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차 같은 홍콩
오늘은 늦잠을 잤다. 점심되기 조금 전에 일어나,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매고 하염없이 걸었다. 걸으며 홍콩의 겨울 날씨는 정말 좋다는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패딩을 걸치고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온전히 느끼기엔 티셔츠 한 장이면 충분했다. 혹시 모르니 들고 나온 나의 빨간 후드는 거추장스러웠고, 그렇게 입고 싶지 않은 후드를 어떻게 몸에 걸쳐놓을지 고민하며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여기에 사는 아이들이겠지? 아니면 단체로 견학을 왔나? 왜 왔는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그 횡단보도 앞에서 잠깐이나마 그곳만의 향을 맡았다.
오늘은 홍콩폴리텍대학에 다니는 친구를 소개받아 잠시 대학 구경을 하기로 했기에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교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저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바다 냄새는 계속 나를 유혹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더 새로운 무언가를 찾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학교를 찾아가던 중 시간이 좀 남아 박물관이라도 가볼까 싶었다. 원래 같으면 '여행까지 와서 무슨 박물관을 가나' 싶었겠지만 왠지 이곳에서 이 나라에 대해 조금 더 배워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역사박물관은 휴관이었고 과학박물관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 쪽으로 조금 더 가다 보니 거리 설문을 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서명을 받거나 설문을 하는 사람은 고의적으로 피해 다녔지만 유난히 이곳 여기서는 설문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앞으로 향했고 웃을 때 튀어나오는 앞 이빨이 유난히 귀여웠던 여자 아이는 나에게도 설문을 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성공적으로 질문을 받았지만 광둥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탈락당했다.
홍콩 폴리텍 대학은 규모 있는 대학인 것 같았다. 섬유, 패션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고 있었고 엄청난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작은 학교도 아니었다. 목욕탕 타일 같은 분수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학교는 밖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컸다. 여기저기서 단체 후드티를 입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는데, 학교 축제인가 싶어 잠시 구경했다.
소개받은 친구를 만나 같이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알고 보니 분과 대학별로 또 전체 학생회장 선거철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역동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을 불러 공약을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다양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상대 후보 진영에서도 자기들만의 구호를 외쳤는데, 마치 댄스 배틀을 하듯, 열정적이고 유쾌하게 서로의 구호를 외쳤다. 목이 쉬어가는 학생의 구호를 계속 듣고 있기 애처로워 이번엔 패션디자인학과 스튜디오를 구경하기로 했다.
내가 갔을 때 학생들은 졸업 심사와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얼마나 학생들이 피로를 감추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있었냐였다. 친구의 설명을 들어보니, 졸업을 하기 위해서 졸업 작품으로 드레스나 옷을 제작하고 심사가 끝나면 졸업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밤을 세서 옷을 열심히 만드는 이유는 졸업 작품이 선발되면 졸업식 이후에 열리는 학교 패션쇼에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여기 사진에 있는 학생들도 벌써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열중하고 있다는 말에 감탄했다.
마네킹들이 무섭게 즐비했던 복도를 지나니 강의실과 회의실 그리고 소모임실 등이 있었다. 유리창으로 된 강의실에는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서로의 작품을 평론하는 시간이었다. 학교 복도나 계단 등을 봤을 때 낡은 벽돌 건물같이 느껴졌지만 이렇게 강의실 앞으로 오니 뭔가 세련됐다는 느낌도 있었다. 특히, 벽돌의 답답함과 유리의 투명함이 공존하는 건물이 마치 어제 보았던 높은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누리끼리하고 낡은 건물들의 아름다움 같았다.
그렇게 실내 구경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새로 생긴 건물로 함께 발을 맞췄다. 소개받은 친구는 원래 제품 디자인으로 입학하고 싶었지만 옷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패션디자인학과로 들어왔다고 한다. 남자라서 경쟁에서 역으로 밀리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고 하지만 그는 일부러 경쟁을 부추기는 성격 같진 않았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흰수염고래 같았다. 희고 중간에 그어진 푸른 창문들은 마치 하늘을 바다 삼은 듯 보였다. 건물 안에는 학생들이 디자인한 제품들과 건축 디자인 등이 모델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나 보니 다시 바다가 나왔다. 걸음을 다시 따라 걸어보니, 숙소에서 학교까지 20분, 또 학교에서 바다까지 20분이었다. 정말 여기는 20분 안이면 다 갈 수 있나 싶었다. 바다는 고요했다. 내 앞에 높은 건물들이 딱히 높아보지 않게 서있어서 그런지, 하니면 서울의 한강이 생각나는 건지 보스턴의 찰스강이 생각나는 건지, 매번 바로 바다 같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 숙여 물이 방파제에 부딫이는 모습을 볼 때, 그제야 바다 냄새가 피어올랐고, 뜨거웠던 태양도 결국은 바다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바다가 맞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을 기약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미리 인사라도 잘 해놔야 하지 않을까? 나중 이야기지만, 홍콩에 다시 갔을 때 잠깐 만날 수 있었다.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선착장을 향해 걸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걸을 수 있기에 걸었다.
선착장에 들어와서 옆에 누가 주차해놓은 크루즈선을 보았다. 나는 한 번도 저렇게 큰 배를 타보지 못했다. 나는 바다와 딱히 친하지 않았고 배를 타고 무언가를 해본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내가 타본 가장 큰 배는 우연치 않은 기회로 타본 군함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를 타보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멀리를 할 테고, 먼 곳을 바라보며 멀미를 잠 재우는데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왠지 배를 타보고 싶었다. 저렇게 큰 배든, 어떤 배든, 상관없이 바다 같지 않은 이 바다 위를 질러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배를 탔다. 물론 스타페리를 탔다. 오늘 하루는 늦게 시작했기도 하지만 너무 빠르게, 그리고 또 동시에 너무 느리게 흘렀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벌써 태양은 달에게 색을 잃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나는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게 참 신기하고 좋았다. 그런 하루의 연속을 만끽해본 게 한참 된 것 같다. 그저 흐르는 데로 떠다니고, 그렇기에 길을 잃어도 아무것이 잘못될게 없는 하루는 꿈같은 시간이다.
배에서 내려 다시 떠나가는 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아니 바다를 건너온 것 같은 혼자만의 분위기를 잡았다. 사실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혼자 낯선 곳에 있는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딱히 내가 낯선 곳에 있어서 생기는 외로움만 같지는 않았다. 대인관계라는 게, 어떤 사회조직에서 생활하든,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온다. 그래서 잡을 수 없는 게 사람이고 막을 수 없는 게 사람인가 싶다. 배를 타고 이 바다 같지 않은 바다를 건너왔을 때, 다시 또 떠나가는 배가 참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때 난간 앞에 서서 좋아하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혼자 남는 게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건, 혼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일이다."
가능할지 몰랐고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었지만, 이번 홍콩 여행은 마치 관람차 같은 여정이었다. 분명 천천히 가는 듯한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느린 것 같다. 나같이 높은 곳에서는 온몸에 땀이 나는 사람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여행이 신기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 행선지와 상관없이 - 과연 이렇게 또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홍콩섬에서 다시 구룡반도로 넘어올 때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또 지하철만의 느낌이 있다. '땡땡'은 순박함이 있고 페리는 거침이 있는, 지하철은 지하철만의 향이 있다. 정해진 철로를 따라 가지만 항해하는 느낌이 충분한 지하철은 어쩌면 반항아가 아닐까. 찍은 사진을 보다 침샤추이에서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야시장도 가볼 겸 몇 정 거장 더 가보기로 했다.
야시장은 신기했다. 생각보다 길었고, 생각보다 살만한 물건은 없었다. 어쩌면 불안함일 수도 있다. 사귀면 어쩌지? 골목은 좁았고 상인들은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오면 오는 데로, 가면 가는 데로 관심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했다. 사람은 모두 일정한 정도의 관심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그래서 더더욱 남의 눈치를 보는 건가? 생각하며 걷다 냉장고 자석을 봐서 몇 개를 골라보았다.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비싼 탓에 하나를 골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종이와 자석이 따로따로 였다.
나의 시장 경험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다들 다를 것이다. 그곳에서의 목적이 쇼핑이라면,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재밌는 건 식당이 마치 반토막 난 것 같은 구조였다. 모든 식당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야시장에 있는 식당들은 그랬다. 어디가 밖인지 어디가 안인지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앉아서 먹었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안'에서 음식을 먹어도 밖에서 먹는 기분이 들었다. 아예 거리에 테이블을 놓고 먹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세계 어디나 맛있는 식당은 식당들만의 특징이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 허름하고, 간판은 조잡하며 메뉴가 많건 적건 잘하는 요리는 하나 두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홍콩에서 처음 먹는 야식은,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듯했지만, 그만큼 두 세상을 다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4편에서 계속)
내가 샀던 스티커는 그냥 무난하게 HONG KONG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재밌는 글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