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적인 것을 절대가치로 삼지마라
제2장 천하개지미(天下皆知美), 아름다움과 착함의 가치를 습격하다
하늘아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지만
이는 악한 것일 수 있다
모두가 착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착한 것이라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없음과 있음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며
길고 짧음은 서로의 형태를 보완하는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것이며
목소리와 악기소리는 서로 화음을 이루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조물주를 닮은 사람은
일하지 않은 듯 일을 처리하고
가르치지 않은 듯 가르침을 행하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만들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고
생겨나게 했으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했으면서도 티내지 않고
공을 이뤘으면서도 이룬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결코 집착하지 않기에 그것을 놔버린 적도 없다
도덕경 제2장 天下皆知美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 현상적인 것을 절대가치로 삼지마라
제1장에서 노자는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함께 조물주의 뜻을 품고 있다고 말한 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적인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흔든다. 현상적인 것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상적인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근원적인 것을 놓치는 이유라는 것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기습적인 방식으로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자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러면 누구누구요. 라고 자기가 아는 예쁜 여자를 거명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그 여자가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쁜 모씨보다도 더 예쁜가? 아니 그렇지는 않네요.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쁘다고 하는 것, 착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게 묻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네 그 여자가 왜 예쁘다고 생각하나? 우선 예쁘게 생겼고 조물조물 시원스럽게 생겼고 키도 적당하고 몸무게도 알맞고 목소리도 곱고 태도도 상냥해서 예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미추와 장단과 경중과 전후와 음성까지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니, 그것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경계를 오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세상 만물이 상대적인 가치 위에 있는 것일 뿐인데,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세상만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노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속에 숨어있는 상대성을 열거한다. 있는 것이 아름답고 없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없어야 있는 게 생겨날 수 있다. 있어야 사라질 수 있다. 어느 게 낫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어려움은 좋고 쉬움은 나쁘다? 그렇지 않다. 길고 짧음과 높고 낮음도 그렇다.
▶ 100% 아름다움이나 100% 착함은 뭔가 잘못된 게 숨어있다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경우, 노자는 세상의 상식적인 인식의 허점을 꼬집으며 자신의 논리를 펼쳐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100%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100% 맹신 자체가 추악함이나 불미스러움이라는 관점이다. 이에 덧붙여 100% 선한 것 또한 있을 수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왜 그럴까. 자연 혹은 조물주는 세상의 존재를, 불완전 속에서 보완하면서 서로를 완성해가도록, 프로그램을 짜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사상에 대한 반격이다. 즉 아름다운 것과 착한 것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과장해 세상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임의적으로 어떤 가치를 내세워 세상을 그것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노력은 추악하며 나쁘다는 비판이다.
조물주는 작위적인 뭔가를 하지 않고 굳이 논리로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사물이 이미 상대적인 짝이 있어 서로 뭔가 하고 있고 서로를 말없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했으면서도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자연을 그대로 둔다. 소유하지도 않고 티내지도 않고 그것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한번도 이 자연 속에 들어있는 '도(道)'에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다.
상대적인 것이 저절로 움직이는 그 속에 도가 있으며, 어떤 특징이나 가치를 결코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놔둔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보성이 스스로 자연을 조절하며 세계를 꾸려가도록 생태계를 기획해놓았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도의 법칙(섭리)으로 자연 속에 스며들어있다는 게 노자의 주장이다.
▶ 아름다운 여자는 왜 아름답지 않는가
제1장에서 인간의 뇌리에 서로 단단히 붙어있었던 명칭(名)과 근원(道)을 떼어 생각하게 한 노자는 역사를 근원의 시대와 명칭의 시대로 나눈다. 명칭의 시대가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 대해 일깨운다. 문화나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칭의 시대'와 같은 말이다.
만물은 이름으로 인식되고 이름은 바로 본질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이 아니기에 본질이 오히려 가려지고 등한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명칭의 시대에 근원의 본질을 찾는 방법은 명칭에 구애받지 않고 근원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름이 없던 시대에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의 기틀에 일대충격을 준 노자는 바로 개념이 이룬 가치체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제2장이다. 먼저 거론한 것이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쉬운 미(美)의 문제다. 아름다운 것은 진짜 아름다운 것인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노자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들로만 되어 있다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것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상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상황을 말한 것이지 추함이라는 상대적인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젊은 날의 질풍노도를 만들어내는 기폭제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과 빛나는 피부, 눈부신 신체의 굴곡들이 자아내는 아우라는 이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석할 틈도 없이 한 영혼에 들이닥쳐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새겨진다. 한 여인의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우수의 눈빛, 한 가닥의 엷은 웃음이 일으키는 빅뱅은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은 잠정적이고 한시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불안한 어떤 상태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 절대적인 미의 여신들이 가차 없이 늙어가는 것을 보며 깨닫는다. 늙어가는 자신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미는 그런 주인을 배신하고 하나씩 패를 뒤집어 추(醜)를 보여준다. 세상 모두가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이에는 이미 추악이 숨어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노자다.
▶ 절세미인 경국지색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름다움에는 추악함이 있다. 추악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이란 상반되는 개념이 서로를 길항하는 개념이 가치의 실체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예찬하는 것은 추악함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미추는 조물주가 프로그램화해놓은 감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뿐애며, 따라서 미가 절대불변의 가치일 수 없다는 얘기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것은 대개 생명에 가깝고 추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 인간이 죽음을 회피하고 생기를 증대하려는 무의식이 이런 가치를 조장한다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미에 대한 가치 교정부터 나선 까닭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충격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쁜 여성을 예를 들고, 그녀도 역시 추악함과 끊임없이 다퉈야 하는 잠정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노자는 미와 대립된 개념으로 추(醜)를 쓰지 않고 악(惡)을 쓰고 있다. 두번째 구절에는 바로 선이 나오는데 미추와 선악을 세트로 썼으면 좋았을 법 한데, 왜 미악(美惡)과 선불선(線不善)으로 맞세웠을까.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배치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는 아름다움이 지닌 악함을 내세워 설득력을 높이려 했던 것 같다. 공자와 노자가 살던 시대 이전의 중국 고대국가 하나라의 걸왕을 보라. 말희가 망치지 않았던가. 은나라 주왕을 녹인 달기, 주나라 유왕이 푹 빠졌던 포사,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여희는 모두 경국지색의 악녀로 손꼽혔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증오대상이었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떠받들던 그녀들이 결국은 악(惡)과 증오(憎惡)대상이 아니었던가. 노자가 미와 악을 병치한 건 그런 역사적 교훈을 읽었기 때문이다.
▶ 권선징악을 비웃다
노자는 이쯤에서 '선(善)'의 문제를 꺼낸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당시 선을 부르짖고 다녔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공자이다. 공자의 논지를 흔드는 상대적 가치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공자는 '춘추'라는 역사책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이 책은 주대(周代)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한 242년의 역사서이다. 사관들이 편년체로 기록해놓은 것을 공자가 자신의 윤리적 관점으로 편집한 책이다. 공자시대의 좌구명이란 사람이 주석을 달아 펴낸 것이 '춘추좌씨전'인데 이 책은 '악은 징벌하고 선은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편집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공자를 예찬한다.
춘추좌씨전이 나온 이후 '권선징악'이란 말은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춘추의 편집자 공자는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라는 정언명령을 내린 위대한 아이콘이 된다. 공자가 인간을 넘어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춘추좌씨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도덕역사서에 감격하고 있을 때 "그건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노자다. 그토록 단호하게 선을 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노자는 공자 주장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는 권선징악론이 지닌 기계적인 잣대를 슬쩍 허물어뜨린다. "모두가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기엔 불선(不善)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선하지 않음이 세상에 넘치기에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람이 선한 얘기를 한다고 좋아라 하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세상을 그가 이미 전제하고 있기에 그것을 가치로 세일즈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공자로선 정말 듣기 싫은 시비였을지도 모른다.
선함과 선하지 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세상이 구분해놓은 가치일 뿐이다. 선한 것을 권한다고 반드시 선해지지 않으며 악한 것을 징벌한다고 악함이 제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조물주가 이미 그 상대적인 양상을 모두 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예찬하고 강요한다고 선한 세상이 되지는 않으니, 그 그늘과 이면까지를 생각해야 무리한 권선징악이 낳을 수 있는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가치로 세상을 한 줄로 세우려는 기획은 세상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역사를 통해 자주 깨달았다. 어떤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강제와 폭력이 발생하고 다양한 삶의 양식과 개별적인 주체의 선택을 무히사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제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그러면서 노자는 우주를 이루는 상보적인 존재양상을 죽 나열한다. 유무, 난이,장단,고저,음성,전후의 상대성을 보여주면서 선과 악이 하나의 모체에서 나온 양립하는 문제임을 설득한다. 악을 때려잡고 선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도덕전쟁을 벌이는 것이 세상을 경영하는 옳은 방식이 아니며 선과 악이 병존하며 길항하는 특성을 잘 파악해 자연스러움의 정도에서 그치도록 세심하게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하라." 이런 캐치프레이즈다.
▶ 공자의 '성인'과는 다른 노자의 '성인'
가치의 양면성을 강조하고 다른 가치를 억압하는 것이 세상만물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는 논지의 말을 한 뒤 노자는 '성인'이란 존재를 불쑥 들이민다. 공자는 유학자적인 전범을 보인 옛사람을 성인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상식으로 성인은 당연히 유학자였을 것이다. 공자가 평생 흠모했고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한 인물은 무왕의 동생 주공이다. 무왕은 동생인 주공을 전략가로 등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주공은 형님이자 천자인 무왕의 스승 역할을 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주나라 개국 초기의 국가질서를 세운다. 무왕은 집권한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주공은 왕위를 맡아달라는 청을 사양하고, 무왕의 아들인 희송에게 왕위를 잇게 한다. 이분이 성왕이다. 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주공은 제국을 섭정하는데 이때 나라의 기틀을 갖추는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시킨다. 주공이 세운 국가 시스템은 이후 천년동안 중국대륙을 이끈 핵심모델이 된다. 공자가 그를 주목한 것은 인품과 자질과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후국 노나라의 정치브레인이었던 주공의 성공스토리를 발판으로 노나라 출신이었던 자신의 사상적 권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유학자의 미덕과 실천력을 함께 갖춘 주공을 성인이라 일컬으며 그와 닮은 일이 바로 유학자의 길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노자는 전혀 다른 '낯선 성인'을 불쑥 들이민다. 노자의 성인은 주공처럼 정치가로 팔을 걷고 국가업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한 불언으로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큰 일을 성공시켜도 자신이 했다는 티를 내지 않고 공을 세운 뒤엔 그것에서 바람처럼 물러나는 분, 물러났지만 굳이 떠난 것은 아니기에 늘 그 자리에 계신 분. 이 분은 누구란 말인가.
노자의 성인은, 어떤 가치 쪽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위다.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언이다. 공자는 권선징악을 하라고 했으니 유위(有爲)로써 일을 처리했고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고 말을 했으니 유언(有言)이었고 주공의 공적에 머물러 있었으니 유거(有居)였다. 공자의 성인은 노자의 잣대로는 도저히 성인이라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이 글의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누구인가. 도덕경 내내 그는 이것만을 의식하는 듯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다. 그 분은 세상 천지만물을 만든 조물주다. binsom@copy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