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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Oct 14. 2015

트라우마에 관하여

빈섬의 시네마모텔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이란 특이한 제목의 영화를 본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작품에 선정된 것이라 하고, 장편영화를 처음 찍는 감독과 첫 출연하는 여주인공의 기량이 돋보인다는 평가들이 여러 곳에 올라와 있다. 제목은 주인공이 불렸던 이름이다.

 


마사 마릴린과 마시 메이 마릴린, 그녀는 이 두 가지의 세계를 넘나든다. 마시 메이 마릴린은 원래 이름이다. 부모 없는 가정에서 자란 소녀였던 그녀는, 언니 루시 마릴린이 외지로 대학 공부를 위해 떠나면서 친척집에 맡겨진다. 구속이 싫었던 마시 메이는 뉴욕 캐츠킬의 한 농장으로 탈출한다. 이곳은 사회의 규범과 구속에 저항하여 자유로운 영혼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룬 공동체였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고 할 만큼 역사가 오래된,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히피문화'의 한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무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광신도 집단에서 보이는 우상화와 폭력과 범죄, 난교,억압과 감금, 세뇌와 착취 따위가 그것이다. 마시 메이는 그곳에 들어서면서 자유와 새로운 소속감을 느끼며 설레지만(그곳 리더가 이름도 마사로 바꿔준다), 2년여 동안의 공동체 생활은 행복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녀를 추적하는 농장의 사람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결국 언니 루시에게 연락해 언니 부부가 머무르고 있는 별장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영화는 마사로 지냈던2년여의 '미스터리 생활'을 겪은 여인이, 마시 메이로 복귀하면서 겪는 부적응과 기억의 착란과 공포를 따라가고 있다.

 


몇 가지 부적응들. 사람들이 오가는 한낮에 강물 속으로 속옷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언니 부부가 성관계를 하고 있는 이불 속으로 느닷없이 뛰어들어 함께 눕기도 하고, 언니에게 결혼한 사람들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게 사실이냐고 묻고, 아기를 낳으면 나쁜 엄마가 될 것이라고 극언을 하고(아마도 공동체에서 세뇌받은 내용들일 것인 듯 하다)파티에서 낯선 남자에게 욕설을 한다. 그녀의 기억 속을 오가는 몇 가지 트라우마들. 공동체에서 제의(祭儀) 의식처럼 치러지는 성관계, 도둑질과 살인의 기억, 캐츠킬이란 지역명에서 착안한듯 총으로 고양이 쏴죽이기. 착란과 불안과 공포들. 언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나왔느냐고 묻고, 농장 사람들이 헛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언니가 자신을 요양병원으로 보내려고 하자,제발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기도 한다. 한 사람 속에 두 명의 마릴린(마사와 마시 메이)이 서로 싸우며 갈등을 벌이면서 영화는 어떤 결론을 내지 않은 채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극적인 인생의 전환기에는, 저 정도의 부적응이 아니더라도 내밀한 충격과 고통들이 끈질기에 따라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직(移職)이나 결혼과 이혼 또한 지난 시간의 자아와 그곳에서 완전히 탈출하지 못한 자아가 상당 기간 동안 서로 뒤섞이며 간섭하는 '마릴린의 시간'을 겪을 수 밖에 없다. 20여년 청춘을 바치며 열정적으로 일했던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물러나와 겪는 인생의 혼선, 거대한 환멸, 뒤틀린 격정과 분노, 절망과 불안 따위도, 자기 안에서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마릴린 증후군이 아니던가. 저 여인처럼 한 삶을 도주하듯 빠져나온 많은 이들에게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부드러운 배려와 끈질긴 인내심의 환경이 필요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은 몰이해와 냉대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구속은 안전하고 편안하지만 답답할 수 밖에 없고, 자유는 후련하고 새롭지만 불안하고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구속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다시 구속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의 넘나들기는 인간 역사의 동력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경계 지점에서 생기는 상처들은 인간이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잔상'이 끼치는 부작용들이다. 영화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을 몇번 곱씹어 보며 마음 속의 트라우마를 돌이켜 생각한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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