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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빈섬 풀이 '천부경'

단군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남겼는가

by Bins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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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요즘, 천부경(天符經)에 마음이 가서 저 아리송한 열 자를 거듭 바라본다.


81자의 한자는 숫자와 우주관이 결합되어 회전한다. 시작하였으나 시작한 것이 없다. 끝이 났으나 끝이 난 것이 없다. 시작하였으나 시작한 것이 없는 것은 무엇이며 끝이 났으나 끝이 난 것은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과 인간에게 같은 것이 있다. 같은 것을 하나라고 부른다. 하늘과 땅과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 혹은 보편적인 것. 그것은 저절로 그러함(自然, nature)이 아닐까. 하늘도 땅도 인간도 저절로 그러하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은 그래서 한 가지다.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늘의 마음, 인간 속에 들어있는 땅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이다.


하늘은 무한하고 땅도 무한하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하다. 그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 시작한 것은 우주 속에서 보면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늘은 시작이 없다. 땅도 시작이 없다. 그러니 인간이 시작한 것은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태어난 것이 아니다. 원래 존재하고 있던 것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사라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없던 것이 없을 뿐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자연은 곧 모든 것의 본질이며, 우리에게 내재하는 하늘의 마음, 우리에게 내재하는 땅의 마음이다. 유한과 무한의 통합, 생명과 생명없음의 통합, 부분과 전체의 통합이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의 순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우주이며, 인간이 하늘과 땅임을 천명한 것이다.


삶은 곧 삶이 아니며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삶에는 죽음이 있으며 죽음에는 삶이 있다. 태어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다. 원래 존재하는 것이 존재할 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을 뿐.


이런 성찰과 인식은 우리를 고요하게 한다. 무욕하게 한다. 안정감있게 한다. 생명의 들뜸과 생명의 불안과 생명의 고독을 살피며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완전한 보편과 영원한 자연을 발견하라고 이른다.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이른다.

2.

새벽에 눈을 뜨자 문득 ‘천부경(天符經)’이 이마 속으로 들어왔다. 어제 골똘한 궁리를 하다가 잠을 자서 그런 모양이다. 세상의 중요한 문제들은 4차원으로 유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열린다는 것, 시간의 문이 열린다는 것, 본질이 흐르는 통로가 있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해 긍정하게 된다. 뇌가 열리면서 하늘의 환한 빛이 들어오는 이미지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의지한 것도 아니고 의식한 것도 아니다.


천부의 부(符)는 흔히 부신(符信)이라고 표현한다. 서로 같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눠가지는 것이 부신이다. 혹은 우리가 자신의 행위나 마음을 입증하기 위해 하는 사인이 부(符)이다. 하늘이 스스로 서명한 경전이 천부경이다.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어제 일시무시일에 대해 생각을 했다. 시무시(始無始)를 앞뒤로 둘러싸고 있는 일(一)의 형태. 시(始)는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태어나나 태어나지 않으나 여전히 ‘하나’라는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명을 받지 못한 것과 하나이다. 이 구조는 순환구조이다. 거꾸로 읽어도 같은 구조이다.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의 고리는 순환이며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 원형을 만드는 본질과 에너지는 바로 '일(一)'이다.

‘하나’는 무엇인가. 존재 안에 존재하는 중요한 비밀이다. ‘하늘’이란 말은 ‘한얼’ 혹은 ‘한알’에서 나왔다. 한얼은 ‘하나’와 ‘얼’(心)이 합친 것이며 한알은 ‘하나’와 ‘알’(卵)이 합친 것이다. 얼은 본질을 뜻하며 알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한 가능태(可能態)를 의미한다.


하늘을 한얼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이 하늘과 같은 마음을 지녔다는 뜻을 품는다. 하늘을 한알이라 할 때 인간과 하늘이 한 알에서 생겨난 같은 존재임을 천명한다.


‘하나’는 ‘하늘’과 같다. 다시 일시무시일을 읽으면 이렇다.


"하늘은 하늘이다. 생명이 태어나도 하늘이며 태어나지 않아도 하늘이다."


태어나지 않음이 하늘이란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이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늘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하늘은 우리 위에 드리운 허공 자체가 아니며 그 허공을 이루는 본질이다.

삼극(三極)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세 가지 차원이다.


올라가는 것,

내려가는 것,

그리고 전후좌우로 가는 것.

그것이 삼극이다.


시무시(始無始)는 시간의 개념이 숨어있으며 존재가 생겨나는 과정을 상정하고 있다면 삼극은 그 태어난 존재가 만나는 환경 혹은 상황을 말한다.


우리는 하늘이라는 위를 보며 땅이라는 아래를 느끼며 그리고 공간이라는 전후좌우를 살피며 살아간다. 이 삼극을 아무리 분해해봐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진본(無盡本)이다. 본질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바로 그 ‘하나’이다. 그 하나는 하늘에서 온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하나’가 있으며 현상계에서 감각되고 감지되는 모든 것에는 ‘하나’가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석삼극 무진본이다.


왜 천부경은 이토록 ‘하나’라는 본질을 역설하고 있을까. 생멸하는 것이 삼극에서 느끼는 온갖 불안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진정시키고자 함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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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無匱化三

하늘은 ‘하나’의 첫째이며

땅은 ‘하나’의 둘째이며

사람은 ‘하나’의 셋째이다.


천지인(天地人)을 굳이 첫째 둘째 셋째로 나눈 것은 그것이 차등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즉 그 말은 하늘도 하나이며 땅도 하나이며 사람도 하나라는 말과 같다.

일적십거 무궤화삼(一積十鉅 無匱化三)은, ‘하나’를 쌓아 ‘열’로 커진다 해도 꽉 차는 일이 없고 셋은 조화롭다는 의미이다. 하나와 하나가 합쳐 둘이 되어도 그 본질은 여전히 하나이니 그것이 합쳐 열이 되어도 여전히 하나이다. 천지를 이루는 ‘하나’라는 본질은 궤짝에 갇혀 있지 않다. 아무리 쌓아도 궤짝처럼 꽉 차지 않는다. 본질은 아무리 덧셈을 해도 더해지지 않는다. 세 가지가 있다 해도 그것이 하나에 조화롭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화삼(化三)의 ‘삼’은 바로, 위에서 말한 천지인(天地人)이다.


천지인은 궤짝이 없다.


무엇 하나 갇혀있지 않으며 본질은 통한다는 얘기이다. ‘하나’가 자기 자신에 갇혀있다면 더 하면 ‘둘’이 되며 쌓이면 ‘열’이 된다. 하지만 하나가 열려 있으면 아무리 쌓여도 하나일 뿐이다. 사람 열이 모여도 본질은 하나이며 열 개의 하늘이 있다 해도 백 개의 땅이 있다 해도 그 본질은 하나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천지인이라는 조화로운 세 가지를 같은 방식으로 품는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

여기서는 ‘삼(三)’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하늘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하늘은 지인(地人)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땅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땅은 천인(天人)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사람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사람은 천지(天地)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천지인과 같은 것이며, 각자는 다른 요소들을 품고 있다.


대삼합(大三合).

갑자기 홍어, 삶은 돼지고기, 김치가 생각난다. 그게 삼합(三合)이 아닌가. 가만히 보면 물에서 사는 것과 땅에서 사는 것, 그리고 땅 속에서 돋아나는 것이 모였다. 그것이 막걸리라는 천기(天氣)의 발효와 만나니 그 또한 묘한 궁합이다.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얘기가 안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삼합의 의미이다.


천지인은 모두 그 안에 ‘하나’를 지니고 있기에 그것이 모두 있어야 ‘대삼합’이 된다. 대삼합의 천명 속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의 기운 뿐 아니라 천지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대 속에 들어있는 하늘을 보라. 그대 속에 들어있는 땅을 보라. 그것이 서로 열려 사람과 소통하는 큰 길을 바라보라. 그것이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다.

4.

六生七八九運三四
成環五七

이제부터는 여섯(六)에 대한 사유가 펼쳐진다. 지금까지 하나(一)와 셋(三)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여섯을 가져왔는가. 앞에서 말한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을 떠올려보자. 여섯은 저 ‘이삼(二三)’을 곱한 숫자이다. 즉 스스로를 곱한 것을 뺀, 천지, 천인, 지천, 지인, 인천, 인지 이렇게 여섯이다. 이것은 천지인이 본질을 공유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열’이 나왔으니 그 내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섯(六)은 천부경 81자의 딱 중간인 배꼽에 있다. 그것 전체를 인체로 본다면 여섯은 단전(丹田)이다. 여섯은, 일곱 여덟 아홉을 만들어내며, 셋과 넷을 움직이며, 다섯과 일곱을 주위에 두른다.


여섯은 ‘열(十)’로 올라가는 일곱 여덟 아홉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전환의 숫자이다.


다섯까지는 아직 차지 않았다. 여섯이 되어야 절반을 넘기 시작하면서 차오르는 것이다. 여섯은 변화가 힘을 얻는 시점이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임계점이다.

어떻게 여섯이 일곱 여덟 아홉을 만들어내는가. 스스로 모두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이미 그 전에 있었던 셋과 넷을 활용해서 만들어낸다. 이 점이 포인트이다.


운삼사(運三四)는 여섯이 일곱 여덟 아홉을 만드는 비밀이다. 여섯이 저 혼자서 만들 수는 없다. 앞에 있는 셋과 넷을 움직여서 키운 것이다. 셋과 넷을 더하면 일곱이 되고, 넷과 넷을 더하면 여덟이 되며, 자신인 여섯과 셋을 다시 더하면 아홉이 된다.


즉 새롭게 생겨나는 것은 진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들을 조합한 것일 뿐이다. 여섯 속에는 하나와 둘과 셋, 넷, 다섯이 이미 있으며, 그것은 또한 이미 있었던 숫자로 일곱과 여덟과 아홉, 그리고 열을 만들어낸다. 왜 하필 셋과 넷을 활용한다고 했을까. 셋은 천지인을 뜻하는 것으로 완전함의 숫자이며, 넷은 천지인과 '하나'가 다시 결합한 것으로 기운이 소통하고 생동하며 상승하는 움직임을 품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열까지의 모든 숫자는 1과 2와 3에서 비롯된 것이다. 4는 1과 3이며, 5는 2와 3이며, 6은 1, 2, 3을 합친 것이다. 이후의 숫자들은 이전의 숫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숫자들이 사실은 이미 있는 천지인의 기본 숫자들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은, 본질과 현상에 관한 의미심장한 해석이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그것은 '하나'의 셋이며 '하나'가 둘씩 결합한 셋이라는 처음의 강의가 '여섯'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면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경(經)으로 확장된 것이다.


여섯은 천지인의 기본 숫자가 합친 것이며 그것이 단전을 이룬다는 점이 천부경의 묘경(妙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

하나는 묘하게 확장되어 1만이 가고 1만이 온다. 1만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만상(萬象)이라 할 때의 그 1만이다. 천지인의 ‘하나’가 결국 만상을 다 이루는 본질이다. 쓰임은 변할 지라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은 ‘하나’를 설명하는 가장 힘있는 말이다. 본심이 바탕이다.

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태양을 밝게 우러를 때 사람의 한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로 모인다. 끝이 나도 끝남이 없는 것이 ‘하나’이니라.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를 때 그리고 환한 햇살을 받을 때 그때 천지가 사람의 몸과 마음에 들어와 하나가 된다.


이 경지를 어느 첫날에 나도 얼핏 느낀 것 같다. 이마가 열리며 햇살이 들어오고 발바닥이 열리며 땅의 기운이 솟아올라 내 중심에 가득 모이는 경험. 이렇게 ‘하나’와 소통하고 ‘하나’를 인식하며 ‘하나’를 산다면, 죽어도 죽음이 아니며, 영원한 하나에 귀의하는 것이 되리라.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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