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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Feb 02. 2016

42도의 쾌감

옛 사람들이 유상곡수(돌아가는 물에 술잔 돌리기) 놀이를 할 때나 세족계(洗足契)로 모였을 때, 물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읊었던 일에는, 그들 나름의 미립이 있지 않았나 싶다. 

우선 물의 서늘하고 생동감있는 기운이 발바닥과 발등을 가볍게 주무르는 효과가 있고, 발가락 사이로 물이 지나가니 그 또한 쾌감이다. 이런 직접적인 기분 말고도, 산 속의 청신한 기운과 계절의 공기, 그리고 약간 비릿하면서도 기분 좋은 물냄새와, 코끝을 톡톡 치면서 건너오는 나무와 꽃의 향기, 그리고 새소리와 물소리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울리는 화음, 햇살이 나뭇잎을 때려 흔드는 귀여운 풍경들에, 이제 막 시어(詩語)를 물어낸 마음의 날렵한 헤엄질까지. 이 다채로운 공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불렀으리라.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물의 온도와 움직임이 발끝에서 몸 전체로 퍼지면서 이윽고 머리 끝까지 서늘하게 하는 내부순환의 즐거움. 이 현상은 그들이 시와 음악을 즐기는데 아주 중요한 몫을 했을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발을 담그는 일의 상쾌함. 저 푸른 계곡과 포석정이 아닐지라도, 전기 코드가 달린 작은 대야 하나가 이걸 가능하게 한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온천수같이 물이 보글거리면서 온기를 유지해주는 족욕기는 뜻밖에 큰 일락을 선사하는 바가 있다. 

족욕을 하면서 깨닫는 바는, 이른 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정밀해지는 것이다. 처음엔 맨숭맨숭하여 이걸로 과연 땀이 날까 싶은데, 한 30분 앉아 있다 보면 영락없이 굵은 땀이 송알송알 맺혀 흐른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해도, 발끝에서 시작된 따뜻함을 받아,  몸 속에서 많은 존재들이 서로 온기를 물고 다니며 머리 끝까지 옮겨놓는 일을 한 것이다. 인간은 때로 조급하여, 소리없이 이루어지고 태없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러나 인(因)이 있으면 반드시 연(緣)에 이어지는 기본 원리를 족욕을 가르쳐 준다. 거기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굳이 인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하다. 한 30분 동안 허벅지에 놓인 수건 위에 다시 책을 놓고, 천천히 읽어가는 맛이란, 참으로 단맛이다.

또 족욕은 아랫것들에 대한 귀함을 일깨워준다. 발바닥이란 정말 신체 기관 중에서도 밑바닥 존재이다. 그런 그가 뜻밖에 가장 먼저 온기의 대접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걸 다 소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경로(經路)임을 선선히 시인하고는, 온 몸으로 그 따뜻함을 나눠준다. 세상이 잘되려면 저런 통로가 많아야 한다. 상의하달보다 하의상달이 필요한 이유를 저 발바닥에게 물어보라. 전체를 데우는 온기의 마법을 말이다. 우린 상기한다는 말을 쓴다. 상기란 아래서부터 위로 돋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모든 설렘과 활발한 운동의 모든 에너지는, 저 상기의 법칙에 숨어 있다. 아래의 자율이 위로 올라가면서 내부의 탐욕과 부패들이 저절로 정화되는 원리 또한 족욕의 한 매력을 구성한다.

이 발바닥 목욕에서 내가 받는 가장 행복한 '필'은 42도에 대한 감각이다. 발이 느끼는 따뜻함의 정점이 내게는 딱 42도다. 그것보다 1도라도 낮으면 서늘하게 느껴지고, 1도라도 높으면 뜨거워 발을 빼고 싶다. 이 전기 기구가 신통한 게 그 온도를 딱 유지해준다는 점이다. 45도 쯤 되면 어떻게 될까. 발이 화상을 입을 것이다. 35도 쯤 된다면? 너무 싱겁겠지. 37.5도의 체온을 지녀야 하는 항온동물이 유지하는 온도의 쾌감 42도.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말하자면 저 적온(適溫)을 설계해서 인간의 통점이나 감각에 심어놓은 이는 누굴까. 조물주는 정말 놀라운 설계사다. 빈틈없는 공학도다. 더 뜨거우면 다친다. 너희는 거기까지만 즐겨라. 만약 조물주가 인간에게 심술을 부린다면, 저 적온의 잣대를 슬쩍 50도 쯤으로 옮겨놓으면 되리라. 그러면 인간은 모두 즐거워하다가 발을 데고 말리라.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의 감각은 저마다 쾌점(快點)과 통점(痛點) 사이에 철조망이 쳐져 있다. 기쁨도 그렇고 슬픔도 그렇고 아픔도 그렇고, 섹스도 그렇다. 너무 기쁘면 안되고 너무 슬퍼도 안되고, 너무 아파도, 너무 섹스에 탐닉해도 안된다. 신은, '지(止)'를 말하는 거기에 있다. 화담 서경덕이 황진이 앞에서도 꿈쩍 안했던 그 지지(知止)의 도가, 바로 신의 충고를 들을 줄 아는 지혜가 아니던가. 이 뜨겁지 않음과 안 뜨겁지 않음 사이. 나는 행복하게 발을 담그고 책을 읽는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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