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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크리스마스였어

그럼 내년은?

by 빈틈

잠들기 전 하루동안 감사한 일을 나누는데

오늘은 좀처럼 감사한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아이.


"선물을 받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아.

집에만 있고 숙제까지 했잖아!

완전 최악의 크리스마스야!"

"... 너도 그러니?"




12월이 시작하자마자 안팎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방학 전 치과와 안과를 다녀와야 했다.

첫째는 초등 3학년 관문을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0.6의 시력에 당첨, 안경을 껴야 했다.


거기다 생각지도 못하게 오른팔을 다쳤다.

어느 눈 많이 내리는 영하의 추운 날

눈 아래 조용히 숨은 얼음길에 발이 미끄러졌다.

누구는 다쳐도 왼쪽을 다치던데

우리 집 첫째는 오른쪽 부상이 벌써 두 번째이다.

더운 여름을 깁스하고 꼼짝없이 지냈는데

이젠 추운 겨울을 오른손을 묶고 보내야 한다.


친구처럼 지내는 남매는 첫째의 부상으로

막내 또한 1월 한 달은 집콕 예정이었다.


나와 남편도 나름 지쳤다.

연말이면 그 어느 때보다 한 층 바빠지는 남편이다.

나름 해외여행으로 휴양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현실 속 과중한 업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피로는 다시 누적 중.


아픈 아이들과 남편 챙기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급히 주문한 슬라임 세트가 이브날 도착했다.

휘황찬란한 겉포장 덕에 별도의 포장이 필요 없었다.

트리는 손바닥만 한 것 하나 겨우 거실이 내놓았다.

밥은 뭘 해 먹나 싶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 비었다.


문득 예년과는 다른 크리스마스 기운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12월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전구가 달린 트리를 꺼냈다.

트리의 불빛을 보고자 조금 일찍 거실 불을 껐다.

여유공간이 많지 않아 큰 트리를 장만하지 못했지만

우리 가족은 반짝이는 트리를 보며

하루하루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 관련된 어린이 도서로 벽 한쪽을 꾸몄다.

산타모자 모양의 가랜드를 직접 만들어

높은 책장에 매달았다.

우리 부부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머리맡에 있던 장난감 선물을 갖고 놀기 바빴다.

저녁은 스테이크, 스파게티 등 남녀노소 좋아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지만 근사해 보이는 메뉴로 선정했다.


저녁식사 후엔 모두 모여 크리스마스 영화관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

함께 <나 홀로 집에>를 관람하게 되었다.

연말쯤 항상 지겹게 봤던 그 영화를

내 손으로 다시 찾아보게 될 줄이야...

이상하게 아이들과 함께 보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소년에게 된통 당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깔깔거리며 보는 아이들.

그 모습이 좋아서 나도 덩달아 웃었던 기억.


그렇게 올해의 조금 다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아주 조용히.




잠든 아이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일 년에 딱 하루 만족스럽지 못한 것 정도

대수롭게 지나갈 수 있을 텐데

그 하루가 하필 크리스마스라 미안하고 속상했다.


안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거실에

아이의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일기를 쓰다 말고 학교 늦겠다는 나의 채근에

방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재미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올해 크리스마스도 그날처럼 아름답게 포장해 주는 아이가 문득 고마웠다.

그래, 우리가 함께 할 많은 크리스마스 중에

오늘 하루는 모래사장 속 검은 모래 한 알이기를.

내년에는 조금 특별한 곳에서 맞이하자꾸나.




사진출처 : 픽사베이 무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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