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어쩌면 눈물을 흘려보내는 행위가 아닐까
하루를 보내고 둘째 날엔 스스로와 타협하고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홍콩 지하철도 궁금했지만 일단 홍콩에서 전지전능하게 쓰인다는 옥토퍼스 카드를 지하철역 안에서 살 수 있었다. 편의점이나 대부분의 식당에서도 다 받는다는 옥토퍼스 카드는 한국의 교통카드인데, 웃기게도 홍콩은 카드보다 현금을 더 좋아하는 나라인 듯했다. 그래서 교통비로 어느 정도는 옥토퍼스 카드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사용했다. 홍콩의 지하철은 생각보다 좁았다. 하지만 굉장히 깨끗했고 지하철에 들어오면 '지금이 겨울이 맞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여기 사람들은 겨울이니 겨울옷을 입었을 뿐인데, 내가 그들이 신기했듯, 그들도 와이셔츠 한 장 걸친 내가 신기했을 것이다. 지하철은 심플해서 굉장히 좋았다. 적어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기엔 충분히 심플했고, 노선이 보스턴 지하철과 비슷해서 상당히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조단 (Jordan) 역으로 갔다. 유명하다는 맛집이 있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맛이 없을 것 같아서 잠시 걱정했다. 기다리면서까지 먹을 음식은 아니지만, 시도는 나쁘지 않다. 홍콩 사람들은 영국의 문화를 받아 아침으로 토스트와 계란 등을 자주 먹는다고 했다. 끼니를 해결하고 이번에는 홍콩섬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홍콩섬에는 지하철도 있지만 지상 열차가 있다. '땡땡'이라고 불리는데, 재밌는 것은 가끔 차들과 함께 교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을 지나 도심으로 들어갈 때 마치 '땡땡'만의 차선이 따로 있고, 마치 버스처럼 왼쪽 오른쪽 차들과 함께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결코 '바쁘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땡땡'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기차도 아니고 버스도 아닌 것 같은 열차의 속도는 아직 풀리지 않은 나의 피로를 위로해주었다. 달릴 때 달리는 게 티가나고 멈출 땐 멈추는 게 티가나는 '땡땡'은 그만큼 솔직했다. 가격도 구간제가 아니기 때문에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돈을 내고, 차를 타면, 자리에 앉아 밖을 보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쉴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얼마나 이층 버스의 영향이 컸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세계 교통수단 중 지하철과 버스는 흔하지만, 이층 버스나 지상 열차는 흔하지 않다. 특히 이층 지상 열차는 말이다. 홍콩에 있지만 와이파이를 잡아서 홍콩을 검색해볼 때면, 꼭 이층 버스 앞좌석에 타서 가라는 글이 한두 개씩 보였다. 버스의 앞자리도 있지만 땡땡은 이층 맨 뒷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인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 몰려있는 인파, 건물, 도로, 차 등 모든 것들을 적절한 속도와 적절한 높이에서 차분히 볼 수 있는 '땡땡.' 그래서인지 피곤해서인지, 나중에 나는 2시간 가략 종점에서 종점까지 '땡땡'을 타고 홍콩섬을 구경했다. 시간이 많고, 행선지는 없지만, 무언가를 보고 싶은 나에게는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두 시간이었던 것 같다.
'땡땡'에서 시간을 보내고 코스웨이 역 (Causeway) 근처 거리에 들어섰다. 백화점까진 아니지만 결코 작지 않은 쇼핑센터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 보았다. 에스컬레이터는 느리지만 편한 미묘함이 있다. 올라가면서 보이는 가게들은 대부분 유명한 가게들이었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이미 괴로웠겠지만, 여기에서 눈 구경을 한다는 것은 나름 괜찮은 일이었다. 특히 도라에몽 영화 <Stand By Me> 포토존이 1층에는 마련되어 있었고 여러 행사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올라가다 보니 초콜릿 기업 페로로쉐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페로로쉐 쇼콜라티에들이 직접 페로로쉐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콜릿도 초콜릿이지만 넋 나간채 초콜릿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사진 속 꼬마는 진정 초콜릿을 원하는 듯 보였다.
쇼핑몰에는 스카이파크가 있었는데, 분명 어느 정도 높이가 있었음에도 결코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별로 높게 느껴지지 않아서 스카이파크 답지 못함도 있었지만, 딱히 공원이라고 할 것 없던 빈 공터는 높은 건물들 속에서 적적함만 주었다. 건물 양쪽을 다 볼 수 있던 이 공원에서 나는 오히려 낡고 누린 건물들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높은 건물들과 금세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들리는 말로는 '앓은 뒤의 모습'을 뜻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다. 나는 그냥 나의 편의를 위해 아름답다의 유래가 그렇다고 믿고 산다. 그래서 내가 보는 아름다움은, 고통을 겪고 더욱 견고해진 어떠한 모습이다.
쇼핑몰에서 음료수 하나를 들고 나오며 또 걸었다. 홍콩섬 중앙을 조금 벗어나 거주지역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보았다. 딱히 재밌는 것은 없었다. 그저 너무 얇아 보이는 아파트들이 따박따박 서로를 붙들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아마 쇼핑지역 위주로 관광을 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이름 모를 사원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는 강한 향 냄새가 났는데, 현지인들은 잠깐 기도를 하고 발길을 옮겼고 몇 없던 관광객들은 문 안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고 서둘러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는 듯했다.
조금 더 올라가다 보니 벨리로스여자학교가 나왔다. 학교에 들어온 외부인을 경계했지만 그들은 홍콩의 교육에 대한 나의 관심을 오히려 즐겁게 받아주었다. 교무부장이라고 소개한 선생님은 짧게 홍콩의 역사와 교육 시스템 또한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이 중요한 시험을 영어로 선택해서 볼 수 도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교육과정 자체에서 학교가 영어로 수업할지 광둥어로 수업할지 정한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벨리로스여자학교는 영어로 수업하다 다시 광둥어로 바꿨다고 한다. 학생들은 불쑥 방문한 외부인보다는 카메라 렌즈를 쑥스러워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또 피곤해졌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도 가보고 걷다 보니 거의 홍콩섬의 끝까지 가버렸다. 일단은 '땡땡'을 타고 중심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땡땡을 타고 가다 보면 적지 않게 반대편 '땡땡'이 내 바로 옆에 설 때가 있다. 창가에서 밖을 구경하는 게 나의 '땡땡' 이용의 목적이었기에 이럴 때는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옆에 마스크를 쓴 소녀가 신기하게 카메라를 볼 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홍콩에 다녀와서 가장 좋아하는 이 사진은, 볼 때마다 소녀가 아팠던 건 아닐까 짧은 걱정을 하게 만든다.
걷다 보니 목이 말라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샀다. 괜히 옥토퍼스 카드를 단말기에 올려 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옥토퍼스 카드가 유용해서 가지고 있던 현금을 조금 더 충전해야겠다 생각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땐 카드에 충전된 금액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길을 걷다가 멀리 있는 건물들까지 보이는 골목을 마주했다. 저기 멀리 선 교복을 입은 어린 꼬마들이 길을 건너려 오고 있었고 왠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사진을 찍으며 매일 하는 고민 중 하나는 '무엇'이다. '무엇'을 담아야 잘 담았다고 소문날까? 또 다른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나만의 색을 찾을까'인데 이 것은 아무래도 답을 찾기엔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잠시 멈춰서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리면서 문뜩 생각했다. '이 무거운 카메라가,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건 맞을까?' 그렇게 어쩌면 나는 나의 카메라에 대한, 사진이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신뢰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막상 서울에 돌아와서 찍은 사진을 정리할 때, '무엇' 혹은 '왜'라는 답이 그 자리에서 바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깨달았다.
길을 조금 더 방황하다 오후 네시쯤에 피크트램을 타러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자기 전에 홍콩에 대해 조금 찾아본 게 도움이 됐다. 피크트램까지 또 막연하게 걷기 시작했는데 미국 대사관 뒤에 있다는 말만 듣고 길을 따라가 보았다. 대사관 반대편을 뒤로 착각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막상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줄이 너무 길어서 표를 사는 데까지 약 30분이 걸렸다. 어느 정도 근처에 오면 플라스틱 명찰 같은걸 주었는데, 기다리는 곳과 매표소 사이에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쩐지, 혹시나 누가 몰래 가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예전에 그 고민이 해결되었나 보다. 그렇게 매표소로 가니 옥토퍼스카드로 구매하면 조금 더 싸고 빨랐다. 피크트램 승하차장에 들어서면 더 이상 줄은 없어지고 그저 사람들이 뭉태기로 포개졌는데, 그랬기에 피크트램이 도착했을 때 더욱 기뻤던 것 같다.
피크트램은 그저 관광 열차가 아닌, 대중교통 중 하나였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가파르게 올라가다가도 중간에 잠시 멈췄고, 내리고 타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옆에는 작고 소박한 산책로도 있었다. 올라가면서 옆에 보이는 경치는 가파른 경사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끝까지 올라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크트램을 타고 올라갔을 때 조금 쌀쌀했다. 아무래도 산 위여서 그런가. 오래 기다려서 올라왔지만 상가 건물, 음식점, 그리고 스카이라운지를 제외하곤 딱히 볼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이 곳은 야경을 보러 오는 곳인데 너무 일찍 올라왔다. 야경 사진이 가장 예쁘게 나온다는 장소는 몰린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비좁았고, 아름다운 사진들이 여기서 탄생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진은 현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비록 낮이고 안개가 자욱했지만, 그 모습 그대로 담아보고 저녁도 먹을 겸 그 자리를 떠났다.
생각해보니 홍콩 야경의 감동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건 개인의 차이겠지만, 고등학교 때 처음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갔을 때도 함께 갔던 친구와 15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쩌면 화려한 것보다는 정적인 게 더 좋은걸 지도 모르겠다. 비록 홍콩 야경의 감동은 길지 않았지만 뉴욕의 야경과는 굉장히 달랐다. 이 곳은 정적이었다. 멀리서 떠오르는 밤의 불빛들은 정직하게 멀게 느껴졌고, 관광객들도 시끄럽지 않았다. 비록 감동은 짧았지만,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피크트램에서 내려와 센트럴 피에어 (Central Pier)로 가는 배를 탔다. 내가 편한 건 지하철이기에 산을 내려가 지하철을 타려 했지만, 항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 뒤에 있는 혼혈 가족은 막내의 생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지만, 아이의 누나는 웃으며 미안하다고 할 뿐 딱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했다. 다만 버스를 탈 때 더욱 심해지는 아이의 울음에 누나나 엄마는 이제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았다. 아이를 아무리 좋아해도 울음소리를 계속 듣는다는 건 사실 지겹고 고달픈 일이다. 처음에는 우는 아이가 귀엽다가, '이제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에서, '왜 저러냐'까지. 하지만 끈질기게 울음을 쥐어짜는 아이가 나중에는 결국 안쓰러워진다. 아이는 아이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게 이뤄지지 않았다던지, 뭔가 기분이 상했다던지, 혼났다던지 말이다. 나중에는 목이 쉬어가며 울음을 짜내는 아이가 버스를 내린 후에 더 생각이 났다. 어른이 된다는 게, 울고 싶어도 속으로 울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여행을 하는 것도 나름 눈물을 흘려버리는 게 아닐까.
(3편에서 계속)
배에서 내려 다시 야경을 보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콩은 생각보다 가게들이 문을 일찍 닫았다. 빵을 먹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