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 아래서

노래와 시, 그리고 스토리들

by Binsom Lee

이 넓은 세상을 쉬어 갈 수는 없나
내 마음 저 하늘 회색빛 구름같이
너무도 넓은 그 곳은 끝이 없어서
아무도 내 지친 몸 보질 못하지

얼마나 더 가야 푸른 초원이 있나
그리운 그대의 작은 집을 찾아서
잊었던 너의 노래 귓가에 들리면
참았던 내 눈물도 흐를 것 같아

저 멀리 교회 종소리 들려오면
새벽은 구름사이로 빛을 주네
내 마음 총을 내던진 병사처럼
언제나 편히 쉴 수 있는지

눈물이 흐르면 그저 훔쳐 버렸던
어릴적 내 모습 이젠 웃음 나지만
저녁놀 지는 바닷가 혼자 걸어도
언제나 가슴엔 널 품고 있었지

눈물이 흐르면 그저 훔쳐 버렸던
어릴적 내 모습 이젠 웃음 나지만
저녁놀 지는 바닷가 혼자 걸어도
언제나 가슴에 널 품고 있었지



이문세 '로뎀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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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쉬네 로뎀나무 아래서
그동안 많이 아파했으므로
이 무사한 고독은 그늘처럼 달콤하네
당신과 함께 흐르던 평창강
지금도 흐르네 당신과 함께 있던
그날처럼 쉬지 않고
별들이 발을 담그네
많이 지쳤으므로 당신 미워하는 일도
흘러갔으므로
나는 쉬네 로뎀나무 아래서
총을 내던진 병사처럼
한숨 돌리네 함께 듣던 이문세처럼
한숨을 섞어 노래 부르네
자그락자그락 돌여울을 켜며
맨발로 건너간 뒷모습을 부르네
내 청춘 평창강 당신의 강가에서
흘러가는 것들을 보네
보낸 것들을 돌아보네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남긴 이 평화로운
로뎀나무 아래서 나는 이제야
당신이 보이네 이 후회마저 흘러가리

로뎀나무 아래서 나는 쉬네
그때 떨어진 별들도 머뭇머뭇 흘러갔으리
평창강은 당신 뒤로 끝없이 흐르네


이빈섬의 '로뎀나무 아래서'




로뎀나무 아래는 쉼터다. 쉼없이 겅중대는 삶에서, 휴식이란 얼마나 달콤한 평화인가. 우리가 꿈꾸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휴식에 관한 주석이다. 나는 평창강 옆에서 드러누워 별을 들여다볼 수 있는 휴식을 만났다. 우리가 사랑이란 사건에 대해 가지는 치명적인 오해는 그걸 '작업'으로 생각하는 점이다. 사랑은 휴식이다. 널브러져 가만히 있는 시간의 정적이다. 로뎀나무 아래, 당신과 내가, 어느 날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을 때. 그 이상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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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이다 하고..."(열왕기상 19장 4,5절)



엘리야의 고난이 나오는 성경의 저 구절은 치열한 종교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학살에 가까운 광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자지구의 비극을 떠오르게 한다. 누적된 갈등과 정치적 게임이 얽힌 전쟁이지만 그 속에는 종교적 신념이 다른 종교에게 보이는 무자비한 면모가 숨어있다 할 만하다. 이교도와의 타협이나 공존은 이들의 믿음 속엔 없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였던 제7대 아합왕은 야망이 컸던 군주였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지중해안의 강국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한다. 그런데 이 나라는 비와 풍년의 신인 바알신과 바다를 다스리는 모신(母神) 아세라신을 섬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공주는 아합왕과 결혼을 하면서 그 조건으로 자기 나라의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아합은 신앙심이 그리 두텁지 않았던 듯 하다.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는 종교 쯤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공주의 제안에 오케이를 하고,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짓는다. 또 왕과 왕비는 함께 들어가서 제사를 지낸다. 또 아합은 아세라 여신의 상을 세워 경배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어가자 하나님은 크게 화가 났다. 그런데 의아한 것이, 저 괘씸한 일을 한 아합왕을 직접 손보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인 방법을 쓴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신앙을 이 지상에 스스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신의 사려'가 있지 않나 싶다.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현실적인 정치 권력을 하나님이 바로 공격하는 것은, 단순한 응징일 뿐이지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다. 신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처럼 결과를 살피지 않는 무모한 폭발이 아니라, 사태를 바로잡는 반작용의 에너지라는 생각이 이 맥락 속에 숨어있지 않나 싶다. 하나님은 일차 경고를 한다. 이스라엘 땅에 앞으로 몇 년 동안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막인 땅에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전체에 대한 사형선고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물론 신앙의 '귀'를 가지고 있지 않는 아합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길르앗에 사는 예언자 엘리야에게 경고메시지를 주고 전하라고 하였다.


엘리야는 바알신전과 아세라 여신상을 지나 아합왕에게 찾아갔다. 그는 간결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경고문을 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약간 의아한 대목이 있다. 신은 경고를 하면서 가정법을 쓰지 않았다. 만약 인간이라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교도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충직한 믿음을 보이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서 없이 바로 '몇 년간의 대가뭄'만을 언급했다. 왜 그랬을까. 몇 년간의 대가뭄은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신의 권능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심령의 대가뭄'에 상응하는 일로서 그것과 그것은 같은 크기의 재앙임을 일깨우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을 압박하여 흥정하는 '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의 언어로 담담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엘리야는 인간이다. 아마도 아합왕에게 찾아간 일만 해도 매우 큰 위험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릿시냇가'에 그를 숨겨주고 까마귀들을 통해 떡과 고기를 배달케 한다. 까마귀는 옛날엔 하는 일이 참 많았던 듯 하다. 그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앞으로 있을 아합왕의 보복행위를 피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수년 간의 기근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점지해준 것이다. 시냇가는 마르지 않아 늘 목을 축일 수 있고, 또 까마귀 음식점에서 늘 배달 나오니 먹거리를 위해 이동할 필요가 없다.


과연 이스라엘엔 비가 오지 않았다. 3년 동안 대지가 바싹 말라버렸다. 아합왕과 이세벨왕비는 바알신에게 간곡히 기도를 올린다. 시돈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불러 기우제를 지낸다. 850명이 초호화 이벤트를 벌이며 비를 불렀으나 하늘에선 응답이 없었다. 구름조차 끼지 않았다. 이세벨은 분노에 차서 이런 재앙을 경고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전국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하나님이 숨겨둔 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이세벨은 85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빌었는데도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말하는 의미를 왜 새겨보지 않았을까. 선지자들이 무능한 것이라면 그들을 모두 처벌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이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풀어가려 하고 있다. 엘리야를 죽이면 비가 올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세벨의 분노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째는 이 사태를 그녀가 상당히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종교전쟁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이스라엘 왕국에 퍼뜨린 종교가 위기에 봉착한 국면에서 문제를 자신의 종교에 돌리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를 없애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둘째는 종교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오류'의 신념에 빠져 있었던 까닭이다. 믿음은 잘못 되거나 틀릴 수가 없다. 믿음이 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인간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세벨은 엘리야를 찾지 못하자 유대의 선지자들을 대학살할 계획을 세운다.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합왕의 궁내대신인 오바댜가 그 중 100명을 숨겨줬다고 한다.


대학살 이후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명령하여 아합왕을 만나러 가도록 한다. 기약 없는 가뭄의 재앙에 시달리고 대학살에 제풀에 지쳤던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마치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을 만난 것처럼 부들부들 떤다. 그러면서 묻는다. "네가 이 나라를 재앙에 빠뜨린 장본인이야?" 그때 엘리야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오. 이 나라를 재앙에 빠뜨린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좇은 아합왕 당신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왜 아합은 이 '건방진'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토록 분노에 차 있었던 왕이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로 벴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흔들리는 아합'을 본다. 아합은 원래 유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나 믿음이 약해 정치적인 결탁에 종교를 팔아먹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자신을 이토록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 자각이 언뜻 들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저 선지자가 와서 저토록 당당하고 준엄하게 말하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합의 심령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슬슬 흔들리는 아합은 이제 엘리야에게 '신앙의 게임'을 주문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선 참으로 딱한 '게임'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을 시험에 들게 한단 말인가. 그런 징험을 보여줘야 믿겠다는 인간들을 구원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요즘도 '존재 증명'을 하라고 요구하는 인간들이 많지만, 지금과 그때는 상황이 좀 달랐나 보다. 이제 믿음을 왕국에 뿌리내리는 하나님으로선 조금 구차한 '일'이지만 피하지 않고 이 일을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합왕은 "어느 신이 진짜 신인지 가려보자. 유대인의 신과 바알신 중에서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지 내기를 하자"라고 엘리야에게 제안한다. 내기라고 했으니 비를 내리지 못하는 쪽을 모두 죽이겠다는 뜻이리라. 아마도 왕은, 어느 신이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 않느냐는 '정치적 계산'도 깔고 있었을 것이다. 갈멜산에서 사활을 건 종교게임이 벌어졌다. 이쪽은 엘리야 한 사람이었는데 저쪽 바알팀은 450명이 참여했다. 제사에 쓰이는 제물은 똑 같이 송아지 한 마리, 제물에 불을 붙이는 일은 금지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첫날.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생쇼'를 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둘째날, 엘리야가 12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주변에는 도랑을 파고 단 위에는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올린다. 12통의 물을 길어와 제물 위에 붓는다. 여기서 신기한 것. 그 가뭄에 12통의 물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신이 점지해준 그 그릿시냇가의 물을 옮겨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물을 축이는 것이 제의의 핵심 포인트였던 모양이다. 엘리야가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송아지와 나무, 돌, 흙을 태운다. 그리고 흐르던 물을 말려버린다. 계속해서 엘리야가 기도를 하자 하늘에 손바닥 만한 구름이 생겨나더니 점차 커지며 비를 쏟는다. 구경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미하자, 바알의 선지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때 엘리야와 군중들이 갑자기 잔혹해진다. 바알교를 믿는 이들을 모두 붙잡아 기손시냇가에서 죽이고 만다. 갈멜산의 엘리야 기념교회엔 엘리야가 바알교도의 목을 밟고 있는 상이 서있다. 450명의 이교도에게, '비를 내리지 못하게 했다'고 무차별 살인테러를 가하는 저 장면은, 아까 유대교도들을 죽인 이세벨처럼, 가자지구의 살육을 떠오르게 한다.


아합왕은 이 장면을 보고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성으로 달려가 이세벨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 그런데 왕비는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 회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세벨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사실 이세벨로서는 엘리야를 응징할 명분이 별로 없다. 비를 내리게 하는 게임은 왕이 제안한 것이었고, 엘리야는 승자였다. 아합왕이 '비를 부르지 못하면 죽음을 부를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을 것이기에,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은 것 또한 게임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왕비는 분노에 눈이 멀었다. 그런 맥락들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족이자 종교적 지도자 450명을 때려죽였다는 대목에서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다른 믿음끼리의 진지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진지전을 치르면서 생겨난 원한과 증오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의 골을 만들기에 저토록 질기게 이어져온 것이 아닐까 한다. 이세벨의 분노 또한 그런 측면의 증오일 수 있다. 가정하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지만, 엘리야가 이교도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진짜 믿음의 절실함을 전파하는 긴장감이 덜했을까. 나로선 알 수 없다.


여하튼 엘리야는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멀리 브엘세바라는 곳까지 도망을 갔다. 거기에 동행했던 도우미를 남겨두고 하룻길쯤 되는 광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살인적인 햇살이 내려쬐는 사막에는 그늘도 없다. 오직 1미터 쯤 되는 로뎀나무 뿐이다. 그는 몸을 오그려 로뎀나무 그늘에 쉰다. 안 그래도 키작은 나무가 가는 줄기들만 솟아있는 형상이니 그늘이 될 리 없다. 그렇지만 하도 더우니 거기라도 몸을 숙여 넣어보는 것이다. 그토록 강인하고 믿음이 독실한 엘리야도 이때쯤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중얼거린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그런 말을 하면서 까무라치듯이 잠이 든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나타나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준다. 엘리야는 그걸 먹고 마신 뒤 다시 잠에 든다. 눈을 뜨니 다시 천사가 나타나 음식을 가지고 서 있다. 이렇게 로뎀나무 아래서 부식 지원을 받은 엘리야는 40일을 걸어 동굴까지 도망쳐 안전하게 숨는다. 이로서 로뎀나무는 절망하는 자를 소생케하는 달콤한 휴식의 상징이 되었다. 몸뚱이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성긴 빗살그늘 속에서도 인간은 믿음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고 저 엘리야 이야기는 교훈을 달아놓았지만, 그 엘리야조차도 생을 놓고 싶던 찰나가 있었다는 점이 마음을 더욱 붙잡는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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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가 나온 것은 1991년이었다. 이문세의 노래 중에 ‘총을 내던진 병사처럼’이란 구절이 들어간 ‘로뎀나무 아래서’(앨범 休)가 발표된 것은 1999년이었다. 전쟁은 평화를 깨뜨리지만, 때로 충만한 평화가 전쟁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는 그 아름다운 역설을 살바토레는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우린 빛이 어둠보다 강하고 소리가 침묵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그 양(量)의 문제이다. 어린 시절 전깃불이 없는 캄캄한 시골에서 깜박거리는 등불의 빛이란 얼마나 약해보였는가. 혹은 정글 속에서 지르는 외침은 얼마나 미약한가. 1902년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심장’에서 아프리카를 먹으러 들어온 프랑스 군대는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강을 지나면서 대지를 누르는 납덩이같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공연히 대포를 뻥뻥 쏜다. 그러나 그 소리를 침묵이 금세 먹어버린다. 그런 것처럼 평화가 전쟁을 삼켜버리는 지중해의 꿈. 살바토레는 지중해의 어떤 섬을 낙원으로 설계하고 있지만, 거기엔 폭력과 죽임에 대한 지긋지긋한 염증이 숨어있는 게 사실이다.

지중해는 4000킬로미터이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3대륙에 걸쳐 있다. 또 대서양과 홍해를 통한 인도양, 그리고 흑해 등 3바다에 줄을 대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혹은 페르시아와 유태 등 유럽의 정신과 문명의 샘이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한남동의 어느 술집에서 알바로 일하는 여인 중에 스페인서 몇 년 살다온 친구가 있었다. 그와 지중해 얘기를 하느라 몇 시간 아주 신이 났다. 나는 지중해 하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바다가 떠오른다. 눈을 베는 푸른 바다와 나풀거리는 스카프와도 같은 하얀 건물들.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듯한, 청색과 백색의 대비.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그 생각만 하면 현기증이 난다. 지중해가 인간을 키워낸 것은,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씻어내는 해풍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바다를 안은 도시들이 다른 도시들을 끝없이 만나면서 사유의 변경을 넓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생물학적인 연상을 하게 되었다. 서쪽의 지브롤터 해협을 입구로 하여, 지중해의 내부는 바로 여성의 거시기 속과 닮았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문명의 클리토리스이고 끊임없이 대서양과 물을 바꾸는 그것은 성교이며 생산이기도 하다. 터키로 이어진 아시아는 자궁의 가장 깊은 내벽이다. 노자는 검은 암소의 문을 얘기했고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가 만일 지중해에 와서 그 형상과 문명의 출렁임을 보았다면, 지중해라는 여인에게서 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중해가 문명의 모태가 되는 것은 해협들과 뭍으로 넘나드는 외부의 자극들이다. 지중해는 인류의 성감대들이 모여있는 풍수(風水)의 중심이다. 왜 동양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 위대한 통찰을 놓쳤을까. 후후.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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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의 노래 <로뎀나무 아래서>를 듣고 있노라면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 1992>가 생각난다. 내 마음, 총을 내던진 병사처럼. 그 대목은 지중해에서 마음의 무장해제를 하던 그 평화로운 군인들의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로뎀나무는 성서에 나오는 ‘휴식’의 나무이다. 어지럽고 지친 삶이여, 나무그늘 아래서 좀 쉬려무나.


살바토레는 영화 <아임 낫 스케어드(I'm not scared; 난 안 무서워), 2003>에서 11살 소년의 마음 속에 있는 지중해로 나를 데리고 간다. 이 놀라운 표현력의 감독을 움직이게 하는 건, 문명에 대한 피곤과 강박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행복하지 않다.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래서 살바토레는 문득 도저한 고통에서 놓여난 어떤 빈 섬을 찾아나선다. 영화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미켈레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마음이 따뜻한 소년이다. 폐가(廢家)에서 놀다가 동생과 함께 집에 돌아오던 미켈레는 동생이 안경을 놓고 왔음을 알게 된다. 소년은 그것을 찾으러 폐가로 돌아간다. 안경이 놓여있는 자리는 감춰진 굴의 입구였다. 안경을 찾는 일과, 굴의 발견은 세상의 감춰진 문제에 접근하는 소년의 인식 생성을 정교하게 잇는 두 가지 은유적인 사건이다. 소년은 호기심이 발동해 짚으로 덮인 덮개를 열어 땅밑의 헛간같은 굴 속을 들여다본다. 더러운 이불조각같은 것들이 널려있는 바닥. 이 이불 귀퉁이 한쪽에 흰 다리가 나와 있다. 소년은, 흠칫 놀란다. 시체가 숨겨져 있다?


소년의 마을은 이탈리아 북부의 아름답고도 황량한 서정을 간직한 곳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넓은 밀밭 평원과 가난한 마을과 아이들, 언덕 위의 폐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소년은 나른한 도시에 거의 유일하게 움직이는 듯한 존재다. 궁금증을 못이겨 다시 폐가로 달려간다. 가만히 덮개를 열어본다. 시체의 발은 그대로 있다. 그런데 한참 보고 있노라니, 그게 조금씩 꼬물거린다. 시체가 아니다. 소년은 아래를 향해 말을 건다. 너, 누구니? 응답이 없다. 대답 안하면 나는 간다. 그래도 응답이 없다. 덮개를 닫으려 하다가 다시 내려다본다. 그런데 ‘발’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미켈레의 눈 앞에 더러운 괴물같은 노랑머리의 얼굴이 툭 튀어나온다. 소년은 기겁을 하며 도망친다.

동갑나기 소년 필리포는 거기 굴 속에 짐승처럼 묶여 있었다. 다시 굴로 돌아온 미켈레는 필리포에게 빵을 건넨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고 오랫 동안 어둠 속에 있어서인지 눈을 뜨지도 못한다. 미켈레는 필리포에게 "나는 너의 수호신이야."라고 말한다. 소년은 이 굴 속의 비밀을 생각하며 밤에 촛불을 켜놓고 온갖 상상을 펼친다. 소년은 뜻 밖에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필리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작당을 해서, 한 탕 큰 벌이를 해보려고 도시의 부잣집 아들을 납치했다. 그리고는 협박 전화를 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중이다. 텔레비전에서 인질 어린이의 어머니가 나와 울면서 호소를 한다. 그녀는 원하는 액수 만큼 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보군. 그렇다면 귀를 잘라서 보내주지.”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미켈레는 굴로 달려간다. 그리고 필리포에게 그의 어머니를 봤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귀를 자르려 한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필리포는 “나는 죽었어. 여긴 죽어서 오는 데야.”라고 중얼거린다.


미켈레는 필리포를 데리고 굴 밖으로 나와, 밀밭 속에서 뛰어논다. 저녁에 필리포를 굴로 데려다 주러 왔다가, 마을 어른에게 붙잡힌다. 여기에는 미켈레의 친구의 밀고가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장난감 자동차가 탐이 나서 그에게 필리포의 비밀을 얘기해줬기 때문이다. 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알게된, 미켈레의 부모는 아들에게 히스테리컬해진다. 안 그래도 아이가 잠깐 안 보이면 공연히 조바심을 태우고 극성을 떨었던 그들이었다. 자기들이 가담하고 있는 범죄에 대한 가책과 불안감이 그런 식으로 드러난 것이었으리라. 미켈레에게 폐가 쪽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인질 협상이 여의치 않고 게다가 마을을 수색하는 헬기에 대한 압박감이 커가던 마을 사람들은 필리포를 죽이자는 데 동의한다. 누가 죽일 것인가. 모두가 피하려고 하자, 미켈레의 아버지는 제비 뽑기로 하자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미켈레는, 비밀을 밀고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친구가 그것에 사과하는 뜻으로 알려준 ‘필리포가 있는 또다른 감옥동굴’로 달려간다. 높은 감옥 창살을 올라 간신히 그곳에 들어간 미켈레는, 소리친다. “어른들이 널 죽인대. 빨리 도망쳐.” 필리포는 대답한다. “난, 무서워. 나가기 싫어.” 미켈레는 그의 등을 떠밀며 속삭임을 키운 고함을 지른다. “이 바보야. 여기 있으면 죽어. 빨리 도망쳐.” 그리고는 그를 밀어올려 밖으로 내보낸다. 필리포가 나간 뒤 미켈레는 혼자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해보지만 도저히 뛰어오를 수가 없다. 올라가려고 끙끙 대고 있는데 바깥에서 후레쉬 불빛이 비친다. 미켈레는 감옥 한켠에 숨는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제비 뽑기에서 걸린 미켈레의 아버지가 들어온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반가워서 뛰어간다. 그때 후레쉬를 든 아버지가 총을 쏜다. 아이는 쓰러진다.


영화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 깃든 천국을 더없이 아름답게 만들어내지만, 대신 어른들의 세상은 추악과 어리석음으로 도배를 해놨다. 난 겁 안나. 아버지는 헝클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대를 메고 감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아들을 쏴죽인다. 난 겁 안나. 아이는 친구가 된 필리포를 구하기 위해 감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그를 구하고 죽는다. 그러나, 영화는 험한 세상에 대해 무척 겁을 낸다. 마음의 무장해제는, 마음이 이미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을 전제하는 일이다. 죽어가면서 미켈레가, 도망치다 돌아온 필리포의 손을 잡는 엔딩신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이유도 모르게 아프다. /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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