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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Oct 18. 2015

김원길, 대원군, 조지훈의 풍경

안동과 무섬마을 사이


미닫이에 푸른 달빛
날 놀라게 해

일어나 빈 방에
좌불처럼 앉다.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버레소리 잦아지는
시오리 밤길

달 아래 그대 문앞
다다름이여.

울 넘어 꽃내음만
한참 맡다가

달 흐르는 여울길
돌아오나니

내 아직 적막,
길들지 못해.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김원길.



안동지례예술촌은 1663년(현종4년)에 지은 의성김씨 김방걸의 종택이다. 지촌(芝村) 김방걸은 숙종때 대사헌을 지낸 문인이다. 1989년 임하댐이 건설될 때 지례마을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13대 종손인 김원길(시인)은 물 속의 옛집을 들춰 건축의 뼈대들을 꺼내, 산기슭으로 옮겼다. 4년간의 공사 끝에 옛 모양새를 수습하여 지례예술촌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문학인 예술가들에게 개방하여 창작의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지촌의 사랑채인 무언재의 왼쪽에는 재실로 쓰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그 앞에 '하남(河南)'이라는 글씨가 있다. '석파(石坡)'라는 호가 협서되어있다. 석파는 흥선대원군이다. 안동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산골짝 중의 산골짝에 석파가 다녀갔단 말인가? 어찌 하여 이 글씨가 여기에 걸려있을까?


석파는 대원군이 되기 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서울에서 권력을 쥔 안동김씨들이 왕권을 수호하는 핵심이던 왕실 종친부 남연군의 아들을 주시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 하고 파락호 행세를 한다. 이 무렵의 일이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그는 경북의 양반네 집에서 기식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가 찾아간 곳은 영주의 무섬마을(水島리)이었다. 낙동강의 상류천인 내성천이 겹쳐 오므린 두 손아귀처럼 둥글게 돌아가는 가운데에 들어앉은 기이한 마을이라, 물 속의 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래 이 마을에는 반남박씨인 만수재 박수가 살았는데, 그의 증손녀가 선성김씨와 맺어지면서 김대의 집안이 함께 세거(世居)를 하게 된다. 석파는 외나무다리가 놓인 마을을 들어서면서 등 뒤에 아홉 용이 마을을 향해 절하고 있는 멋진 소백 연봉(連峰)을 돌아다 보았으리라.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인 선성김문의 해우당(海遇堂)이었다. 무섬에서 바다를 만나는 집이니 호방하지 않은가. 해우당 김낙풍은 서울에서 온 어마어마한 귀빈을 깍듯이 맞았다. 석파는 거기에 머물며 마을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기도 하고 묵난을 쳐주기도 한다. 해우당에 걸려있는 현판이 석파 글씨인 것은 그런 인연이다.


한편 의성김씨의 한 여인이 선성김씨네의 며느리 중에 하나였는데, 우연히 사가에 들른 지촌의 후손이 석파에게 청을 하여 글씨를 받았다고 한다. 무엇을 써줄까 묻는 질문에 물의 남쪽에 있으니 '하남'이라고 주문했다. 한편 여기엔 이설이 있기도 하다. 석파가 써놓은 글씨 중의 하나를 그 며느리가 친정댁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금 품위가 떨어지지만 이 또한 있을 법한 일이다.


한달 가량 석파는 무섬에 머물렀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이 주인장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대접할 양식이 다 떨어져가는 게 보인다. 시골에서 귀빈을 대접할 수 있는 '캐퍼'가 한달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전국에서 밥 빌어먹는 일을 전문으로 한 석파였는지라, 대강 분위기를 꿰고는 작별을 고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천을 건너는 길인데, 뒤에서 하인이 물을 첨벙거리며 허겁지겁 달려온다. 해우당의 사돈집에서 이 왕실의 손님을 대접하느라 양식이 떨어졌을 것을 짐작하여 곡식을 부쳐온 것이었다.


"나으리. 나으리이~ 사가에서 곡물이 도착했으니 다시 말을 돌리셨으면 고맙겠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석파는 고맙고 기특한 시골의 인심에 껄껄 웃는다.

"허허허. 그간 오래 있었소. 천하의 막된 떠돌이를 내성천처럼 품어주시니 고맙다고 주인장에게 이르시오. 내 두 배로 대접받는 걸로 알고 가겠습니다."


해우당의 이같은 대접은 나중에 석파가 권좌에 올랐을 때 어떤 보은으로 돌아왔을까. 그것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오랫 동안 이 일은 석파 글씨와 함께 이 집안의 큰 자부심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해우당의 옆집에는 김뢰진 가옥(무실이라 부른다)이 있는데, 이곳은 시인 조지훈(1920-1968)의 처가 집안이다. 장인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성규의 집은 멸실되었지만 무섬은 조지훈의 감성을 이룬 시향(詩鄕)이다. 영양 주실마을 출신인 동탁 조지훈은 1939년 열아홉살에 무실로 장가를 온다. 혜화전문학교를 다녔던 그는 무섬 출신인 김용진과 친해지면서 이곳으로 방학 때면 놀러왔던 인연이 있었다. 아내 김난희에게 줬을, 아름다운 무실을 읊은 시가 남아있다. 난희의 눈이 되어 멀어져가는 자신을 그려보며 쓴 '무섬판 가시리'이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별리 / 조지훈




섬과 휘감은 물길이니 이별을 말하기에는 호재이지만, 아내에게 이런 슬픈 시를 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묵신행(결혼식 당일 여자의 집에서 자는 풍습)으로 장가를 온 신랑이 주기에는 부적절한 시가 아닌가. 이 시를 떠올리면 나는 자꾸 동탁의 다른 시 '사모'의 구절들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해야할 말이 남아 있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조지훈의 '사모' 중에서




이 비련을 가슴에 품었던 사람이 바라본 무섬은 존재 전체를 휘어감아 가둔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고통들을 진정시키면서 삶의 성숙을 이뤄갔으리라. 시인 김원길의 고모할머니가 가마로 강을 건넌 뒤에 파락호 하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건너가고 그 뒤에 조지훈이 미묘한 감정으로 내성천을 건넌다. 시간의 겹쳐진 주름이 내성천에 잠깐 풀어졌다 감긴다. 강물 하나가 화엄이 아닌가.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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