없이 걸쳐붙여 이 대련을 완성할 때까지 추사는 그 소박을 넘는 어떤 '티'도 내지 않는다. 


대팽과 고회의 따뜻한 인간미와 삶의 기본을 살펴가는 잔잔한 응시가 그 붓끝으로 점이되는 듯 하다. 그래서 두부처럼 속이 편하고 식구들과 앉은 것처럼 그저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글씨다.그 봄날의 추사를 생각한다. 대팽 뒤에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을 또박또박 기입하고 있는, 그리고 고회 뒤에 그의 아내와 아들딸과 손주를 하나하나 적어넣고 있는, 늙고 병든 사람을! 오래 전 추사고택 화장실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대가 지금 보내고 있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내일이었느니."

매거진의 이전글 명동 술집 '은성'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