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 좀 하세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나이
세상에 나와 햇살과 별빛을 누린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주름살만큼 지혜로워지고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것. 이야기의 중심에서 밀려나 하고싶은 말을 참으면서 가만히 견뎌야 한다는 것. 나이는 서러운 것인가. 나이에 매겨진 세금은 가혹한 것인가.
어린 친구들에게 '너 나잇값 좀 해라'라고 하지 않는 까닭은, 그에게 나이 자체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나이에 상응하는 사회적인 기댓값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몇 살부터, 나잇값이란 말을 들어도 무방한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나, 거기에는 사회적 관념들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나이에 걸맞는 행동, 나이에 걸맞는 생각, 나이에 걸맞는 태도, 나이에 걸맞는 옷, 나이에 걸맞는 말투. 이 모든 것들이 나잇값 좀 하고 다니라는 충고 속에 들어간다. 대개 긍정적인 표현이 아닌, 씹는 말 속에 보리알처럼 끼어들어 있다. 이 말이 오죽 사무쳤으면 '나잇값 불이행 혐의자'들로부터 "내 나이가 어때서?"란 저항가가 나왔을까. 마광수시인처럼 아예 나잇값을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나왔을까.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강변이 쏟아져도, 그런 말을 하는 마음 속에 이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세상의 상식이 만만찮게 도사리고 있다. 나이는 결코 숫자만이 아니다. 나이가 숫자일 뿐이라면, 경노석은 왜 있으며, 왜 풋나기 의사들은 내게 '아버님'이라고 불러 나를 분노케하며, 또 평소엔 나이테를 인정해주는 것 같지도 않다가도 눈에 좀 거슬리기만 하면 나잇값 좀 하시라는 충고는 왜 있는가.
며칠 전 어떤 모임에서 이십여년 전에 만났던 지인 한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강산이 두번 바뀐 그 시간 동안 정말 전혀 바뀌지 않은 화법을 보고 놀랐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혀와, 상대의 기분이나 분위기를 배려하지 않는 말투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처럼 그대로 춤추고 있었다. 그 이십년 동안 저 혀와 언어들이 얼마나 그를 불리하게 했을 것일지를 고려해보면 딱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잇값'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다시 깨닫게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자기 나이를 잘 접수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 나이에 저항해서 팽팽하고 생생하고 탱탱하게 사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사람을 숙성시키고 시간이 인간의 향기를 드높이는 것까지 부정하는 건 더 우스운 일이 아닌가. 새해가 되어, 한 살 더 먹는 일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 가운데, 뭐가 달라질까를 걱정해보며 늘어놓는 잡생각이다.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