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공부의 즐거움
오래 전 세상의 시비에 휘말린 검사(檢事) 하나는 도덕경의 구절들을 줄줄 외며 그의 심회(心懷)를 풀었다. 그가 외운 구절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잊었지만 평생 나라를 기틀짓는 규율에 고뇌를 해왔을 사람이, 은밀한 여가에 이 둔세(遁世)의 경전에 심취했다는 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뉴스를 만난 뒤 나는 이 땅의 지하 어딘가에 지식인들이 모여 노자가 간명한 화법으로 읊어놓은 5천자에 관해 격론을 벌이는 비밀클럽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곤 했다. 이 상상 속의 비밀클럽은 종종 지상으로 올라와 화제를 뿌린다. 그 중에서 가장 격하게 전개된 것은 도올 김용옥과 ‘구름(clouds)' 이경숙의 해석 논쟁이었다. 육두문자에 가까운 시비까지 일어난 이 흥미로운 전쟁은, 도덕경이 죽은 책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숨쉬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의 비경(秘經)임을 다시 일깨워줬다.
노자는 패도(覇道)에 굶주린 광기와 살육의 시대를 등지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가 세상에 마지막 얼굴을 보인 건 섬서성(陝西省)의 산관(散關)이었다는 설이 있다. 사기(史記)는 이 국경에서의 일을 전한다. 윤희라는 사람이 노자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이제부터 은둔하실 생각이군요. 부디 저를 위해 글을 남겨주십시오.” 노자는 윤희가 건네준 죽간(竹簡)에 그가 평생 가슴에 품어온 생각의 엑기스[extracts]를 적어준다. 춘추전국의 피비린내를 뒤로하고 홀연히 국경을 빠져나간 노자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기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후 중국의 주류적 생각들에게 끊임없이 성찰의 질료가 되어온, 이 변경의 초인(超人)은 그 생의 뒷부분이 지워져 후세의 상상력을 돋웠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비밀클럽은 이 믿음을 이어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비판한 구름의 견해들을 듣고, 또 그 비판을 재비판하거나 부분적으로 지지한 여러 주장들을 다시 접하면서, 이 경전의 구절들 하나하나가 ‘폭발하는 논란’의 단초들임을 깨닫게 됐다. 처음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던 문장도, 이제 와서 점점 더 어렵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특히 도올과 구름의 주장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어서, 무엇을 채택할 것인지에 따라 경전이 지닌 생각의 얼개가 달라질 정도다. 비밀클럽이 있다면 그것은 노자의 이름을 빌어 한가한 농세(弄世)나 하는 모임이 아니라, 문제를 읽어내는데 더 없이 맹렬한 전쟁터같은 내부 공기를 지닌 에너제틱한 소사이어티리라. 내가 이땅의 시인들을 생각해낸 건 그런 맥락이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읽어내는 견자(見者)들이 시인이라면, 도덕경 비밀클럽에는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무심코 읽어내려간 시들을 재독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도덕경의 첫 머리는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초입부터 비밀클럽의 해석전쟁은 격렬했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이경숙의 견해에 호감이 간다. 아마도 그 풀이가 산뜻하고 깊이가 느껴져서 그럴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지만 언제나 도는 아니다. 이름으로 이름할 수 있으나 언제나 그 이름은 아니다. 그렇게 풀어놔봐도 쉬워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노자는 지금부터 자기의 생각을 ‘도(道)’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도(道)라는 호칭 자체에 얽매어, 도가 가리키는 본질을 보지 못할까봐 걱정을 한다. 도(道)는 말뜻 그대로 ‘길’이며, 닦아나가는 무엇이며, 걸어가는 무엇이며, 생각하는 방식(A way of thinking)이며, 문제의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라는 ‘말’은 도라는 ‘본질’을 설명하는 한 방편일 뿐이니, 늘 도라는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는다. 노자가 왜 이런 얘기부터 꺼내고 있을까. 나는 도덕경을 꿰뚫는 한 가지의 생각을 요약하라면 ‘유연함’이라 말하고 싶다. 도의 이름과 실체를 따로 떼서 생각하자는 노자의 발언은 바로 그런 개념적 유연함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어서 흥미로운 말을 한다. 이름이 없이 세상은 시작됐고, 이름이 생겨나면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름이 만물을 낳았다는 이 얘기는, 바로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하는 핵심 시의(詩意)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無名)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天地之始).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有名)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萬物之母).
한 글자도 비켜가지 않고 도덕경 첫 구절을 깔끔하게 담아낸 이 시인을 ‘도덕경 비밀클럽’ 핵심멤버가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으랴. 김춘수가 평생 동안 붙들었던 시적 화두인 ‘무의미’의 문제는 노자가 말한 ‘명가명 비상명’에 대한 끈질긴 질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천하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천하가 모두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위미(爲美)이면 그것은 꼴사납고, 천하가 다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위선(爲善)이면 그것은 선이 아니다,는 구절은 인위의 문제를 다룬다. 노자가 앞에서 말한 이름의 문제도, 인위와 본질이 반드시 일치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미(美)와 선(善)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본질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선함과는 다른 것이다. 노자 당시의 세상은 저 꾸며진 것에 대한 열광으로 가득찬 시대였다. 사회는 그런 인위를 자랑삼고 그런 인위로 세상을 조직해나가야 한다는 견해들이 인기철학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노자는 이런 풍조에서 ‘본질’을 중시해야 한다고 열강(熱講)을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은 뜻 그대로, 인위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상태이다. 식자들이 저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세상을 조직하고 혁신하는 문제에 매달릴 때 노자는 홀연히 떨어져나와 ‘어이, 자네들. 힘 좀 빼게’라고 핀잔을 준다. 인위적인 것을 진짜로 생각하는 세상의 착각을 바로잡는다. 이런 생각을 시에다 슬쩍 숨겨놓은 사람은 시인 박남수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박남수의 ‘새2’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의 ‘새3’
새의 울음이 아름다운 건, 그 뜻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새가 예쁜 건 교태를 지어 사랑을 가식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아름답고 예쁘다. 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인간은 늘 오분석을 한다. 아, 저 새 속에 아름답고 예쁜 무엇이 있구나. 포수는 그걸 붙들려고 총을 쏘지만 피에 젖은 새만을 손에 쥘 뿐이다. 이 통찰에는 천하개지(天下皆知)의 통념이 실제로는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노자 웨이(Noja way)가 그대로 숨겨져 있다. 박남수도 비밀클럽 간부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추구’처럼 생각한다. 추구라는 말은 중국사람들이 제사상에 올리던 인형같은 물건이다. 풀로 만든 강아지를 왜 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문장에서 쓰인 의미는 각별한 애정으로 놔둔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에 대해서 좋은 마음도 싫은 마음도 없다. 나는 이 노자의 통찰을 만난 뒤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신에 대한 수많은 의견들과 가르침들은, 그 절대자의 끝없는 사랑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관심을 강조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천지가 어질지 않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말은 한 치 빈틈없는 진리다. 조물주를 유정(有情)하다고 믿어버리는 생각이, 어리석은 기복(祈福)을 세상에 들끓게 하고 지식인의 혹세무민을 낳아왔다. 나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시에 감춘 사람이 청마 유치환이라고 생각한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유치환의 ‘바위’ 중에서
억년 비정의 함묵은 바로 ‘천지불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랑과 연민에 물들고 기쁨과 성냄으로 휘청휘청 살았지만 죽어서는 바위가 되어 저 천지불인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시인의 꿈은, 노자의 자연을 ‘바위’에서 찾아낸 케이스다. 그의 다른 시, ‘수(首)’는 도덕경 다음 구절인 성인불인(聖人不仁)을 떠오르게 한다.
십이월의 북만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지 적은 가성의 네 거리에/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 모호히 저물은 삭북의 산하를/바라고 있도다./너희 죽어 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유치환의 ‘수(首)’ 중에서)
길 한 복판에 걸린 두 비적의 ‘잘린 머리’를 바라보며 쓴 이 시는 끔찍하기까지 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뜻밖에 고요하다. 율(律)로 처단하고 ‘질서를 보전’한다는 말은 시인이 나름대로 파악한 ‘통치 행위’의 구성요건들이다. 노자는 성인지치(聖人之治)가 불인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질지 않다는 것이 모질다는 뜻이 아니라, 어질고 모진 인간의 감정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인명이 계구와 같다고 말할 때 들어있는 ‘구(狗)’는 노자의 추구(芻狗)를 떠오르게 하는 바람에 더욱 심상치 않다. 청마도 클럽에 드나들었음에 틀림없다.
天門開闔 能無雌乎
천문개합 능무자호
이 구절은 워낙 논란이 많은 곳이라 어느 풀이를 취해야할지 망연하다. 오강남은 ‘하늘 문을 열고닫음에 여인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풀고 있고, 이경숙은 “하늘의 문을 열고 다는 일에 있어서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로 해석한다. 전자의 해석은 能無雌乎의 뜻이 잘 안 살아나니까 能爲雌乎로 바꿔 읽은 것이다. 후자는 아예, 여자[雌]를 배필로 못박았다. 우선 천문개합이, 들숨과 날숨인지, 우주의 열고닫힘인지, 아니면 여성의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논란의 이쪽과 저쪽을 기웃거리느니 나는 그 풀이를 충실히 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그 풀이는 뜻밖에 미당의 시 한 수에 녹아 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 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사소 단장’ 중에서
사소(娑蘇)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다.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神仙) 수행을 간 일이 있다고 한다. 이 글은 그녀가 떠나기 전에 집안의 꽃밭에 앉아서 한 독백이다. 미당은 도덕경의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을까. 이 의미심장한 연관(聯關)을 만나는 일은 가슴을 뛰게 한다. 비밀의 고리가 살짝 보인다.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 그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소재로 쓴 이 시는, ‘능무자호(能無雌乎)’를 떠오르게 한다. 그녀는 자궁을 통해 아이를 박혁거세를 낳지 않았다. 바꿔말하면 신라의 첫 왕은 여자 없이 ‘태어난’ 사람이니 당연히 능무자호의 신화이다. 이 대목을 포착하여 미당은 시를 쓴다. 꽃과 사소는 시적 현실공간에서 서로 마주하고 앉아있지만, 실은 같은 존재, 같은 상징의 병치이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둘 다 여성성 없이 생명의 문을 열 수 있는 존재이다. 사소는 꽃에게 ‘아침마다 개벽을 하는’ 꽃이라고 말한다. 미당은 사소의 입을 빌어 ‘닫힌 문을 열어라’고 꽃에게 말한다.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우주의 비밀에 대해 정리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에 가까운 통찰로 여인 ‘사소’는 천문개합의 주문을 왼다. 노자 연구자들이 말하는 해석들에게서 느껴지는 견강부회의 낌새는, 미당의 시에 오면 잘 기워낸 옷처럼 천의무봉이다. 이 시인을 누가 도덕경 클럽에서 빼놓을 수 있으랴.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총욕약경 귀대환약신
사랑받음과 미움받음에 똑같이 놀란다는 ‘총욕약경’ 또한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린 사랑받는 일엔 놀라지 않는다. 미움받을 때만 놀란다. 그런데 노자는 왜 그것에 똑같이 놀란다고 말할까. 이때의 경(驚)이란, 경탄과 경악을 포함하는 감정의 사이즈만을 말하고 있을까. 총욕으로 생겨난 ‘큰 감정’을, 바로 이은 뒷 문장에서 ‘큰 근심[大患]’으로 바꿔말하는 것을 보면 총(寵)에 대해 지닌, 노자의 부정적 태도를 읽을 수도 있으리라. 그 큰 근심을 자기 몸처럼 귀하게 여기는 게 인간이다. 그러면 다시 질문하자. 대체 사랑받는 일에 왜 놀라는 것일까. 사랑받는 일은 사랑을 잃는 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는 일이란 미움을 받는 일처럼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사랑과 미움은 한 봉지 속에 있다. 그것은 몸이라는 봉지 속이다. 몸이 있으니 우린 그 근심을 껴안고 산다. 이쯤에서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시인 유하가 나란히 등장한다.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처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한 한 자리
박경리의 ‘대추와 꿀벌’ 중에서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유하 ‘사랑의 지옥’ 중에서
박경리는 대추 속의 꿀벌이고 유하는 호박꽃 속의 꿀벌이다. 꿀벌의 총(寵)은 바로 대추와 호박꽃의 꿀이다. 그런데 그 꿀 속에 그만 갇혀버렸다. 그렇다면 대단히 행복해야할 텐데 박경리 꿀벌은 죽었고 유하 꿀벌은 잉잉거린다. 어찌된 일인가. 총이 욕이 되어버린 놀람이 아닌가. 꿀벌에게 총(寵)은 먹이에 탐닉하는 몸의 즐거움이고 욕(辱)은 그것에 빠져 이제 죽게된 몸의 몸부림이다. 꿀벌의 놀람을 바라본 두 시인의 놀람. 사랑과 미움의 여실한 한 자리를 발견한 그 시안(詩眼)의 원조는 노자이다. 그렇다면 박경리와 유하가 이토록 비슷한 착목(着目)을 한 건, 노자클래스에서 받은 비밀수업 시간 이후가 아닐까. 살피면 살필 수록 방대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덕경 비밀클럽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선 좀더 주도면밀한 특단의 ‘지식인 수사’가 필요하다./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