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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글도둑은 영혼도둑이다

by Binsom Lee

'김부식 콤플렉스'라고 할 만한 강박증이 있다. 다른 사람이 쓴, 괜찮아 보이는 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다. 고려 시인 김부식이 천재 정지상의 시를 훔치고 싶어서 그를 죽이기까지 했다는 야사 스토리에서 나온 얘기다. 그를 죽이고 나서 김부식이 그제야 안도하는 기분으로 느긋이 시 한 수를 썼다. "버들빛 천 가지가 푸르고/ 복사꽃 만 송이가 붉도다." 정지상이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김부식의 머리통을 한 방 치면서 시를 고쳐준다. "버들빛 가지가지 푸르고/ 복사꽃 송이송이 붉도다"


글을 훔치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에 꼭이 꼬리표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라는 것이 도메인이 늘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과 상상이란 처음에 그것을 꺼낸 사람이 반드시 중요한 것도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결국 들어앉는 것이 아니던가. 글은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부스러기같은 것이니, 그걸 값을 치거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글을 훔치는 행위에는, 한 사람의 영혼에 편승하여 자신의 영혼을 멋내고자 하는, 뿌리깊은 자기이탈이 숨어 있다. 글 속에 들어있는 고유한 인성을 살인한 것에 버금가는, 영혼의 도둑질이 숨어 있다.


Barn Owl Viewed from the Side, 1887.jpg


글을 훔치는 사람은, 글 속에 들어있는 사람을 훔친 사람이다. 그 사람은 글 속에 들어앉아 훔친 사람을 들여다본다. 글과 인간이 소유가 뒤엉켰지만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긴장을 숨기고 있다. 장물을 손목에 찬 도둑처럼, 롤렉스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서, 영혼 깊이 흔들리는 존재의 정체성을 느끼는 바로 그 죄벌을 먹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불감증에 기대어, 빈곤한 문장들을 깁고 있는 가엾은, 문명과 명망의 거지이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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