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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r 05. 2024

작가만 빠진 문체부의 독서문화계획

(출판 이야기 매거진 글입니다.)


오늘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 공청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체부에서 독서문화 발전을 위해 수립한 기본계획 초안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는데요, 정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공청회는 '전반적으로는'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10분의 훌륭한 패널이 나오셔서 어떻게 하면 독서 인구를 늘릴 수 있을지 다각도에서 논의를 했고, 정말로 경청할만한 발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서문화를 논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10분의 패널 중 단 한 명도 작가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중간 유통 단계(출판업, 서점, 도서관)분들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대화하는 건데 그 둘을 빼놓고 유통업자끼리 독서문화 발전을 논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독자는 그래도 '연구대상'이라도 되었지만 작가는 단 한 번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빠지고 독서 문화를 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패널들이 두 시간 동안이나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좋은 책'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통업계에서는 어떤 책이든 많이 팔리기만 하면 그만이니깐요. 서점을 운영하시는 패널 한 분이 스스로 자신들은 영리 단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두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의 골자는 비독자(책 안 읽는 사람)를 연구해서 책을 읽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통업계(도서관 포함)에 정부 지원금을 줘야 하고, 관련 계획을 세울 출판업계 종사자의 의견을 받아야 한다에서 머물렀습니다. 도서관 관장님 등 두 분 정도는 양질의 책을 살짝 언급하셨으나, 그런 글을 쓸 수 있고 또 읽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애당초 문체부부터가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부르지 않았던 거고요. 문체부가 수립한 기본계획 초안의 목표는 그저 '독서 인구 늘리자'가 전부입니다. 그 뒤가 없습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output(산출물)만 있고 outcome(성과)이 없는 것이지요. 이게 왜 문제인지 제 본업인 개발협력의 지식을 살려서 설명드리겠습니다.


20세기 중반에 냉전이 시작되고 식민지가 하나둘씩 독립하자 서구 국가들은 아프리카 국가 등이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개발을 지원합니다. 교육 분야를 예로 들자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물을 지어줘도 정작 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가사노동을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요. 그래서 뒤늦게 '학생 수'를 지표로 삼아서 개발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요. 학생 수를 늘리기는 게 목적인가요? 아니죠. 학생들 공부시키는 게 목적이죠. 그런데 학교 짓고 학생 수까지 관리를 해도 교육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결석도 잦고요. 그래서 아이들의 '성적'을 성과목표(outcome)로 잡고 관리합니다. 이때가 언제냐면 무려 30년도 전입니다.


문체부에서 세운 성과목표(outcome)가 빠진 기본계획은 책으로만 볼 수 있었던 유물 같은 건데 그걸 2024년에 보게 되다니. 솔직히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관용어가 아니라 실제로요.


우리가 독서 인구를 늘리려는 목적은 무엇이지요? 유튜브 시청하는 것보다, 독서를 통해서 얻는 지식의 가치가 더욱 좋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개인에게나 사회 전체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오신 모든 패널분들이 당연히 이런 전제를 깔고 얘기들을 하셨고요. 그런데 이분들은 작가가 좋은 책을 쓰기 위해 피나게 노력한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그냥 책이면 다 좋은 거지 하며 어디서 저절로 굴러떨어지는 돌멩이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보문고의 표어에서도 발견됩니다. 다들 아실 겁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표어는 독서 인구가 없는 개발도상국에나 어울리는 겁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요? 그게 좋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요? 모든 책이 좋은 건 아닙니다. 나쁜 책을 읽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정쩡한 책을 읽고 아무 변화가 없을 수도 있죠. 그러니 좋은 책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로 슬로건을 바꿔야 합니다.


즉, 독서인구가 늘어난다고 무조건 독서문화가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해마다 출간되는 8만여 권의 책은 학교와 같은 건물이고, 독서 인구는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입니다. 그러면 성적은 무엇에 대응할까요? 바로 양질의 책을 읽는 독서자의 수입니다.


그럼 양질의 책은 무엇일까요?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경험적으로 잘 알지요. 가령, 고전문학 같은 것들, 그러니까 인간 내면을 고찰하고 도덕적 가치를 제고하는 그런 책들이 하나의 예가 되겠지요.


그런데 작가가 양질의 책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정부 지원 등 글쓰기에 좋은 환경이 주어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책이 나왔을 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독서 인구가 아무리 늘어나도 짧고 자극적인 것만 읽는 문화에서는 고전문학 같은 책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기 위해 제가 쓴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책은 805페이지입니다. 이토록 긴 분량의 책을 낸 이유는 서점에 있는 기존에 출간된 책들이 양질이 아닌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은 팔레스타인이 착하다고 하고, 어떤 책은 이스라엘이 착하다고 합니다. 이런 책들 아무리 죽어라 들여다봐도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출처조차 없는 게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글 읽고 독자가 뭐 진실을 깨달았다고 하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거랑 같습니다. 작가도 모르는데 어떻게 독자가 정답을 알 수 있나요.


제가 8년이란 세월을 들여서 긴 글을 쓴 건 이 때문입니다. 뭐가 사실인가를 비교 검증하느라 1차 사료도 들여다보고 합쳐서 700종의 참고문헌을 봤고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제 글을 긴가민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다음 카페에서 어떤 분이 서평을 쓰셨던데, 책을 칭찬하시면서도 제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잘 모르겠답니다. 제 책이 이럴진대 다른 책은 어떻겠습니까.


문제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제 책을 읽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잠재적 독자는 앞으로 점점 줄어듭니다. 정부에서 독서 인구의 외연적 확장만을 꾀하는데, 책 이외의 미디어가 더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양질의 독서 역량을 갖춘 독자가 탄생하겠습니까. 출산율보다 더 빠르게 급락할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제가 지금처럼 공들여서 책을 쓰는 경우는 없게 될 겁니다. 독자 수준을 고려해서 그냥 가볍게 요약된 글만 내놓겠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팔레스타인이 옳냐 이스라엘이 옳냐를 제대로 따질 수가 없게 됩니다.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겠지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그러니 독서 인구 늘리자, 비독자에게 한 권이라도 읽히자 이런 말들만 하고 있지 말고,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만들어내고 그걸 사람들이 읽게 만들지를 논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정부와 출판업계, 그리고 작가 모두가 왜 책을 쓰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써야 할지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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