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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다

유선명산

by Bins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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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산(有仙名山)이란 사자성어는 세상에 없었다. 유우석의 '누실명(누추한 집에 새김)'에는 유선시명산(有仙是名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것을 신문 1면에 대자(大字)로 싣기 위해, 압축한 표현이다. 2013년 6월17일자 창간특집호 신문이었다.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다'라는 대목을, 많은 강연에서 자주 언급하신 분은 이어령선생이시다. 그는 사람의 중요성, 핵심콘텐츠의 중요성,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주 유우석을 인용하셨다. 나는 j일보에 근무하던 당시 정치부장에게서 이 말을 전해들은 듯 하다. 스스로 자기 재능에 대한 확신을 지녔던(실제로도 역량과 통찰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 그 선배의 자존감에 걸맞는 명구였을 것이다. 이어령선생 또한 시스템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가장 위대한 시스템이며 조직이란 시스템을 가장 힘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신봉하고 있는 분이었던 듯 하다. 시스템의 혁신에만 매달려있던 당시 j신문에게는 꼭 필요한 경고였을 것이다.

아시아경제신문에서 이 글을 소개한 것은 '아,저詩'라는 코너에서였다. 2년을 넘긴 이 작은 박스물은 국내 현대시 뿐만 아니라, 시조, 한시, 외국시, 유행가, 고전의 명구까지 두루 다루는 잡평(雜評)의 자리다.


문득 오래전에 들었던 그 구절이 떠올랐던 건, 작은 신문사이지만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려는 경영진의 태도와 신념에 대한 감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신문사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전있는 인재들이며, 그 인재들이 회사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들이라는 생각이, 이 신문사 어딘가에서 돋아나 있었다. 그 자부심을 유우석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신문사를 인수한 새 회장이 데스크들과 가진 점심 자리에서, 나는 이 얘기를 꺼냈다. 신문사가 작지만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회장은 상당히 공명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워진 회사를 제대로 소개하겠다는 야심으로 진행된 IR 행사에서 회사를 소개하는 작은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그 뒷면에 '아,저詩'에 나온 글 하나를 싣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코너를 좋아하는 경영지원실의 한 간부가 제안했던 것 같다. 나는 세 개 정도를 골라주었는데, 거기에 유우석의 '누실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업 홍보를 하는 자리에서 이왕 그 시를 소개할 거라면, 신문 창간특집에도 이 구절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고심을 하다가 '유선명산(有仙名山)' 넉자로 압축하자는 생각을 했고, 내가 쓴 책(옛공부의 즐거움, 추사에 미치다)의 팬이었고 오래된 빈섬블로그 글의 마니아라 할 수 있는 이미당선생(그는 서예계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알고 있다)에게 부탁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마감에 몰린 무리한 부탁이었는데도 선생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늦은 밤까지 시의 의미와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기며 네 글자를 썼고 기나긴 한글 협서를 써내려갔다. 특히 있다는 것(有)에 아주 힘있는 신념을 담고자 했고, 산(山)이라는 표현에서 신문사의 풍수(風水)까지도 들여다보려 했다 한다. 새벽에 후배 기자를 보내 글을 받아왔는데, 첫눈에 들어오는 고색창연과 묵직한 필의(筆意)가 범상함을 넘어있었다.


신문 사상 1면에 서묵 네 글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서예계에선 이 날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신문사 내의 인재를 중시하고,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을 부각시키고, 인간의 창의와 유연함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의 번성이 미래사회의 핵심코드임을 주창한, 창간정신은 그대로 '유선명산'이 되었다. 많은 기업인들 앞에서 아시아경제 사장이 목소리를 높여 설명한 것도 그런 정신이었다.

산이 높다고 명산이 아니다. 물이 깊다고 영수(靈水)가 아니다. 산에는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 되고 물에는 용이 살아야 신령한 못이 된다. 옛 사람의 표현인지라 신선이나 용이란 것이 '흘러간 옛노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신선은 산을 두렵게 만드는 호랑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용과 호랑이는 하늘과 통하는 신령한 존재라고 믿었던 애니미즘과 토속신앙적 사유 체계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지닌 '영(靈)'의 함의이다. 그것은 지금 개념으로 번역하면 '스피릿'이 아닐까 한다.


집단 속에 들어있는 스피릿의 핵심, 가슴 속에 크고 아름다운 비전을 지닌 리더, 뛰어난 역량과 인내심을 지닌 인재들이 그 스피릿을 함께 품고 산을 명산으로 만들고 물을 영수로 만드는 그 가슴 뛰는 프로젝트가 '유선명산' 네 글자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고 할만 하리라.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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