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다큐프라임 6부작<진정성 시대> - 5부
우리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 트레킹을 온 사람들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촬영팀이 방문한 시기(겨울)는 너무 추워서 성수기가 아니며 심지어 많은 라다크인들도 더 따듯한 지방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라다크의 겨울은 저녁엔 영하 30도 혹은 그 이하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이해준 분들은 바로 숙소 사장님의 자녀분들이었다. 외국에서 온 우리가 신기한지, 아니면 사진 찍히는게 너무 좋은 건지(?!) 볼때마다 인사하며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남의 아이지만 속으로 저 아이가 크지 않고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머물렀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많다.
처음 인도에 오기 전에 나는 휴대폰 로밍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1) 라다크 중에서 기지국이 있는 도시 레(Leh)에서도 로밍이 효과가 없고 (2) 아마 우리가 촬영하는 마을은 산골이라 더더욱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현지에서 최대한 와이파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숙소에서 제공하는 무료 와이파이도 매우 작은 와이파이 도시락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연결해서 쓰려는 상황이였고, 레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더불어 숙소에 갑자기 뜨거운 물이 안 나오거나 난방이 되지 않을 때, 혹은 장비 충전 중에 전기가 나가 급하게 프런트 직원에게 문의했을 때 돌아오는 답은 항상 똑같았다. "여기 라다크예요. 원래 이래요."
레 광장의 많은 가게들은 이미 셔터를 굳게 닫고 있었다. 어렵사리 마트를 찾아 약 한 달 동안 사용할 물티슈, 화장지, 식품, 여분 배터리, 침낭 등등을 샀다. 라다크는 천연 소/낙타 가죽이나 청동 공예품 등이 유명한데 처음 도착했을 때 여유롭게 둘러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니 아쉽다. 시간이 없어도 이왕 가는길에 천천히 두 눈 속에 느긋하게 담을 수 있었을텐데. 설레임만큼 긴장감이 존재했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잘 찍어야한다는 사명감과 잘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많은 가게들이 겨울철 비수기에는 장사를 하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겨울에 방문했던 터라 온도는 낮았지만 태양은 피부를 태울정도로 뜨거웠던 것도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이 곳은 웬지 겨울이 더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풍경을 어떤 건축 양식이라 특정하기엔 내 지식이 짧지만, 분명 유럽과 중동을 섞어놓은 듯 했다.
레 광장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엔 반발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레의 유일한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사진 방향의 오른쪽으로 가면 골목으로 더 많은 가게들과 사람 사는 동네가 있다.
촬영 준비 하며 돌아다니다 꼭 가봐야 한다는 차(tea) 거리에 갔다. 원래부터 대만 밀크티 등을 좋아했던 터라 처음엔 아낌없이 마셨다. 이때만해도 라다크에서 수없이 다양한 차(밀크티, 버터 티, 솔트 티 등...)를 그렇게 많이 마시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아마 독일은 맥주, 러시아는 보드카, 라다크는 차가 아닐까.
레(Leh)는 분명 한 번쯤은 다시 오거나 아예 한두달 살아보고 싶은 동네라고 생각하며 본격적인 이동을 준비했다.
산을 좋아하면 산을 우러러보게 된다. 산을 정복하고 싶은 마음도 그런 마음의 일종일 것이다. 나는 산을 정복할 능력은 없지만 광활한 도로에 펼쳐진 산이 모두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리고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히말라야는 사람을 짓누르는 산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대단하면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기 마련이듯, 그 거대함과 광활함에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도 스스로 작음을 느끼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포장 비포장 도로를 달려가며 내가 만날 사람들과 마을을 상상한다. 비행기로 총 11시간이 넘게 날아온 곳에서 다시 차로 서너시간 정도 산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라다크에는 큰 강이 두 개가 흐른다. 잔스카르 강과 인더스 강. 비탈길 옆에 보이는 잔스카르 강은 몇 해 전에 크게 범람한 적이 있다고 했다. 떠내려가는 얼음 조각들과 옥빛 강의 모습 속에서 이동의 피로도 잊은 채 이 곳 저곳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정말 간이로 만든 것 같은 투박한 철교를 건너고 또 건넌다. 아직 대부분의 마을들은 비포장 도로가 많았고도로공사 구간도 많았어서 이동이 쉽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포장도로가 생긴 것 자체가 원래 여서일곱 시간 걸릴 길을 서너 시간으로 단축했다고 하니 다행이다.
우리가 가는 행선지는 레(Leh)에서 차로 서너 시간 이동하고 또 걸어서 약 두 시간 더 협곡 사이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최대한 이동하는만큼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생소함과 비현실적인 이 풍광은 잠시라도 쉬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라다크는 황홀한 기분을 선사했다.
'저 길 보이시죠? 저기가 실크로드 길이에요.' 툭 하고 코디가 말했다. '네? 실크로드요? 저기 가요?' 라다크는 원래 왕국이었고, 아직도 나름 왕족 문화가 공공연히 존재한다. 인도 정부가 카스트 제도를 폐지했다고 해도 성(last name)만 들어도 신분이 그어지듯, 이 곳도 자신들만의 신분이 있었다.
더불어 라다크에는 고대 인도 왕들도 칭송했던 다양한 장인들이 살았고 아직도 살고있다고 한다. 청동 공예 장인 마을, 부처 상을 만들거나 그리는 스님들의 마을 등. 뜬금없지만 나는 실크로드라는 절벽을 보며 칭기즈칸 시대를 상상했고, 저 비탈길을 당나귀나 말을 끌고 다녔을 상인들의 모습을 넋나간체 상상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라다크에 흐르는 두 강이 합류하는 곳은 정말 살면서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물은 얼어있었지만 두 강의 색깔이 달라서 합류하는 모습이 더욱 장관이라는 말에, 촬영이 끝나고 다시 도심으로 나올 때 꼭 보았으면 싶었다.
'이제 다 왔다'는 말은 차로 다 왔다는 말이다. 촬영지 마을에서 미리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친히 소 두 마리를 끌고 와주셨다. 비행도 끝나고, 차량도 끝났다. 이제 가방을 짊어매고 두 다리로 움직여야 한다.
가볍게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길은 우리 촬영팀의 개인 짐과 촬영장비, 식품과 비품 등을 모두 실은 소 두 마리와 함께 걸으니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특히 협곡은 길이 좁고 얼음으로 길이 얼어있는 구간이 심했다. 꾸불꾸불 오르락내리락 걸어가야 했다. 이럴 땐 별생각 없이 그저 걷는 것밖엔 할 수 있는게 없다.
걸으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암벽의 색깔이 모두 다 제각각 달랐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층별로도 다르고 옆에 있는 암벽과도 다르다. 더군다나 협곡은 꽤 높아서 정말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옷장 속 세상이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어딘가로 흘러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출연자 케이틀린과 제이슨, 그리고 마을의 가장 젊고 이장 역할을 하는 푼촉까지 함께 걸었다. 터벅터벅 걸으며 앞을 보니 끝없는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이 마을은 도대체 어떤 마을이길래 이렇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까. 어쩌면 예전에 요새로 쓰이진 않았을까? 너무 적막하진 않을까? 페트라처럼 이 바위 사이에 살고 있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결국 또 걷고 걷는다.
사전에 한국에서 촬영을 준비할 때 아무리 찾아도 이 마을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사진 몇 장 소개되었었지만 이 마을을 들어가는 길이나, 마을의 전체 풍경이라던지, 정작 필요한 내용을 찾고 미리 준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촬영 하기 전에 장소를 미리 보고 상상하면 좋았을 텐데 하며 내심 마음속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걱정은 그저 이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순간적인 생각으로 잊혀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히말라야, 누군가는 바람이 잠시 쉬어갔다 가는 곳이라고 했다. 사전적으로는 산스크리트어 hima (눈)과 a-laya (머물다)라는 합성어로 만년설산이라는 뜻에 가깝겠지만 나는 바람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뜻도 참 마음에 들었다. 바람도 잠시 쉬어갈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 코디네이터가 마을 주민이 우리의 짐을 옮기기 위해 소를 데려온다고 했다. 라다크 현지 코디네이터와 영어로 말하지만 처음엔 정말 소라고 했다. 예컨대 "They will bring So" ('소'를 데려온데요). 아니 짐을 위해서 소를 데려온다고? 그리고 소를 소라고 부른다고? 알고 보니 황소와 일반 소가 섞인 조(Dzo) 발음을 내가 '소'라고 오해했던 것이었다.
조는 밭도 갈고 짐도 잘 든다. 일반 소보다 훨씬 크기가 크고 보기만 해도 분명 힘이 세 보인다. 묵묵히 걷는 조가 있어서 참 든든했다. 터벅터벅 걷는 나와는 달리 묵직하게 한걸음 한걸음 걷는 조가 멋졌다. 물론 피곤하다고 생떼 피우기 전까지.
나름 산에 많이 다녔는데 생각해보면 야생동물을 눈 앞에서 가깝게 본 경우는 드물다. 미국에서 고라니, 산록,노루 정도가 (청설모나 토끼 여우 제외) 전부다. 그런데 여기 내 눈앞에 산양이 절벽을 오르고 있다. 산양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산을 오르네.
나중에 마을 분들에게 들은 썰이지만 눈표범이 내려와 양을 많이 잡아먹기도 하고 실제로 직접 눈표범을 내쫓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농담하지 말라고 했더니 눈표범이 죽은 자리와 어떻게 죽었는지 실감나게 설명하셨다. 나중에 촬영하면서 저녁마다 메아리치는 올빼미 소리와 저 멀리 산에서 들리는 어떤 동물의 표호가 들리기도 했다. 낮에는 독수리들이 높은 절벽 위에 튼 둥지를 빙글빙글 돌며 나는 모습을 보니 눈표범이 없는게 이상할 것 같았다.
드디어 마을이다. 아니, 드디어는 내가 붙인 말이다. 마을 초입부터 얼음 빙판을 조심하라고 했다. 왜인지 나무들이 얼음 안에 있었다. 아마 여긴 시냇물이 흐르나 보다. 이 마을의 여름날 시냇물 소리, 살구나무에 열린 살구들, 풍성한 밭, 양 떼가 양치기를 따라 산을 오르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마을의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마을에 들어오니 집이 띄엄띄엄 한 채씩 보인다. 우리가 머물 숙소는 출연자 제이슨과 케이틀린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콘촉 팔모의 집 2층 방들이다. 게스트하우스가 없다보니 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전에 논의해서 정했다고 한다.
집 주인 콘촉 팔모는 나이가 많았지만 가족 중 막내였고 노년의 아버지를 두고 멀리 시집갈 수 없어 아직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여 콘촉 팔모와 그녀의 아버지 왕축과 인사를 나눴다. 짐을 풀 정신도 없이 마을을 잠깐 걸었다. 긴 걸음과 차량 이동으로 제법 피곤했지만 이 협곡 속 마을의 모습이 더 궁금했다. 케이틀린이 직접 마을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저 쪽으로 가면 케이틀린과 제이슨이 사는 작은 집이 나오고, 이쪽으로 가면 누구의 집이 나오고. 약 열 가구가 살고 있는 이 곳 마을은 모두가 가족같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서슴없이 부를 수 있다. 케이틀린과 제이슨이 사는 집도 아마발루 ("키 작은 어머니"라는 애칭) 할머니가 내어준 곳이고, 파종이나 추수시기에는 서로 일손이 되어준다고 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묻지도 않고 남녀노소 손을 잡는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며 앉아있을 때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상대방이 추운지 확인하기 위해 손의 온도를 확인한다고 했다. 아마 이건 연배 있으신 어르신들의 습관인 듯하다. 얼굴을 볼 때마다 추운지 물어보는 어르신들의 물음이 온기를 느끼게 해 준다. 패딩과 내복을 겹겹이 껴입은체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면서 말이다. 밤이 되면 영하 30도를 찍는 곳에서.
우리가 머물 집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에 계신 마을 이웃들을 찾아가 인사 드렸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제이슨과 케이틀린이 미국의 삶 대신 라다크의 삶을 사는 모습과 이야기를 담으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가는 모든 집에서 차를 마셨다. 찻잔이 비어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였다 (실제로 손님의 찻잔에 차가 비어있으면 큰 결례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숙소에 돌아와 짐을 풀고, 장비를 준비하고, 첫날 밤을 맞이했다.
이 곳은 보일러도 없고, 수도도 없다. 화장실은 2층에서 1층으로 떨어지는 구조의 푸쇄식이다. 심지어 그것마저 비료로 쓰인다. 마을 곳곳에 전깃줄이 보여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최근에 나라(인도)에서 몇몇 집에 태양열을 설치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태양열은 우리 촬영팀의 카메라나 노트북을 충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였다. 집의 전구 몇 개 정도 정해진 저녁 시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도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을 배워가며 촬영 했다. 장작 패는 것부터, 우물에서 물을 길러오고 물을 아껴쓰는 것, 차를 많이 마시는 것, 기름을 너무 많이 쓰지 않고 난로에 불을 잘 붙이고 오래갈 수 있도록 유지하는 법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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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곳 마을의 시간이 익숙하지 않았다. 해가 떠있는 건지 모를 아침과 해가 쨍하다 싶은 짧은 오후, 어둡긴 하지만 오후이긴하고, 그리고 다시 급격히 어두워지는 시간이 어색했다. 시계를 봐도 적응하기 어려웠던 시간 속에서도 매일 오전 기상 시간만큼은 확실했다. 왕축 할아버지가 장작 패는 소리가 나면 그때가 이른 아침이었다.
매일 오전, 왕축 할아버지가 장작을 패고 있는 동안 케이틀린을 비롯하여 마을 주민들은 얼어있는 시냇물 중 우물로 사용되는 구간에서 물을 길렀다. 우리가 마시고, 씻고, 사용하는 모든 물은 저 우물에서 나온다.
한국에서 마을 관련된 자료를 찾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연히 테라스 형태의 밭이였다. 비록 내가 본 사진들은 푸른 밭에 여름날이었지만, 겨울날의 밭은 또 그만큼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특히나 엄청난 암벽에 온전히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따듯한 이 마을은 마치 누가 흰색 물감을 더해 더 따듯하게 만든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이 마을의 테라스 밭은 모두 돌담으로 지탱된다는 것이다. 수로 또한 돌담인데, 마을 사람들이 몇 세대에 걸쳐 계속 돌을 쌓고 또 쌓으며 손수 정비한 것이다. 이 곳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낭비되는 게 없고,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공동체의 삶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이 마을은 해가 떠도 일부 부분에만 해가 닿기 때문에 촬영 시간과 장소가 상당히 중요했다. 물론 빛이 아예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밝은 곳과 밝은 때, 어두운 곳과 어두운 때를 신경 쓰며 찍고, 온도 때문에 급격히 저하된 배터리를 잘 보관하고 제 때 충전하는 것도 일이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장비와 노트북 등을 충전하기 위해 발전기를 빌려 사용했는데, 고요한 마을에 울리는 발전기 소리는 촬영이 중단된 상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우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제한된 일부 시간에만 발전기를 돌렸고, 그것마저도 죄책감이 느낄 만큼 이 곳 마을 사람들의 삶은 자연과 밀착했다.
제이슨과 케이틀린을 섭외하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을 수소문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심지어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했는데 다행히도 생전 얼굴 한번 본적 없는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제이슨과 케이틀린과 연락이 닿았다.
그들을 처음 실물로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눈 순간은 마치 내가 레(Leh) 공항에 착륙하기 전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았던 히말라야 산맥과, 레 도심의 따스한 풍경과, 마을에 들어오는 협곡이 주는 안정감과 경의로움을 모두 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런 사람들이였다. 따스한 배려, 자연보호,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 말이다.
제이슨과 케이틀린은 라다크 요리도 잘했다. 마을 이웃 주민들과 정을 나누며 삶을 함께 살다 보니 더욱 많이 그리고 빠르게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들만의 스타일로 요리를 각색하기도 하였다. 촬영 중간에 라다크 현지식을 분명 함께 만들고 나눠먹었는데 사진엔 굶주린 세명의 영혼들이 위대하신 제이슨이 밥을 주길 기다리는 것 같다.
아무래도 촬영을 하다 보면 촬영팀끼리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그것도 시간을 내서 찍어주는 게 아니라 찰라의 순간에 찍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 휴대폰으로 찍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추억 남기기가 참 어렵다. 참고로 사진 속 나는 쉬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촬영 중이다.
흔히 방송에서 '인서트'라고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대화나 인터뷰 장면이 아닌 풍경이나 행동들을 담는 장면이다. 자연의 모습일 수도 있고, 빠르게 움직이는 별을 담은 타임랩스 일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인서트를 찍으러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다 굴러 떨어졌다 (생각해보니까 드론으로 찍으면 됐는데...)
삼각대는 조금 부러졌고 패딩이 찢어졌다. 몸이 아픈 건 둘째치고 너무 추워서 찢어진 패딩이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 날 촬영이 끝나고 제이슨이 오래된 스웨터로 장갑을 만들 거라고 했다. 바느질 해본 적 없는 나는 제이슨 옆에 앉아 생전 처음 바느질을 배웠다. 현란한 솜씨는 아니지만 구멍 난 패딩을 꿰매기에 충분했다.
떨어지고 난 뒤에 몸이 아파와서 반나절 쉬었다. 오전에 열이 나서 앉아서 쪽잠에 들었는데 제이슨이 생강차를 보온병에 담아 쪽지와 함께 놓고 갔다. 'Feel better, friend.' 세 단어로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 수 있다는게 참 좋았다. 물론 덕분에 아픈 것도 금방 나았다.
이 곳 마을은 역설 속에 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역설은 비단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젊은 청년들은 점점 도시로 나가면서 농촌 일손이 부족해지고, 나라에서는 더 이상 오지마을에서 살지 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세대가 살아온 마을을 쉽게 떠나겠다고 결정하지 못하면서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어쩌면 앞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함을 갖고 있었다.
비록 효율은 적지만 몇몇 집에 국가에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줄 때도 마을 차원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일손이 줄어들기 전엔 모두 합심해서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길렀다. 더 많은 가축이 있었고, 밭을 가꾸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새참을 먹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인들만 이 땅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조금 더 편하게 농사를 짓고 삶의 터전을 유지하려면 어쩌면 기름 넣는 트랙터를 들여와야 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자연, 따스한 사람들, 멋드러진 협곡과 공동체 마을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촬영 중에 때마침 마을 청년 두 명과 아이들 몇 명이 마을에 있었다. 가뜩이나 시냇물도 얼었겠다, 우리 신나게 썰매나 한번 타보자! 때로는 재밌는 게 장땡일 때가 있다. 비단 방송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일단 시냇물이 얼었고, 나름 속도가 붙을 것 같은 경사 구간도 있겠다, 누가 더 빨리 내려가나 한번 해볼까 싶은 순수한 재미 말이다.
하지만 일단 제대로 된 썰매가 없다. 그리고 이 경사가 진짜 썰매 타기 가능한 경사인지 모르겠고, 썰매 없이 과연 어떻게 썰매를 탈지 아무도 몰랐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앞장섰다. (조금 편하게 풀어보자면) 거의 '야 비켜봐, 내가 타본다!'였다.
처음엔 넘어지다가 나중엔 요령을 좀 터득하고서 엉덩이, 등, 배로 썰매를 탔다. 서로 넘어지며 깔깔 웃고 한참 놀다 보니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 구경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가 진짜였다. 아마발루는 포대를 가져왔고, 콘촉팔모도 집에 있는 썰매 역할을 해줄 물건을 모색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서로 시끌벅적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을이 겪고 있는 고민도 비록 짧게나마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썰매는 너무 재밌었다. 뷰파인더 안에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 그리고 어른들까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협곡 속 조용한 마을이 오랜만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마을 사람들의 삶에 우리도 녹아들어 갔고 제이슨과 케이틀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삶의 태도를 조금씩 더 알아갔다. 과연 진정성은 무엇일까라는 끊임없는 자문과 의문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마을 강아지가 내 마이크의 윈드필터를 잽싸게 드셨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너무 당황했었는데 지금은 재밌는 추억이다.
촬영 하다 보면 때론 잠깐의 쉼이 가장 큰 발견이 되기도 한다. 그냥 잠시 앉아서 움직이는 구름을 보며 햇살 좋은 곳에서 쉬거나, 아니면 나무를 진짜 대패로 깎으며 곧 다가올 티베트 신년 제사에 쓰일 함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처럼 말이다.
이런 순간 속에서 문명으로부터의 고립은 더욱 증폭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자유가 주어지기도 했다. 내가 원래 살던 세상과 일체히 단절된 곳에서 되려 평상시에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된다. 대패질로 나오는 수많은 나무껍질처럼 같이 생각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치이기도 하고, 생각 때문에 매일 저녁 자기 전 별을 더 많이 보기도 했다. 온전히 비로서 홀로라고 느낄 때, 내 일상을 초월한 공간에서만 가능 했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 경험은 극도의 불안함과 엄청난 평안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촬영은 주로 아침부터 해지기 전까지 한다. 다큐멘터리 특성상 현실 상황을 잘 선별해서 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극영화처럼 조명을 다 설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별을 찍기 위해 새벽까지 보초 서듯 촬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촬영은 해가지기전에 마무리가 된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우선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동화되어 더 시간을 많이 보낼 수 밖에 없다.
어느날 모두가 사랑방에 앉아 있을 때 케이틀린이 왠 동물 가죽을 들고 왔다. 마을에 사는 이웃 할머니가 무릎이 많이 시리다고 하셔서 양가죽 담요를 만들어 선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양가죽 담요는 어떻게 만드느냐, 일단 모든 과정은 모르지만 저렇게 힘껏 가죽을 늘리고 말리고를 반복해야한다. 계속, 늘리고, 또 늘린다. 끊임없이.
가죽을 번갈아가며 늘리거나, 촬영본을 옮기면서 훑어보거나, 나무로 숟가락 만드는걸 해보거나, 장비를 점검하고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 주로 저녁 식사 준비가 진행된다. 우리 촬영팀도 저녁 식사 준비를 돕는 것에서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는 물을 길어오거나, 누군가는 음식을 나르거나, 또 누군가는 식탁을 세팅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나 같은 경우는 주로 물을 길어오거나 동네 꼬마 아가씨 파드마 이제스가 놀러오면 같이 사진 찍고 노는 역할을 했다. 장작은 영 내가 담당하기엔 내 실력이 부족했다.
파드마의 부모님도 점점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면서 과연 이 마을에 계속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도시로 나가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민은 충분히 현실적이고 근본적이였다. 도시와 고향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도시에서는 주머니(지갑)에 손을 많이 넣어야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의 고민처럼 들렸다.
파드마는 알고 있을까, 네가 내 핸드폰으로 찍은 엄청난 양의 셀카들을 아직도 지우지 모하고 있다는 것을!
곧 있으면 촬영이 끝나간다. 항상 촬영이 끝날땐 언제나 미리 아쉬움이 들고, 더 찍어야 하는데 못 찍은 게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하게 된다. 사실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는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과 빨리 친해지고 또 기약된 시간에 떠나야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참 새로우면서도 슬픈 일이구나. 이런 마음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와 미래를 기약하는 것 밖에 없다. '우리 다시 만나요, 꼭'이라고 말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을 보내고 다시 도심으로 나간다. 그리고 다시 협곡을 지날 때 나는 고 김광석 씨의 잊히는 것들을 흥얼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히말라야, 라다크, 그리고 이 마을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나에게 선사했다. 삶의 중요한 가치를 찾아가며 실현하는 사람들의 모습, 지금과 미래 사이에서 고뇌하고 걱정하지만 우선 매일 주어진 하루를 자신들의 방식대로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은혜로 닿아왔다. 무엇보다 제이슨과 케이틀린의 이야기를 담으며 되려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은 분명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다시 도시 레(Leh)로 나왔더니 10년 만에 내린 폭설로 국내선 비행기가 모두 결항되었다.
황급히 숙소를 연장하고, 국제선 비행기표를 늦추었다. 하지만 문제는 국내선 비행기표를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투숙객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그리고 전화보다 매일 공항에 직접 가서 항공사 직원에게 확인하는게 훨씬 빠르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약 3일 레에서 더 고립(?!) 된 시간 동안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래려 걷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