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느리게.
삶의 터전마다 풍기는 향은, 골목의 입맛대로 제각각이다.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그곳 만의 향이 있다. 그리고 한 곳에 오래 있을수록 그 향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 특별하다. 특히 짧게 다니는 여행은, 정해진 시간 속에서 구석구석 누비려는 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느긋했을 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보게 해준다. 반대로 느긋한 여행은 또 다른 차원의 여행을 하게 한다. 그렇게 나는 홍콩에서 두 가지의 여행을 했다. 홍콩과 나의 극적인 만남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자 빠르고 느림의 반복이었다.
처음부터 홍콩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엉겁결에 행선지를 바꾸었고, 그렇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출발하는 날, 공항에서 홍콩을 급하게 뒤져보았다. 비행기 시간이 애매했기에 여행은 4박 6일이 되었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꼭 구매하라던 옥토퍼스 카드는커녕, 바로 택시를 타고 침샤추이 역 근처에 있는 한인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생각보다 숙소는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새벽에 도착했지만 마중 나오신 주인아저씨 덕에 길을 잃지 않고 방에 잘 들어갔고, 아침에는 여러 지도를 주시며 도움을 받았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온 청년을 향해 껄껄 웃으셨다. 아침에 아파트를 내려와서 쨍한 햇살을 멍하니 느겼다. 어쩌면 엘리베이터를 공사장 돌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함께 타서 그런가. 눈을 비비고 카메라 렌즈도 한번 닦고 나니 그때서야 깨달았다: 숙소 건물은 침샤추이 지하철역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그저 그 정도의 신기함이 있었다.
분명 이 곳은 도시였지만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왼쪽으로 차들이 통행한다는 것도 즐거웠고 신호등 소리도 다르니 분명 나는 새로운 곳에 왔음을 체감했다. 주중에 도착해서 그런지, 큰길 외에는 많은 인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사람이 드문 곳에서 살던 나는, 서울에 온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아프고 예민해졌다. 그렇게 숙소에서 막연하게 뒷길을 따라 바다를 보러 나갔다. 길을 물어보며 다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물론 나도 광동어를 하지 못하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손과 발이 있으니!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큰길로 갔을 때, 스타페리 (STAR FERRY) 선착장이 있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헤매면서 가도 걸어서 20분이 채 안 되는 이 동네는, 충분히 걸어서 다 구경할 수 있을 거라 짐작했다. 선착장 맞은편 맥도널드에서 밀크티를 사서 바다를 보러 나갔다. 내 앞에 펼쳐진 곳이 나중에 그렇게 예쁘다는 야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다라기보다는 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곳은 바다가 맞았다. 바닷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마다 재차 확신했다. 2월의 홍콩은 17에서 18도를 왔다 갔다 했기에 셔츠 한 장 걸쳐도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가을 날씨처럼 대부분 선선했다.
바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을 만났다. 이소룡 동상에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던 곳이 '스타의 거리'였다. 걸으면서 수많은 손도장이 찍혀있는 바닥이 의아했는데, 이러니 어느 정도는 알고 와야 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나의 백지 같은 무심함도 그리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고 홀로 떠났다는 것에서, 누군가에게 미안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거리를 쭉 걷다 보니 스타벅스가 있길래 아침 겸 점심으로 커피와 빵을 시켰다. 참, 여기까지 와서 궁상 아닌 궁상, 허세 아닌 허세이다.
그렇게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다시 침사추이 큰길 쪽으로 걸었다. 차도 위를 걸으면서 오른쪽 펼쳐진 바다를 보았을 때 또 한 번 강이 아니라 바다가 맞다고 생각했다. 왼쪽으로 가는 차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 여기는 홍콩인데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희얀했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짧게나마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름 만들어낸 답은 '아무 생각 없이 갔기 때문에'였지만 아직까지도 홍콩을 생각하면 '다시 가도 두렵지 않은' 혹은 '이미 다 아는 것 같은' 교만한 생각이 든다.
모르는 나라에 갈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모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길을 모른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대부분 새로운 곳이라는 막연함, 여행이라는 이유와 낭만으로 순식간에 기대와 흥분으로 바뀌곤 한다. 나와 홍콩의 처음은 조금 달랐다. 오히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곳에서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마음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의 말처럼, 어디로 가는지 상관 없다면, 어느길로 가든 상관 없는 것이었다.
홍콩의 거리에는 마치 여러 문화가 섞여있는 듯했다. 100년간의 영국 식민지 시절과, 중국인과의 마찰 등, 숨어있는 듯했지만 모두 조금씩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홍콩에 있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무슬림 사원은 나름 규모 있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장터에는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듯한 여자들이 우산 아래에서 야채를 다듬기도 했다. 특히 공원에 갔을 때는 옹기종기 모여 과일이나 집에서 가져온듯한 음식을 먹으며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나중에 사귄 친구의 말로는 주 6일을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하루 날을 모여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구룡반도, 침샤추이, 스타페리. 페리(ferry)를 타고 홍콩섬으로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홍콩섬과 침사추이를 왔다 갔다 하며 탔던 페리가 내가 미국이나 한국 - 혹은 그 어떤 나라에서 배를 탔던 것 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자체가 귀하고 신기했다. 1층과 2층으로 나뉜 페리는 출퇴근 시간을 빼곤 한가했다.
그렇게 약 5분가량 페리를 타고 홍콩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람차였다. 타보진 않았지만, 이 또한 홍콩에서 나름 유명한 관광(?) 요소 인 것 같았다. 선착장에서 내려 홍콩의 심장으로 들어갈 때, 긴 통로 왼쪽 오른쪽으로 높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들을 해쳐나와 산 중턱으로 걸었다. 센트럴이라고 불리는 곳에 세상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어차피 행선지가 없으니 아는 곳이라도 가보자'라는 오기로 그냥 걸었다. 홍콩섬은 침샤추이와 많이 달랐다. 시장(mayor)도 없고 시의회도 없는 홍콩의 홍콩시는 여러 문화와 분위기가 다양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특히 침샤추이와는 다르게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았다. 비행기에서 본 한국인 커플도 보았고 국제 기업들이 많아서 그런지 서양인들도 틈틈이 보였다. 특히 높은 건물을 담장 삼아 펼쳐진 노점상은 과일부터 고기까지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몇몇 골목에는 이런저런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골목에는 관광객의 발목을 잡으려는 저렴하고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상품들이 즐비했다.
또 침샤추이보다 높은 건물이 많아 보였음에도 햇빛이 많이 들어왔다. 아침과 점심의 차이기도 하겠지만, 분위기 자체와 도시의 톤이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이건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일 가능성이 크다. 어찌 되었건 홍콩섬 또한 침샤추이처럼 아무 기대 없었던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라고 불리는 이 길고 긴 자동계단 행렬은 대단했다. 정말 길었고 현지인들에게는 분명 유용한 교통수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 딱히 대단할 것은 없었다. 또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얇은 아파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좋은 아파트라 하여도, 폭이 너무 좁아 보였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즐길 시간은 충분하다. 끝까지 올라간다면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에 끊겨서 지하철 환승하듯 다시 다음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하지만, 이런 환승 지점을 기회로 삼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잘' 탔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에스컬레이터를 앞만 보고 탄다면 그저 교통수단으로 머물게 된다. 올라가고자 하는 고도가 있고, 그곳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올라서서 그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것은 마치 시간을 멈추고 이 곳의 향을 맡을 수 있는 좋은 곳으로 변한다. 마치 귀한 차를 내리는 찻집처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볼 때, 이 곳의 향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사실 에스컬레이터는 어디나 흔하고 오히려 관광지가 되는 것이 불쾌해질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큰 그림을 본다면,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라는 것과, 이 곳 정류장 그리고 또 그 위 어느 곳에 잠시 서서 아래를 내려볼 때 보이는 풍경 속에서 어쩌면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이 곳의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한다.
향을 맡으려면 향이 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향이 나는 곳으로 가서도 향을 못 맡는 경우는 별다른 이유 없이 분명 코가 막혔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 지나지 않고 이제 막 해가 제 기량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문득 알게 되었다. 어쩌면 수많은 자유여행의 문제점은 코를 막고 다닌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것은 기획과 계획에서 비롯된 어떠한 에러가 아닐까?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여행을 준비할 때, 그곳에 있을 때, 그리고 돌아와서 사진을 볼 때 여행의 참맛을 세 번 음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계획에 치중되고, 마치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는 태도로 여행을 준비하는 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 보다는, 얼마나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백지로 온 내가 그리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헤매는 건지 방황하는 건지 알 수 없게 걷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나를 알지 못했고 나도 이들을 알지 못했지만, 5분 채 안 되는 대화를 나누기위해서는 카메라 하나로 충분했다. 이때까지도 나는 홍콩에서 '무엇을 해야겠다'거나 하는 목적은 없었다. 그저 사진을 찍는 사진사들의 사진이 없음을 알기에, 사진 찍는 사람을 사진 찍는 사람이 우연히 찍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들은 나의 생각을 재밌게 받아들였다.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이자 강점은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보행자가 걸으며 사진을 확인하는 것은 어쩌면 운전자가 운전하며 문자 하는 것과 똑같을지도 모른다. 가다 넘어질 뻔했다. 그래서 잠시 서서 사진을 보다 얼굴들을 보게 되었다. 자신 있는 표정을 한 듯한 남자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개구쟁이 남자, 그리고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 조명을 병풍 삼아 반대편에 앉아있는 여자는 지금 상황이 웃기다는 표정을 선물했다. 그래도 찍는 자와 찍히는 자로 나뉜 것이 아니라, 모두 벽 없이 나의 렌즈를 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 생각 났다: 홍콩에서 음식이든 사람이든, 그곳에서 만의 향을 느끼고 싶다고.
그렇게 또 흘러 흘러 숙소가 있는 구룡반도로 넘어왔다. 피로했다. 이 피로함은 홍콩과 한국의 1시간 시차 때문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오래 걸었기에 생겨난 육체의 피로였다. 어쩌면 모든 곳을 지하철 한번 안 타고 걸어가는 것이 무리였을 수도 있지만, 빠르게 걷고 빠르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랬기에 더 느긋하게 본게 아닌까 싶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지하철 역 뒤편에 공원 같은 게 있는 걸 얼핏 보았다. 알고 보니 홍콩에서 제일 큰 공원이었는데,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는 작지만 비슷한 목적을 가진 구룡공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저 홀로 나무들과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 벤치에 앉아 무엇이든 구경했다. 사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만의 향을 잘 담아 갈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 그 향을 사진으로 담을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고 도저히 글 쓸 엄두가 나지않아 멍하니 처다볼수 밖에 없는 빈 종이와도 같았다. 뒤돌아보면 그런 고민을 하는 내 옆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다른 이의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짐을 잔뜩 들고 온 여자는, 또 다른 가방이 있는 걸로 보아, 잠시 자리를 비운 동행자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 곳에서도 모두가 자기만의 고민과 걱정을 품고 사는데, 사람들은 향이 잊혀질만한 고향을 떠나면 잠시나마 고민에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떻게 하면 정말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질문을 품은 채 숙소로 돌아가 잠시 낮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저녁 시간에 가까웠다. 숙소를 나가면서 주인아저씨는 스타의 거리를 다시 가보라고 했다. 매일 저녁 8시면 스타의 거리에서 레이저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했고, 저녁의 홍콩은 어떨지 궁금했기에, 레이저쇼는 나의 이런저런 핑계 중 온전한 이유가 되었다. 저녁 바람은 낮보다 차가웠고 특히 바다에 가까울수록 온도가 낮아졌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추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2월의 홍콩은 그게 참 좋았다. 그저 선선함, 시원함, 그리고 약간의 쌀쌀함이 있었다. 가을 날씨를 좋아하는 나에게 어쩌면 겨울의 홍콩은 평생 이맘때쯤 생각날지도 모른다. 저녁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레이저쇼를 보러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레이저쇼가 정말 유명하긴 한가보다. 가끔 여기저기서 한국말도 들리고 영어도 들려온다. 나는 사람들이 비교적으로 없었던 벽에 기대, 멀고도 가까워 보이는 홍콩섬의 야경을 담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