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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낙선소감

'쓴 잔' 한 잔에 글줄기에 얽힌 집착을 훑어내리며

by Binsom Lee


해마다 신문 신년호를 살 떨리게 들여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오랫동안 내 청춘이 붙들려 있던 신춘문예병. 어김없이, 건져올려진 이름들 속에는 내 이름이 없었고, 좌절과 자학과 절망이 봄날까지 입맛을 잃게 만들었던 기억들.


쑥스러워 하면서도 자랑스런 기분을 감추지 못해, 애써 겸양을 떨며 써내려간 당선소감들을 읽으며, 심장은 질투로 벌떡거렸고 뱃속은 괜한 구역질이 돋았다. 그 소감보다 더 밸이 틀리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었다. 저런 생각과 저런 모험과 저런 언어와 저런 치열함은 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혹은 감이 안되어 보이는 작품들 뒤에 숨어있음직한 구린내와 결탁에 서둘러 침 뱉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 어느 무명 작가들의 동호회에서 읽은 글 하나는, 이미 '도' 통한 듯한 '낙선소감'으로 나를 빙긋 웃게 만든다. 나의 문장과 나의 문예와 나의 문학과 나의 문기를 소외시킨 1월1일자 신문의 참담을, 퇴계선생이 만든 '심환(心丸, 마음의 알약)'처럼 돌돌 뭉쳐 말아, 쓴 잔 하나를 가볍게 마시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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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우린 고배(苦杯)라고 하지 않는가. 허허(虛虛). 실상이 비었으니 빈 웃음 한번 웃고, 내 이름 없는 신문의 그 광활한 명예의 전당에다 대롱거리는 미련 몇 가닥을 털어낸다. 커피가 내장의 기름기를 씻어내는 것처럼, 이 헛헛한 고배가 내 글과 내 상상과 내 문체의 기름기를 훑어내려 가리라.


그 낙선소감을 읽으며, 오히려, 읽는 내 뱃심이 두둑해지고,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는, 안전(眼前)의 세상이 만만해졌다. 낙선소감 하나를 이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글'을 얻었다 해야 하리라.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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