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물었다, 도를 아십니까
제1장 '도가도(道可道)'의 충격 - 명실(名實)상부를 주장하며 입을 열다
도는 도일수 있지만 항상 '도'인 것은 아니며
명칭은 명칭일 수 있지만 같은 명칭인 건 아니다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는 명칭이 없었고
만물이 생겨나면서 명칭이 생겨났다
그렇기에 욕망이 없던 때는 그 묘(妙, 근원적인 것)를 볼 수 있었고
욕망이 생겨난 때는 그 요(?, 현상적인 것)를 볼 수 있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데서 생겨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둘 다 현(玄, 신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신비한 것이 또다른 신비한 것이니
모든 근원적인 것들로 들어가는 문이다
도덕경 제1장 '도가도'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 근원적인 것 = 도, 현상적인 것 = 명칭
도와 명칭(이름)을 맨먼저 거론한 까닭은,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을 나눠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도는 원천적인 것이며 명칭은 현상적인 것이다.
도는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 있었던 것이며 명칭은 사물이 생겨날 때 함께 생겨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욕망(즉, 生意)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땐 원천적인 것이 저절로 유통되고 소통되었다. 그때 도가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저마다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원천적인 것은 감춰지고 그 현상적인 것들이 유통되고 소통되었다. 그때 만물을 구분하는 분별의 상징인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은 동일한 것의 양면일 뿐이다. 둘 다 조물주가 지닌 뜻인 신비함을 가지고 있다.
근원에도 조물주의 뜻이 있고 현상에도 조물주의 뜻이 있다면, 현상을 보면서도 근원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명칭으로 드러난 사물의 세상에서 우리가 근원적인 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경 제1장이 말하고자 하는 교과과정 전체소개이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인 말이 없다.
▶ 도가도(道可道)의 충격
도가도(道可道)가 대체 무슨 뜻인가.
앞의 도는 수행이나 진리나 방법(way)으로 해석하고, 뒤의 도는 '말하다'라는 뜻으로 푸는 이가 있다. 도(道)가 말하다는 뜻으로 쓰인 용례를 들어보이며 설득력을 높이려 한다.
노자가 자신이 해야할 첫말을 하면서 도(道)라는 한 글자를 이렇게 다른 의미로 쓸 만큼 말솜씨를 부리려고 했을까. 도덕경은 시에 가깝기에 일상으로 쓰는 말들 중에서 생략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줄여서 간명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도가도는 도이가왈도(道以可曰道) 정도의 문장으로, '도는 도일 수(도로 불릴 수) 있다'라는 의미로 충분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앞의 도와 뒤의 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자는 왜 이 말부터 했을까.
도(道)라는 말은, 노자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길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그 길을 은유로 표현한 무엇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인 대상으로 생각해보는 게 쉬울지 모른다.
"길은 길일 수 있다" 즉 하나의 길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말을 더 분명히 하면 '도불가도(道不可道)이다. 길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 당신이 알고 있는 도는 도가 아닐 수 있다는 말
노자의 첫마디는 '도는 도일 수 있다'이지만, 뒤집으면 '도가 도 아닐 수 있다'는 비평적 발언이다.
세상에 도라는 말이 흔하지만 그 말들이 진짜 도를 품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도라는 이름을 쓴다고 도가 되는 건 아니란 얘기다. 왜냐하면 도는 말로 규정되고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노자는 말한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서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죠? 그 사람들이 그걸 도라고 말한다고 진짜 도는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도라고 표현한다고 그게 늘 도인 것은 아닙니다. 말과 도가 언제나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내겐 무한한 감동이었다. 관성적 생각을 깨고 개념의 너울들을 헤치고 들어가 그 속에 본질로 존재하는 무엇을 들여다보게 해준 명언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도라고 생각했던 그것부터 의심하라. 그건 도일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도라고 불려진 그것과 도의 진면목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의 사상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도의 근원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언급에 가까울 것이다.
도는 인간의 지각과 지식과 지혜가 깨달았다고 믿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며 더 가까운 것이다. 노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도가도'는 나의 지식과 나의 언어와 나의 인식을 뒤흔들면서, 본질에 대한 깊은 갈증을 이끌어냈다. 이른바 '도덕경적인 목마름'이다.
▶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無名)/그는 다만(天地)/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之始)/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有名)/그는 나에게로 와서(萬物)/꽃이 되었다.(之母)
김춘수의 '꽃'의 일부
이 구절은 마치 도덕경 제 1장의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를 직역한 것처럼 정확하게 상응한다.
'그는 다만 …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아직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 태동기의 카오스를 의미한다. '그는 다만'이 왜 '천지'와 같은 개념인가. 이때의 천지는 '분화되지 않은 우주'인데, 진짜 만물이 분화되지 않은 게 아니고 인간의 인식과 분별 속에 분화되지 않은 우주를 말한다. 이것이 서양 과학의 카오스와 노자의 카오스가 달라지는 지점이다. '다만'이란 말은 분별되기 이전의 우주를 표현하는 기막힌 낱말이 아닌가. 아직도 무엇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이 되었다'는 것은 분별과 인식의 세계인 문명세계로 접어든 것을 뜻한다. '나에게로 와서'가 왜 '만물'로 치환될 수 있을까. 나에게로 온다는 것은 내 인식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인식세계 속에 들어와야 만물은 만물이 될 수 있다. 들어오지 않은 것은 카오스상태로 있는 것이다.
몸짓은 시(始)의 놀라운 번역이다. '시(始)'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정자가 막 결합하기 직전의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어떤 몸짓의 기미와 일치하지 않는가. '그는 나에게로 와서'라는 말은 성적 결합의 암시이다. 내가 그것의 이름을 꽃이라고 불렀을 때, 나라는 인간과 이름없던 저 붉은 것은 마치 섹스를 하듯 서로 결합해 '꽃'이라는 것을 낳는다. 꽃을 낳았으니 꽃의 어머니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만물의 어머니'이고 김춘수가 말하는 '꽃의 탄생비밀'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天下有始 以爲天下母)/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旣得其母)/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復知其子)/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旣知其子 旣得其母 沒身不殆)
김춘수의 '꽃'의 일부
이 구절은 노자의 주장들이 무르익는 도덕경 제52장의 구절들을 빼다박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은 천하가 시작된 비밀인데, '꽃이라고 호명함으로써 비로소 꽃을 낳아 만물의 시작을 이룬 것처럼'이란 의미이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이란 말은 '내가 낳은 꽃에 알맞는'이란 뜻이다. 꽃의 빛깔과 꽃의 향기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어머니의 격(格)을 얻을 수 있다. binsom@copy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