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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시간부자야!

오른손 깁스

by 빈틈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기온도 영하로 떨어진 날.

우리 가족은 강원도 어딘가에 있었다.

일 년에 눈을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곳에 사는 우리가

하필 온 세상이 하얀 이때 강원도에 있었다.


미끄덩, 쾅!

그리고 첫째는 오른 손목에 골절상을 입었다.




얼마 전 3년을 다니던 수영을 그만두고

요가를 새로 배우게 되었다.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이 차츰 늘어가다 보니

스트레칭이 필요할 듯했다.

방학에는 줄넘기로 체력 보강 예정이었다.


피아노를 배운 지는 이제 꽉 찬 2년.

이번에 첫 대회를 앞두고 곡 연습에 매진 중이었다.

이제 전곡을 다 치게 되어 악보만 외우면 된다고 했다.

전화번호 외우기도 어려운 요즘인데

한 곡을 치기 위한 악보를 외우다니

기특하기만 했다.


미술은 매주 금요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간다.

꼼꼼함이 도를 지나치고 손도 느린 편인데

엄마도 못 기다려주는 그 느린 손을

미술 선생님은 한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기어코 기다려주신다.


그. 런. 데.

그 모든 것을 오른 손목 골절 하나 때문에

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치 5주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특히, 겨울방학이라는 중대한 기간에는 말이다.


물리치료를 하고 깁스를 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치료를 받는 동안 혹여 아이가 지루해할까 싶어

책을 몇 권 들고 갔다.


만지기만 해도 아파서 울상인 아이는

책 한 권 쥐어주니 이내 조용해졌다.

마치 "빼~" 하고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쥐어주니

뚝 그치고 핥아먹는 것처럼 말이다.


치료받는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더니

아이가 상기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엄마, 난 시간부자가 됐어!

원래 피아노 학원 갈 시간인데

이렇게 편히 누워 책을 보고 있다니

아픈 건 별로인데 이렇게 있는 건 좀 좋아."


그래,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걸 붙들고 속상해해 봤자

무슨 소용이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왼손으로 5주 기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아이와 상의하는 것뿐.

당장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검색해 리스트업 했다.



저녁시간,

우리 가족은 팥죽을 한 숟가락씩 나눠먹었다.

주말과 오늘 사이의 일이

동짓날 팥죽을 먹지 않아 생긴 일이라며

뒤늦게나마 액땜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첫째와는 특별히 한 가지를 더 다짐했다.

다쳤다고 망연자실하지 말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우리는 시간부자가 됐기 때문에.



사진출처 : 픽사베이 무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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