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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Oct 18. 2015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거리

생각의 풍경

관계가 견딤을 생각할 무렵이라면 악화(惡化)를 떠올리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오래된 관계는 견디는 관계이다. 


관계가 서로의 자력(磁力)으로 유지되는 시절은 사실 관계라기 보다는 호기심과 욕망에 가깝다.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면, 그 뒤엔 관계 저편에 있는 존재만이 남는다. 서로를 힘차게 당기지 않는 관계는, 두 가지 위험에 봉착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여전히 자력이 작동하는 것처럼 꾸미는 가식이나 위선의 개입이며, 또 하나는 자력이 소진되는 거리까지 멀어져서 서로 떨어져버리는 관계 이탈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서로의 자력의 크기가 다를 때이다.(진짜 다르거나 다르다고 인식할 때이다.) 한쪽은 자력을 발생하는데 다른 쪽은 그게 아니라면, 양쪽이 크게 괴로울 수 밖에 없다. 한쪽은 다른 쪽을 구속하고 감시하느라 괴롭고 다른 쪽은 그 구속과 감시에서 벗어나느라 괴롭다. 


이때 서로의 괴로움을 줄일 수 있는 타협이 필요해진다. 관계는 유지하되 아주 멀어지지 않는 일정한 거리. 무심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되 구속하는 것도 아닌. 상대방과의 거리 두기. 너무 가까워서 피곤한 것도 아니고 너무 멀어져서 서운한 것도 아닌, 이래저래 견딜 만한 거리. 


이 관계의 양상은 사실,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관계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카루스처럼 다가가면 타버리고 멀어지면 추락하는 그 경계. 알맞은 빛과 온기를 유지하는 그 거리. 관계에 필요한 에너지와 존재 자신의 자유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공급받을 수 있는 축복.  


관계는 필요한 것이며, 관계로부터의 자유 또한 필요한 것이다. 거리를 재는 마음엔, 사랑과 고독의 넘나드는 경계가 있다. 본질적이지만 아픔이 서성거린다. 견딜 수 없는 거리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에 데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거리들이 우리를 얼마나 고립시켜 왔던가.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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