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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빈 Feb 10. 2016

감정을 위한 싸움

이퀼리브리엄

세계 3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리브리아 (Libria; 자유의 땅)은 아버지 (독재자)의 리더십 아래에서 감정이 없는 삶을 산다. 그리고 아버지를 섬기는 사도 (cleric)들은 현대시대의 방공, FBI, CIA, 등등의 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이 감시하는 것은 마약이나 범죄가 아니다. 리브리아에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목에 마약을 투입해서 감정을 억제하게 되며 수시로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세뇌를 당한다. 리브리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범죄는 바로 감정. 

성범죄자들을 sex offender라고 부르듯, 리브리아에서는 감정 범죄자라고 sense offender라고 불린다.

이들은 감정을 갖었다는 이유로 발견 즉시 사형에 처해지거나 화형을 당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엇인가 


(생략)


전쟁을 피하기 위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 모두 지워야 하는가? '과연 암흑을 위해 빛을 죽이는가'라는 질문을 영화는 관객에게 던진다. 


영화의 시작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험악하게 생긴 웬 사내가, 클레릭들이 들어닥침을 감지하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니 마치 범죄 조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블랙 코미디를 발견한다. 그들이 숨기는 것은 예술 작품들. 정성을 다해 작품들을 숨긴다. 

이 영화에서 여러 고전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꼭 그림만이 아니라 서적도 등장한다. 분명 예술 그림을 범죄화 시키는 것은 관객들에게 생소한 것이고 그런 장면들이 웃기기 마련인데, 영화는 실제 예술 작품들을 이용하여 관객과 이야기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혀나간다.

출동한 프레스튼. 그는 사도들 중 가장 높은 사도이며 가장 최고로 알려져 있다. 남들이 감정을 가질 때 혹은 갖기 시작할 때 먼저 눈치채는 예리함이 있다

그의 무술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총을 꺼내자 어둠 속에서도 '악당'들이 모두 죽는다. 

즉시 사형을 당한 범죄자. 그의 손가락이 플라스틱 전축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작품들은 가짜가 아닌지 심지어 식별까지 당하며 진품이라는 게 확인이 되면 프레스튼이 짧고 강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태워버려. 

화염방사기로 예술 작품 또한 그 자리에서 즉시 화형 당한다. 철저하게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 분명하다. 

리브리아는 두개의 구역이 있다.   내부 도시는 이미 '아버지'가 잘 관리하고 있는 곳으로 프레스튼의 모든 임무들은 외부 도시에서 진행된다. 여기서 독재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고 '사도'들이라고 칭하는 것도 어떠한 의미를 담아두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히틀러, 스탈린, 세계전쟁들의 동영상들이 보이고 앞에서는 아버지가 연설을 한다. 사람들은 수시로 전쟁의 아픔과 인간의 감정이 거세지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세뇌받는다. 

명한 장면들이 세뇌 장면으로 많이 사용된다. 공상영화이지만 동시에 실제 독재와 탄압을 풍자한다. 

전광판을 보다가도 여김 없이 시간이 되면 약을 복용해야 한다.


(생략)


프레스튼의 파트너는 증거물을 매번 직접 본부에 제출하겠다며 가져가 몰래 읽는다. 

작가 Yeats의 작품을 읽고 있다. 실제 작품들을 영화에 첨부함으로써 현실감과 예술의 중요성을 감정이라는 개념과 엮었다. 

프레스튼은 말한다. 과정을 좀 줄여주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파트너는 말한다. 사형이거나 아니거나 모두 아는 것 아니냐고.  

그러자 프레스튼은 미안한다고 한다.  

"네가 그 말의 참 의미나 알고 하는 소리야?"


(생략)


프레스튼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도원 (사관학교 개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본다. 아이는 열심히 아버지의 세뇌교육을 받고 있다.

프레스튼은 감정을 서서히 알아가게 되고 혼란을 겪는다. 이 장면 속에서 세뇌 방송에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라는 음향이 나오는데 책상의 물건들이 놓인 위치와 앉아있는 것 모두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프레스튼만 뒤를 돌아보고 있음으로 그가  모두에게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 프레스튼이 감정을 갖고 나서 하게 된 것은 책상에 있는 물건을 자신의 마음대로  재배치시키는 일. 감정이라는 게 자유와 얼마나 근접한지 알려주는 장면. 


(생략)

프레스튼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단 한 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약을 복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그는 피를 보며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는 홀로 지하에 모든 불법 물건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감정을 갖고 나서 하는 두 번째 행동은 만지는 것. 그는 물건들을 만지며 감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그는 감정에 목이매 인다. 감정을 억압했던 순간들이 폭포처럼 눈물로 터져나온다.


(생략)


동물이라는 걸 처음 봤을까 - 이 장면에서 프레스튼은 강아지를 처음 본  듯하다. 수십 마리에 강아지들을 죽이다가 강아지 한 마리가 프레스튼에게 탈출한다. 

 "반군들이 이 동물들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라는 보고에 프레스튼은 병이 시작되면 이 강아지들 때문일 수 있을 테니 보고하겠다고 하며 가져간다. 마치 그의 전 파트너처럼 증거를 스스로 처리하기 시작한다.

프레스튼의 새로운 파트너는 계략적이고 뱀과 같다. 또한 분명 감정을 가지고 있다. 자주 보이는 웃음과 의심들 속에서 시청자들은 어쩌면 리브리아에서는 감정을 갖고 사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프레스튼은 자신이 죽였던 옛 동료가 했던  것처럼 업무와 관계된 거라며 리브리아 내부 도시를 나온다. 물론 개를 다시 풀어주기 위한 것. 그러다 의심이 많은 새로운 파트너는 다른 사도들을 보낸다.

물론 주인공이 이긴다. 참으로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액션이다. 

자신이 죽인 옛 동료 시체 앞에서 울며 미안하다고 하는 프레스튼. 첫 번째로 그는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고, 두 번째로 그는 물건들을 만지며 감촉을 느낀다. 세 번째로는 다른 생명과 친밀함을 느끼고 (강아지) 네 번째로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반군 세력과 연락을 하게 되며 아버지가 찾으려던 지하세계를 찾게 된다. 알고 보니 리브리아 도시 중심에 위치한 지하세계...

그곳에선 제한되었지만 자유가 있다. 옷을 고를 수도 있고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프레스튼은 영화에서 두 명의 여자를 잃게 된다. 본인을 사랑해서 화형 당했던 자신의 부인과 본인이 죽인 옛 파트너의 여인.

위 장면은 취조실에서 프레스튼이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매리 (옛 파트너의 연인)와 프레스튼이 아주 미세하게 서로 손을 만지는 모습.

인상적인 것은 우리의 감정은 때론 짧은 순간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어쩌면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랑 보단 동정이 아닐까 - 

화형 당하는 메리의 집행을 늦추기 위해 달려가 본다. 첫 번째 여인의 죽음은 그의 손으로 해결되었다. 두 번째 여인의 죽음도 그의 손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는 뒤늦게 멈춰보려 한다.

하지만 이미 불이 켜진 상태이다. 프레스튼은 이렇게 두 번 자신의 여자를 죽이게 된다. 

군들과 함께 하면서 프레스튼이 배우는 한 가지가 있다: 감정에는 대가가 있다. 그리고 화형을 당하는 자에게 감정이란 최악이라는 걸 잘 표현해주는 표정. 

그걸 지켜보는 또 다른 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감정에는 대가가 있다. 

화형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는 건물을 나온다. 그의 표정은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다 결국 터뜨려버리고 만다.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에게 끌려온 프레스튼. 그리고 그는 영리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생략)



반군들과 함께 할 줄 알았던 프레스튼. 반군들은 모두 표정이 안 좋다. 그리고 프레스튼은 본부에 연락해 지금 반군 지하기지에 와있으니 출동하라고 연락을 한다. 어떠한 계략일까?

맞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반군들과 함께 책략을 만든다. 반군들을 모두 체포하게 했지만 그것은 그저 신뢰도를 얻는 것일 뿐. 그는 정복을 입고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아버지를 만나러 들어가는 모습. 하지만 발견되는 건 아버지는 사실 이미  죽은 지 오래이고 지금 아버지의 형상을 한 것은 그냥 컴퓨터 기술일 뿐. 아버지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부책임자였다. 


(생략) 


프레스튼이  초청받은 것은 사실 그를 죽이기 위한 가짜 '아버지'의 음모였다.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 또한 사실 독재자와 한편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레스튼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를 죽인다. 

잔인하게. 

말도 안 되게 허무하게 적이 다 죽는다. 너무 쉽게. 사실 프레스튼은 말을 잘 듣는 살상 무기였을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든 - 리브리아에서는 감정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 결국 아무리 약을 먹이고 해도 감정은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부책임자가 프레스튼과 이야기를 할 때 감정이 있다는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프레스튼에게 나도 감정이 있는데 죽이기 쉽겠어?라고 처절하게 말하자 프레스튼이 말한다:

이미 많은 대가를 치렀다. 감정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대가 때문에 올바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이퀼리브리엄은 인간의 감정 그리고 자유 탄압에 대해서 잘 나타낸 영화이다. 은근 킬빌 - 매트릭스 - 1984를 섞어놓은 듯 하지만 재밌는 스토리와 좋은 연기로 풍부한 생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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